史/동양사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의 현재성

同黎 2013. 3. 14. 21:53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의 현재성

- 중국적 전통의 복권과 중국 대국화정책의 맥락에서

 

한국사학과

박세연

 

1. 들어가며

 

중국 호남성 정주시에는 거대한 바위산을 깍아 만든,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연신상보다도 8미터가 더 크다는 석상이 있다. 염황이제상(炎黃二帝像).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두명의 시조,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와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를 조각한 상으로 바로 얼마 전 완성되었다. 이 거대한 석상의 건립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최근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역사공정들, 그 역사공정의 내용과 목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5.4운동과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이 부정하고 배격했던 중국적 전통에 대한 복권이며, 또한 이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중국-중화대가정(中華大家庭)의 건설이다.

이러한 중국의 역사공정의 방향성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동북공정(東北工程) 역시 일맥상통한다. 한동안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대응으로 소란스러웠다. 한국의 시작에서만 볼 때는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고 한 시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공정은 비단 동북공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구르를 대상으로 하는 서북공정, 티벳을 대상으로 하는 서남공정, 몽골을 대상으로 하는 북방공정, 동남아시아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남방공정, 대만과 오키나와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해양변강공정에 이르기까지 비한족(非漢族) 문화권에 대한 대대적인 역사공정이 이루어지거나 이미 완료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러한 변방 문화권들을 중화문명권이라는 우산아래 하나로 묶어내는 단대공정과 탐원공정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동북공정은 다른 역사공정과 분리될 수 없으며 다른 역사공정들과 함께 읽을 때 그 의미가 명확해 질 것이다. 따라서 중국 역사공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는 단지 중국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하여 대항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통치전략, 그리고 세계전략-대국화 정책과 역사공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종 이야기되는 헤게모니의 전환, 미 헤게모니에서 중국 헤게모니로의 이행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국 역사공정의 이해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중국의 여러 역사공정 중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과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原工程)의 내용과 의미를 현재적으로 파악하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관 변화와 새로운 통치전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역시 함께 고민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역사공정의 배경

- 새로운 통치이데올로기의 필요성

 

근대 중국의 출발은 보통 1919년의 5.4운동으로 상정한다. 5.4운동은 이미 시대에 뒤쳐진 "중국적 전통"의 해체와 중국의 서구화를 통한 새로운 중국의 건설, 즉 근대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이미 청조가 멸망과 중화민국이 탄생하였으나 새로운 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했고, 전국이 단기서, 풍국장 등의 북양군벌(北洋軍閥)과 장작림, 담연개, 육영정 등의 지방군벌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이들은 또 하나의 봉건체제를 형성한 체, 근대화를 가로막는 반동(反動)세력으로 작용했다. 군벌들은 서로 간의 전쟁을 위하여 인민을 착취하였고 외세에 종속되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에서 진독수(陳獨秀)에 의한 신문화주의가 청년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등불이 되었고, 이는 호적(胡適), 노신(魯迅) 등이 주도하는 문화혁명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문화혁명운동은 지금까지의 정신구조 자체를 변혁하려는 운동으로 이 과정에서 삼황오제를 비판하는 의고파(擬古派)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문제를 논의한 베르사유조약에서 중국은 전승국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의 독일 이권이 일본에게 돌아가게 되고, 여기에 군벌정부가 동의하게 되는 사건을 기점으로 청년학생과 노동자 민중에 의해 주도되는 민중운동이 폭발한 것이다. 이렇듯 5.4 정신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근대정신은 반제·반봉건·반식민적 성격을 띄고 있었고, 특히 반봉건적 성격은 유교를 비롯한 중국적 전통에 대한 비판과 과거의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 내부의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중국적 전통은 봉건세대의 잔재, 반당(反黨)적 요소를 낙인찍히며 일소(一掃)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때로는 극심해져 문물(文物)파괴운동으로까지 번져나가 주은래는 자금성의 파괴를 막기 위해 천안문에 모택동의 초상화를 내어 거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하였다.타도 구세계, 건설 신세계와 같은 문화대혁명의 구호는 5,4 운동 이후 중국의 방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집권하며 주자론이 득세하고, 중국의 공산당정권이 55개 소수민족에게 해방자로 다가가기보다는 통치자로 다가가면서 새로운 통치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화주의이다. 이러한 통치전략은 더욱 거세어지는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 특히 티베트와 위구르의 독립운동을 막고, 지금의 중국의 틀을 유지하려고 것임과 동시에 중국을 미국과 같은 헤게모니 국가로 만들기 위한, 즉 중국의 대국화(大國化)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또한 주자파인 등소평의 등장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을 길을 걸으면 점차 사회주의체제 약화시키고 있으며, 사실상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였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맑스-레닌-마오로 이어지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으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는 것은 결국 정치와 경제를 때로 때어놓고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사실상 시장경제에 편입되었으며, 그 정치적 성격은 공산주의의 지향점을 잃고 국가주의, 권위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나 대내적인 상황은 그렇지 못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중국 공산당이 중국적 전통, 특히 유교의 복권을 이루어낸 것은 특기할만 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 곡부에 대대로 살던 공자의 직계 종손은 대만으로 피신했는데, 이제는 곡부에서 본토에 남은 공자의 자손들이 국가의 후원을 받아 석전대제를 지내며, 중국 학계에서도 공자 연구의 붐이 일고 있다. 이는 여러지점에서 발생하는 모순점을 유교적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봉합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유교적 충효사상을 지배이데올로기와 접합시킨 한국이 60~70년대 경험했던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 북한의 주체사상, 싱가폴의 독재자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와 동일향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유교와 중국적 전통의 복권으로 강력한 국가주의를 통해 내적인 불만을 누르고, 대국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통일적 다민족국가와 중국의 대국화를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 중국의 지배세력은 다음을 증명해야 한다. 첫째, 중원의 문명과 소수민족의 문명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즉 한족과 소수민족의 문화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지라도, 그 뿌리는 연결되어 있다. 둘째, 중화문명은 유구하며, 그 어떤 문명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우월함을 가진다. 이러한 두 가지 명제는 증명하기 위해 중국의 지배세력은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각종 역사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를 위한 역사공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동북공정을 비롯한 변강사(邊疆史)연구이며, 후자를 위한 역사공정은 바로 중화문명의 유구함을 증명하고, 중국의 역사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이다.

 

3.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탄원공정의 내용과 문제점

 

하상주단대공정은 기본적으로 서주 공화(共和) 원년 (B.C. 841) 이전의 하()와 상(), 그리고 주()나라의 연대를 확정짓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된 하상주단대공정은 중국공산당 중앙에 의하여 제95개년계획의 국가과학기술연구 중점항목의 하나로 선정되어 9개 분야의 전문가 2백여명이 참여한 대규묘의 역사공정이었다. 이 역사공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중국의 역사 기년을 1000년 이상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하상주단대공정은 하나라를 신화에서 역사의 영역에 포함시켜 하나라의 건국을 기원전 2070, 상나라의 건국을 기원전 1600,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은 기원전 1046년으로 확정지었다. 이러한 결과는 언론매체에 대서특필되었고, 중국사 연구의 난제를 해결한 과학적 진보로 평가받았다. 물론 이에 대한 의고론자들의 반박도 있었다. 중국학자 유성(劉星)은 여전히 이리두(二里頭)유적에서의 출토문자가 없는 문제 등을 근거로 들어 하나라의 역사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국내의 비판은 중국 정부의 자축과 대대적인 홍보에 의하여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미 그 연구과정과 방법에서 많은 취약점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라를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드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리두유적은 결정적으로 하나라의 존재기간보다 존속기간이 훨씬 짧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연대를 확정짓는데 있어서 청동기나 갑골문에 있는 천문기록과 갑자를 분석하여 이를 오늘날의 60갑자와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역법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음력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 이루어졌다. 또한 고고학적 자료들의 연대측정방식으로 쓰인 방사성탄소연대특정법은 최소한 수 십 년의 오차범위를 지니는 것으로 역사 시대를 연구하는데에는 부적합하며, 오차범위로 인해 딱 떨어지는 연대를 얻어낼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결국 하상주단대공정은 한족의 우월성과 중국의 유구함을 드러내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이며, 이는 중국의 문화적 보수주의 현상, 그리고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대국화의 이론적 뒷받침을 만들기 위한 연구였음을 알 수 있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2001년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역사공정으로 중화 문명의 발생과 변과과정, 특징, 경로 등을 찾아내는 것을 주요과제로 하고 있다. 2005년까지 이루어진 1단계 연구의 연구대상은 주로 중원 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2006년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2단계 연구대상에는 장강유역의 문화와 요하 유역의 문화까지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리두문화가 더 이상 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양자강과 요하 유역에서 하모도문화나 홍산문화 등, 중원 지역에서의 문명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면서 황하유역의 문명만으로는 중국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연구 진행과정이기 때문에 하상주단대공정과 같은 연구보고서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중국이 만들어가고 있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나 2007년 요녕성박물관에서 열린 요하문명전은 이 연구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통일적 다민족군가론에 의한 중국 역사학계의 중화문명 기원에 대한 입장변화는 현실정치에 의하여 역사학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본래 중화문명의 기원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황하문명론에 따라서 황화유역의 앙소문화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73년 장강에서 앙소문화보다 1000년이 앞서는 하모도문화가 발굴되자 그 기원은 2분화되어 장강유역이 중화문명의 서광(曙光)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요하 유역에서 소하서문화, 홍륭와문화 등을 거쳐 초기 국가단계인 홍산문화가 출현하면서 중원의 기원을 3분화하는 요하문명론이 등장하였다.

요하문명론에 따르면 중원의 기원은 중원의 염제신농씨를 중심으로 하는 화()족 집단, 동남 연해안의 하()족 집단, 동북 연산 인근의 황제(黃帝)족 집단으로 정리되었고, 3가지의 세력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지금의 한()족을 형성하고 중국문명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점은 한족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중원과 요화유역의 동북지역의 부여, 고구려, 만주족을 비롯한 제()민족들, 그리고 동남지역의 제()민족들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모두 한족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결국 중원문명탐원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과는 약간 방향을 달리하여 모든 민족이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확산되고 있는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제어하고, 통일적다민족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동북공정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다.

 

4. 결론

 

중국 공산당(지배세력)의 기조 변화는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기존의 중국적 전통을 복권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한 문화적 향수가 아니라 개혁개방이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의 편입 성공과 이로 이한 중국인들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의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로 도전하는 중국 국가주의의 발흥, 대국화 정책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중국의 대국화는 한국과 55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중국 내부의 안정을 필요로 하였다. 이는 중국의 걸림돌이 되어왔던 소수민족 독립운동 탄압 문제와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중심으로 중국 내부의 단결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 지배세력의 움직임을 역사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 바로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이다. 하상주단대공정을 통해 중국은 자신의 역사를 5000년까지 확장시켰으며, 이는 중국의 국가주의적 자부심의 근거가 되었다. 하상주단대공정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완성시키기 위한 작업인 하상주단대공정은 다양한 문명권을 대상으로 하여, 그 목표가 요하문명론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다양한 문명의 중화권 편입임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중국의 행보는 단순한 역사왜곡을 넘는 위험한 것이다. 위의 논리를 그대로 극단적이게 대입한다면 중국 주변의 한국, 북한, 몽골, 오키나와, 러시아의 여러 자치공화국, 투르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들, 베트남 등은 모두 중국의 한족과 같은 민족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역사학적, 생물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과거의 영화를 민족주의적으로 부각시켜 또 하나의 패권국가를 완성시키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기조 아래 학문을 왜곡시키는 것은 당대(當代)의 문제만이 아니라 후세에도 계속되는 학문적 논란과 더불어 소모적인 민족주의적 대립을 생산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선자,황제신화와 국가주의,중국어문학집31, 2005.

박양진,중국 역사공정의 비판적 검토,역사비평82, 2008.

우실하,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전개와 적용,고구려연구,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