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 (오수창, 『한국사론』13, 1985)

同黎 2012. 7. 24. 02:02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 (오수창, 『한국사론』13, 1985)

요약발제문

1. 머리말

조선 중기 이후 정치사의 가장 특징은 붕당정치이다. 현재까지 인조대에 대한 연구는 당쟁에 대한 개설적인 연구의 일부로 행해졌고, 당쟁의 일반적인 체계화나 각 붕당의 계보화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붕당은 학통이라는 기반 위에 지연, 혈연이 더해지며 생긴 것으로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학문, 정책의 대립과 더불어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정치적 대립은 당색에 의한 것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으며 붕당이 중요한 정치적 변수이기는 하지만 그때 그때 다른 요인을 종합하여 고려해야 한다. 때로는 다른 요인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따라서 조선중기 이후 정치사를 연구할 때는 전통적인 붕당이라는 변수와 그 외 다른 요인에 의한 정국 추이를 구분해야만 붕당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인조대는 이른 시기이기 때문에 붕당과 다른 요인을 잘 구별할 수 있다. 본고는 서인·남인의 붕당이 정치세력의 기본 단위이면서 공신세력·비공신사류의 대립이 구체적 실권에서는 더 컸다고 보고 있다.

 

2. 인조반정과 정국개편

1) 인조반정의 원인

인조반정의 주도자들은 반정 직후 민심안정책을 폈으나 사회경제적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반정의 목표는 아니었다. 반정의 명분은 대북의 독주와 왕권 안정을 위핸 폐모살제와 같은 무리한 정책, 대명, 대청외교였으나, 문제는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인, 남인 등 다른 붕당을 무시하고 각 붕당의 세력조정에 실패한 것이다.

2) 정치담당세력의 재편성

반정 후 반정세력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정치세력의 재편하게 되었다. 폐모살제에 앞장섰단 북인, 특히 대북은 많은 수가 제거되어 사실상 정치 붕당으로써의 세력을 상실하였다. 더불어 새로운 정권참여 인사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광해군대에 폐모정청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 반발한 이들로 先朝舊臣, 절개와 학행이 인정받은 이들이었다. 특히 산림에 해당하는 김장생, 장현광, 박지계 등의 인물은 종4품 성균관 司業으로 높은 대우를 받으며 출사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서인의 주도 하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남인이 등용되었고, 북인은 개개인의 능력을 인정받은 경우에 한하여 소수가 등용되었다. 공신들의 등용은 당시 다른 예를 보아도 파격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등용의 기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이귀, 정엽 등은 서인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비교적 당색에 관계없는 광범위한 등용을 주장하였고, 김장생, 김상헌은 훨씬 단호하였다. 남인인 이원익은 인조에게 당색에 관계 없이 사람을 쓸 것을 주청해 왕권을 빌어 남인의 기반을 확보하려 하였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3. 붕당에 의한 정치운영의 양상

1) 붕당에 대한 인식

붕당은 학통을 바탕으로 지연과 혈연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인조대에 이미 사대부층은 대부분 당색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의 인물들은 구양수나 주희의 붕당론을 인용하여 붕당의 존재에 대하여 인정하고 긍정하였다. 그러면서도 군자당·소인당이라는 주희의 붕당론과는 달리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붕당의 害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정하고는 있지만 붕당이 근본적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인조와는 다른 의견을 보인다. 반대로 인조는 서인 위주의 정국에 대한 불안감으로 당파와 관계없이 인물을 등용하게하며 調劑保合을 통한 붕당타파의 의지를 보이고 최명길, 김류 등 일부 공신세력이 동조한다. 하지만 일반 사류에게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2) 붕당간의 대립 및 합의

인조대 정치적 사안 중 가장 민감한 것은 원종추숭과 강화·척화에 관한 문제였다. 이 두가지 문제에 관한 논쟁은 당론과는 관계없이 禮와 義理에 바탕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붕당 간의 대립은 다른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견되는데, 그 궁극적 목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고, 권력과 직접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도 실상은 의도를 담고 있었다. 붕당간 대립이 나타나는 것은 인성군에 대한 처우 문제였다. 서인은 인조의 왕권에 위험이 되는 인성군을 계속하여 제거하려고 한 것에 반하여 남인은 인성군 제거를 광해군의 잔인함에 비유하며 윤리강상의 회복이라는 서인의 명분에 도전하였다.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은 이이, 성혼의 문묘 종사에서도 나타났다. 그런데 서인 중앙 관료들은 오히려 문묘종사에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서인의 학문적 기반이 아직 튼튼하지 못하여 남인의 반대를 무시할 수 없었고, 서인 내부의 의견 수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여기에 서인의 독주를 견제하는 인조의 반대 때문에 종사를 성립하지 못하였다. 인조대의 붕당정치는 붕당 간 극한적 대립이 없었고 인조의 서인 견제로 비교적 세력조정이 잘 되었으며 따라서 서인과 남인 모두 인조 대의 정치를 긍정적으로 인신했다.

 

4. 정치적 실권을 둘러싼 대립

1) 공신세력의 동향

공신세력은 각기 독자적으로 반정을 모의하였던 김류와 이귀를 중심으로 하여 두 갈래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김류는 신경진, 구굉 등 인조의 외척들과 같은 세력을 이루었고, 이귀는 최명길, 김자점, 심기원 등과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중 인조는 주로 김류와 더 가까이 지냈다. 유백증, 박정 등의 공신들은 소수파로 공신으로의 기반을 살리지 못했다.

2)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대립

공신세력은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비공신사류와는 기반을 달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비공신사류는 반정 직후 공신들의 관직 제수를 대단히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반면 인조는 서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북인도 등용하는 등 주제보합을 내세웠는데 김류는 인조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북인까지 포섭하며 자파 세력을 증식시키고자 하였다. 반면 청론을 강력히 내세운 김상헌은 이에 반대하였고, 김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귀, 박정, 유백증 등이 여기에 동조하면서 김상헌 등을 偏黨으로 보는 인조와 김류 세력,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김상헌, 이귀, 남인들의 대립이 이루어졌다. 인조 원년과 7년에 일어난 인사권을 둘러싼 대립은 서인을 각각 청서와 공서, 노서와 소서로 갈라놓았다. 기존의 연구는 이를 붕당의 한 갈래로 보았으나 각각 당인으로 지목받는 사람이 적고 각 세력이 자신의 기반을 얻기 위한 평범한 대립이었기 때문에 붕당이라고 보기 힘들며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나 반공·비공신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반정 이후에도 공신들이 사적으로 가지고 있던 군사력 문제나 공신들의 축재 문제에서도 불거진다.

공신 대 비공신의 대립문제는 척화문제에도 연결된다. 김상헌, 윤황, 유백증, 정온 등은 이귀와 최명길, 장유 등의 주화론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척화론자는 추상같기만 하고 시세를 모르는 이들로 평가되어 인조는 이들을 완전히 내치게 된다. 반면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류, 김자점, 심기원, 신경원, 윤방, 이민구 등도 전쟁의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제거된다. 결국 권력은 또 다른 공신세력인 최명길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전후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난 것은 주화·척화의 대립이 단순한 명분론을 넘어 김류를 중심으로 한 공신세력에 대한 비공신사류의 도전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5. 인조대 후반 정국의 추이

1) 공신세력의 붕당정치 개혁 논의

병자호란 이후 정권을 잡은 최명길은 장유, 신경진, 이시백, 심기원 등과 연결해 김류와는 다른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들은 반청론자와 제휴하여 그들의 반발을 무마해가면서 김신국, 김시양, 남이공 등 친 김류세력과도 손을 잡는다. 이렇게 정치적 기반을 쌓은 최명길은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최명길이 혁파하고자 한 것은 전조낭관의 당하청망과권과 자천권 및 삼사의 피혐과 처지제이다. 이는 모두 사림정치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데, 인조와 비변사는 최명길의 의견에 찬성하지만 결국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는 공론정치에 대한 최명길의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밖에 최명길은 의정부서사제를 되살리고 비변사의 위상을 높이는 등 장치의 효율성을 높이는 개혁을 추진하지만 역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최명길의 개혁은 붕당정치의 운영에 핵심적인 장치들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른 최명길이 그의 권력 기반을 공신적인 것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심 중심 정치세력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치질서를 재편하고자 한 것인데, 실패한 이유는 붕당정치 질서에 대한 당시의 정치규범과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공신 중심 정치세력의 몰락

그러나 인조 18년 최명길, 신경진, 이시백 등이 물러나고 김류, 김자점이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최명길과 김류로 대표되는 두 세력은 인조 23년까지 경쟁하다가 심기원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김자점에게 권력이 돌아가게 된다. 김자점은 왕실의 외척이 되고 친청적 성격을 확고히하여 권력에 유착한다. 김자점의 당을 낙당이라고 하고, 이에 대항하던 원두표의 원당이 있는데, 이들 모두 뒤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이념적인 대립도 없어, 기존의 연구에서 처럼 붕당의 계보에 포함시킬 수 없는 단순한 정권투쟁이다. 김자점은 사류나 관인들 사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인조 사후 바로 제거되게 된다. 김자점의 몰락은 공신 중심 정치세력의 종언을 뜻한다. 이는 비공신사류가 몇몇 공신의 국정주도에 맞서 붕당정치라는 그들의 정치질서를 충실히 지켜 공신들을 극복한 것이다.

 

6. 맺음말

인조대 정국의 전개는 서인과 남인에 의한 붕당정치와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대립이라는 두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전자가 조선중기 이후 붕당정치의 추이에서 인조대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후자는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을 미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조대는 붕당정치가 광해조의 미숙기를 거쳐 보다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던 시기였다. 다만 미숙기의 극복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특권층과 일반 사류 사이의 마찰이 있지만 인조대 정치사의 성격에 영향을 끼칠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조대 인물 정리

서인

남인

북인

공신

이귀, 김류, 김자점, 이시백, 장유, 최명길, 원두표, 심기원, 신경진, 심명세, 구굉, 이서, 유백증, 박정, 홍서봉

비공신

김상헌, 김상용, 이정구, 정엽, 신흠, 오윤겸, 윤방, 이성구, 윤황, 정온, 김시양, 이식

이원익, 정경세, 조익, 허적, 이준, 목성선, 유석, 조경

이덕동, 윤지경, 남이공, 정온, 김신국

산림

김장생, 박지계

장현광

서인

남인

추숭 찬성

박지계, 이귀, 최명길

허적

추숭 반대

김장생, 김류, 이식

장현광, 정경세

서인

남인·북인

척화

김상헌, 김상용, 윤황, 정온, 이식, 김시양

조경(남)

주화

최명길, 김류, 장유, 이성구, 홍서봉, 이귀, 이성구

김신국(북)

* 오수창이 이 논문을 쓴 이유는 붕당정치론의 완성을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즉 본인이 밝히고 있듯이 당쟁을 연구한 기존의 연구에서 인조대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오수창은 인조대가 붕당정치의 이른 시기이기 때문에 붕당과 다른 정치적 요인을 잘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붕당정치의 본질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수창은 인조대 정치적 대립을 서인·남인으로 구분되는 붕당과 공신 및 친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대립으로 파악하였는데,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공신 대 비공신의 대립은 ‘정치권력을 사이에 둔 단순 대립’ 내지 ‘실권을 위한 대립’으로 한정 짓고 있다는 것이다. 오수창이 인조대 주요 정치세력의 대립을 이렇게 이원화 한 것은 역설적으로 인조대 정치투쟁이 공신과 비공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극복하고 붕당정치론을 강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명길을 비롯한 공신세력은 붕당과는 다른 기반 위에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피혐권, 통청권 등 붕당정치의 기반이 되는 전랑과 양사의 권한은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결국 김자점을 끝으로 공신세력이 몰락함으로써 효종대 이후의 붕당정치가 전개된다는 것이 오수창의 생각인 듯하다. 공신세력의 정치개혁과 정권 장악이 끝남으로써 인조대 이미 붕당정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두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붕당정치가 과연 오수창이 말하는 것처럼 학통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붕당정치는 이념적, 정책적 대립을 가져올 때만 성립하는 것인가? 공서와 청서, 노서와 소서, 낙당과 원당에 대한 오수창의 판단은 인조대 서인들의 갈라섬이 일시적이고 이후 미치는 영향력이 적다는 면에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여러 붕당 중 오수창의 기준에 맞는 붕당이 얼마나 되는지는 숙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 서인과 동인의 분기가 엄격한 학통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하기엔 각각의 당에 너무나 다양한 학맥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서인의 경우에는 이이가 서인이라고 自定하기 전까지 학연이라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또 후기로 갈 수록 정치적 이해관계나 혼인 등에 의하여 당색이 바뀌는 경우가 많은 것도 오수창이 이야기하는 붕당정치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때문에 붕당간의 대립을 이념적, 정책적인 것으로, 여러 정치세력의 대립을 미시적인 것으로 환원해버리는 것 또한 지나치게 현상을 붕당정치론에 끼워 맞춰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의문은 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데, 붕당정치가 거시적인 대립이고, 공신세력과 비공신사류의 대립이 과연 미시적인 대립인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인조대의 정사공신은 그 구성인원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신 대 비공신이라는 대립 구조는 시간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숙종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당색과 관계없이 외척세력과 사림의 갈등, 대신과 대간의 갈등은 존재해왔다. 이러한 갈등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노소론 분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후기 사림들에게 당색이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의 정치사는 붕당이라는 요소와 더불어 신진세력과 기득권세력(대신 또는 외척), 그리고 국왕이라는 세가지 세력이 각자 권력을 추구하며 버리는 대립이 복합적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오수창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어느 붕당이라도 권력을 가지고자 한다. 붕당이 순수한 이념적 산물이 아니라 역시 권력지향적 집단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오수창이 공신 대 비공신의 대립을 미시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붕당에 초점을 맞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