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권오영, 19세기 초 안동유림의 유회와 활동

同黎 2012. 12. 10. 21:33

 19세기 초 안동유림의 유회와 활동


1. 머리말

19세기 초 세도정치기 소수 특정 가문을 제외한 유림들은 재야 세력으로 남게 되면서 중앙 정치세력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재야 유림들은 향촌사회에서 학계와 사회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호락논쟁·병호시비 등의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중 영남 유림들은 병호시비·한려시비·청회시비 등 유림시비와 각 문종의 종통시비, 적서갈등 등 첨예한 대립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안동유림은 크게 서애학맥과 학봉학맥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학봉학맥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이현일·이사정·유치명 등을 중심으로 큰 학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안동 동부 유림은 유범휴의 주도 아래 이상정의 학통으로 결속하였고, 김시온을 추모하는 사업을 벌이며 더욱 결속을 다졌다. 이렇게 결속된 유림은 屛虎是非의 과정에서 虎論으로 강한 조직력을 과시하였다.

이 글에서는 안동유림의 유회를 통하여 재야 유림들이 어떤 활동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검토하고자 한다.

 

2. 陶淵과 안동유림

도연은 조선시대 임하현에 속한 지역으로 金是榲崇禎處士로 자처하며 대명의리를 지킨 곳이기에 도연명의 마을인 栗里에 견주어지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淸溪 金璡仙遊亭을 지으면서 영남 유림에게 주목되었다. 이후 김극일·김성일·김시온 등에 의하여 유학자의 처사적 삶을 대변하는 지역으로 변하였다.

 

3.유회와 그 활동

1) 김시온의 생애와 학문

김시온의 본관은 의성, 자는 以承, 호는 瓢隱·도연·大瓢1598년 태어나 1669년 죽었다. 그는 金澈의 아들로 金守一의 손자였으나 김철의 백부 김극일이 아들이 없자 할아버지 김진의 명으로 김철의 김극일의 양자가 되었다. 명이 멸망한 후 숭정처사로 자처하여 와룡초당과 대표정사를 짓고 도연에서 시를 읊으며 은거하였다.

김시온은 처음 가정에서 학업을 익혔으며 세도가 혼란해지는 것을 보고 세상사를 멀리한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맹자의 窮不失義 達不離道를 가슴에 새겨 입신의 표준으로 삼았다. 과거를 보긴 했지만 연연하진 않았으며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을 조작하고 副將에 추대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고 자식이 혼자뿐이라 전투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항상 남한산성 이야기를 들으면 慟泣하였다. 병자호란 이후로 세상을 피해 살겠다는 뜻을 밝히고 주자·정자부터 제자백가에 이르기 까지 깊게 공부하였다.

김시온은 유림의 동향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에 장현광을 병향할 것인가 배향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병향을 지지하는 김응조와 의견 차이를 드러내었다.

1640년에는 상복을 벗은 뒤 도연으로 옮겨가 와룡초당을 짓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많은 시를 지었으나 만년에는 시를 짓지 않고 文字에 뜻을 두지 않았다. 안동부사와 관찰사가 여러 번 천거하였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영해 청기현으로 이사하였다. 사후 그의 묘표와 명정에는 모두 崇禎處士가 들어가게 되었다.

김시온의 학풍은 주희의 스승인 李侗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학자의 공부는 함양에 있어 득력하지 못하면 天質이 아름다워도 성기고 거센 기가 있게 된다고 하였고, 今世의 학자는 젊어서 본 것이 있으면 저서를 쓰고 싶어 하니 이것이 身心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중용을 읽고 성인의 심법이 여기 있으니 潛心하여 오래 힘쓰면 를 보는 것이 더욱 밝아지고 실천이 돈독해지게 된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출처를 중시하여, 용모를 단정히 하고, 언행을 삼가며, 의리를 분변하고, 取捨를 살피는 것이 진정 출처의 이며, 출처가 분명치 못하면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

김시온에 대하여 김성일과 학통이 이어지고 의성 김씨의 세거지에 가까이 있던 이현일·이재 부자는 각각 문집 서문과 유허비의 陰記를 썼으며, 조덕린은 김시온의 숭명의식을 칭송하며 유허비 陰後敍를 썼다. 김학배는 김시온의 유고를 정리하고, 언행록을 지었으며, 허목은 김학배의 청에 따라 묘갈명을 썼다. 오시복은 유허비의 大字를 섰으며, 이보는 와룡산정사기를 지었다. 강박은 시를 이어 김시온을 기렸다. 영남학자들의 현양에 힘입어 김시온은 소론 대신인 조현명의 청에 따라 영조 10(1734)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었다.

 

2)경절사 건립과 김시온의 제향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적지 않은 은자들이 나타났는데 김시온 역시 이러한 학자 중 하나였다. 그의 사당을 건립하려는 계획은 이미 인조21년 거론된 바 있으나 좌절되었다가 순조 12(1811) 6월 옥산서원과 낙봉서원의 통문이 호계서원에 사당 건립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당 건립의 본격적인 추진은 순조 17(1816) 도내 유림의 통문에 호계서원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도연서당은 건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표는 사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한편 전주 유씨의 무실 기양서당의 통문이 사빈서원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김시온의 본손인 호계서원 원장이 주론하는 것을 피하여 전주 유씨인 유회문의 주도하에 716일 호계서원에서 향회가 열렸다. 향회에는 청성서원, 경광서원, 노림서원, 구계서원, 병산서원, 삼계서원, 도연서원의 원장 등과 순흥, 영행의 유생도 참여하였고, 원장으로 유범휴가 선출되었고 도감으로 이우두, 김시간이 결정되었다. 다음날 사우를 만들기 위하여 향중 각원과 里社, 서당에 물자를 배당하고 수합유사를 정하였다. 이후 의성 김씨들의 세거지에 편지를 보내 松石에서 화의를 열어 물자를 분정했는데 총470냥이었다. 815일에는 영양의 영산서원이 통문을 보내왔는데, 유범휴는 이를 살펴보고 공사를 금년 내에 급하지 할 필요가 없다 의견을 제시하였고 좌중의 많은 이가 찬동하였다. 817일에는 도감 김시간을 도청으로 삼았고, 도감에 김남수를 다시 선출하는 등 유범휴의 주재로 임원 선출이 이루어졌다. 925일에는 유범휴가 터를 닦는 고유문을 초하였다. 1010일에는 영천 유생들과 청송의 송학서원이 사우 건립에 동의하는 통문을 보내왔다. 예천의 물계서원 역시 같은 내용의 통문을 보내왔다.

한편 조정에서는 병자호란이 3갑자를 돈 병자년을 맞이하여 절의를 지킨 인물에게 추증하고 증시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그러나 유림의 일각에서 김시온도 추숭하자는 의론이 일어났고, 이에 김시온의 본손들은 회의를 열고 서울에 김양운과 김남운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1817년 이런 상황에서 유범휴를 비롯한 재임들이 모였고, 유범휴는 본손이 표창을 신청하였으니 서울 소린을 기다려 공역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김남운이 추숭을 하려면 세가에 줄을 대어야 하니 선비가 할 짓이 아니라고 하며 내려와 버렸고 김양운도 돌아왔다. 이에 유범휴는 소가 정지되었으니 廟役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고, 농사철이 끝난 12월에 터 닦는 공사를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181819일 모인 사람들은 공사 규모를 결정하고 功價 85냥을 결정하였고, 2월에는 유범휴의 청에 의하여 김시찬에게 상량문을 부탁하였고 쓰여진 상량문을 가지고 논의가 오갔다. 3월에는 神門을 세우고 묘우에 상량하였다. 4월에는 부족한 기와를 더 사서 올렸으며 목수에게 공전 98냥을 지급하였다. 1819년에는 3월에는 여러 마을의 장정을 추려 담장에 기와를 올렸고, 4월에 유범휴에게 공사를 마쳤다는 편지를 보냈다. 18203월에는 단청을 마쳤으며, 9월에는 병이 나은 유범휴와 김시온의 후손 등 수십 명이 모였다. 18211월에는 김시온의 제향을 숭정 말년 이전에인 갑신년 이전에 하여 대명절의를 표창하자고 하였다. 18221월에는 김시간·김회운이 유범휴에게 가 김시온을 추숭하는 소를 올릴 것을 거론하였으나 유범휴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9월에는 송석에 여러 명이 모여 사우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김시온의 여덞 아들 가문에 분정하였고, 김학배의 종손인 김방철이 우리는 김시온의 본손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부조하여 모두 쌀 100석을 받았다. 그리고 假家에 필요한 용구를 준비하기 위해 각 마을에 수납유사를 정하고, 반감유사를 정하여 반상·그릇 등 총 1000상을 마련하였다. 18232월 봉안일을 논의하고 항례의절을 예행하였으며 318일에는 유범휴가 각 건물의 이름을 지어 보냈다.

한편 제향을 위한 준비도 계속되어 선찰을 승려를 부려 가가를 만들고, 시도막을 만들었으며 상향축문·봉안문 역시 계속하여 작성되었다. 312일부터 구계서원 원장인 김시간이 공사를 총괄하고, 사빈서원의 식례대로 홀기와 진설도를 마련하였다. 316일 유범휴가 참석하자 道會 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도집례 이야순을 뽑았고, 조사와 공사원을 선출하였다. 도집례는 내일 집사를 분정할 것을 결정하였고, 유범휴가 지은 봉안문·상향축문이 검토되었다. 다음날 여러 집사의 분정을 마친 뒤, 題板 쓰는 날과 하는 법에 대하여 도집례가 의견을 물었는데 사빈서원의 예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날 오후에는 유범휴와 집례, 齋席 등이 건복을 갖추고 전사청에 이르렀고, 유범휴, 도집례 이야순, 집례, 본손 등이 그 뒤를 따라 묘내로 들어가서 분향하고 진설하였다. 그리고 집사들은 목욕하고 예행하였다.

드디어 318일 제향을 향하는데 1000여명이 모였다. 도집례 이야손이 선생을 위하여 왕에게 아뢰자는 이야기를 발론하며 본손인 김곤수를 돌아보며 물으니 김곤수가 본손이 어찌 감히 도론에 참여하여 간섭하겠느냐만은 다만 대사를 겨우 마쳤으니 약한 힘으로 논의를 감당할 수 없겠다고 하니 도집례가 이것은 유림의 일로 본손의 사련이 어떠한지를 돌아보겠는가라고 다하고 주변에서도 영남 선비라면 누구나 불가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모두 동의 하였다. 제향이 끝나고 유범휴 및 두 재임이 교체되길 청하여 도유사에 유상조, 재유사로 김택수와 권훈으로 후보를 정하고 날이 저물고 참석자들이 돌아갔다.

320일에는 유범휴가 院例謄錄諸條하고 돌아갔으며 321일 사빈서원의 예의 의하여 본손 김굉수, 김계수를 변소유사로 삼고 논 11마지기를 本所에 주었다. 그 나머지는 접소에 두어 세입으로 저축을 붙게 하여 養士를 권장하는 계획으로 삼게 했다.

19세기 초 이 도연에서의 유회 활동에는 1900여명이 거쳐 갔다. 이는 당시 안동유림 중 호론에 속한 유림 세력의 조직력이 매우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토목공사에 인근 주민을 동원했다는 것은 당시 안동유림의 민에 대한 지배력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유범휴가 물러나고 새 동주로 유상조를 모시기 위한 망기가 하회로 보내졌는데, 유상조를 모시는 것은 병호시비가 재연되고 있는 시점에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도유사가 되지 않는다 해도 병론을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김성일과 유성룡은 같은 퇴계의 문하였고, 두 집안은 혼인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이황 후손들이 양측을 조정·보합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상조가 행공을 하지 않고 권훈도 사퇴하며 김택수로 연고가 있어 도연서원은 향례를 치르지 못하는 태까지 발생하고 나중에야 김택수가 향례를 행하게 되었다.

 

3) 金學培의 추향

김학배는 청계 김진의 5대손으로 인조 6(1628) 金黯과 진성 이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자는 天休, 호는 錦翁이다. 그는 12세에 김시온에게 대학과 중용을 배웠으며 잠시 벼슬살이를 한 일 외에는 줄곧 도연에서 생활하며 김시온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철저하게 가학을 전수받았다. 김학배는 문과 급제 후 승문원박사·예조좌랑 등을 지내는데 특히 이단하, 김만중, 홍기와 함께 경서교정관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경서에 정통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교유관계는 이휘일·현일 형제와 홍여하에 미쳤다. 그러나 현종 14(1673)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김학배를 도연서당 경절사에 배향하자는 논의는 김시온 향사 당시부터 있었으나 본격적 논의는 순조 34(1834)에 기양이사에서 전주 유씨 유림들이 도연서당에 통문을 보내며 시작되었다. 삼계서원, 병산서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내왔다. 다음해 41일 구계서원의 모임에서 유림에 통문을 보내 호계서원에서 향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44일 의성김씨들은 100여명이 모인 문회를 열어 김학배를 배향하자는 뜻을 완의를 만들어 연명해 종택과 本院에 한 통씩 두었다. 57일 호계서원에서 열린 향회에는 소호의 이수응과 구계서원, 호계서원, 사빈서원, 주계서원, 도연서원, 사빈서원의 원장·재임 및 유생들이 참여하여 조사와 공사원을 선출하였다. 공사원 중 1인은 김기수로 그는 문중 선조와 관계되기 때문에 사양했으나 좌중의 불허로 자리에 임했다.

그러나 김학배 배향은 잘 진척되지 않다가 헌종 2(1836) 2월 영양의 영산서원에서 김학배의 배향이 마땅하다는 내용의 통문이 도연서원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동년 4월에 내앞에서 도판 김용제·김남운을 선출해 추향의 일을 추진하게 하였으나 여전히 일은 잘 추진되지 않았다. 헌종 4(1838) 1월 김남운이 내앞에서 諸族과 상의해 3월 안으로 대례를 행하자고 하여 21일 도연서당 도유사·재석이 교체되고 도유사 이병원, 재유사 김주수·유성문이 선출되었다. 26일 의성 김씨들은 운곡서당에 모여 집사를 분정하고, 본손의 재력이 부족하므로 문중에 돈을 배정하기로 정하였다. 215일에는 김진관이 소호에 가서 동주 이병원에게 元位 김시온의 고유문·봉안문을 청하였다. 31일에 고유문·봉안문이 도착하고 32일 합동으로 개좌하여 325일로 추향일자를 정하였다. 한편 33일 김응철은 이병원의 지시로 유정문에게 봉안문·상향축문을 청하고 318일에는 유치명에게도 청하였다.

321일 가가를 만들고 시도소를 설치하였고, 봉안문·상향축문이 결정되었다. 하회의 풍산 유씨 및 병산서원도 부조를 가지고 왔으나 이를 가져온 유태목은 오후에 떠나 버렸다. 222900여명이나 되는 이들이 거쳐 갔다. 이날 밤에 유림들은 봉안하는 절차를 논의하였는데 이 과정은 의성 김씨와 전주 유씨 유림 간의 세세한 토론을 거치는 것이었다. 324400여명이 모였고 다음날 위판을 봉안하고 행사를 치렀다.

이처럼 19세기 초 도연을 거점으로 하여 안동유림은 주도적으로 우선 김시온의 사당을 건립하여 제향 행사를 성대히 치르고, 김학배의 추향을 이루었다. 이 일에는 안동 동부 지역의 의성 김씨와 전주 유씨가 주축이 되었고, 인근 고일인 영양·청송·영주·봉화 등 유림의 공의를 모아 추진하는 방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뒤로 다시 김시온의 아들 김방걸의 배향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안동유림 중 호론은 줄곧 유회를 통해 자신들의 구심점을 강화해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흥성대원군의 祠院毁撤로 특히 호론은 근거지를 잃고 이에 유림들의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위정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 뒤 이들은 척사운동에 주도적 세력으로 참여하였고, 나아가 의병·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변화시켜나갔다.

 

4. 맺음말

 

19세기 초 영남유림 특히 안동유림의 선현 현창 사업은 정치적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재야 유림들이 유회를 통해 이런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김시온 제향 운동도 이러한 성격을 지녔다. 경절사 건립에는 의성 김씨와 전주 유씨로 이들은 강한 결속을 하고 있어 경절사 건립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호론에 속한 이들이었다.

김시온의 경절사 건립에는 인근 마을의 주민과 기술자, 선찰의 승려, 마을의 노정과 서원 원예들까지 동원되었다. 유림들은 공인에게는 임금을 주었지만 동원된 마을 장정들에게는 노임을 지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동원이었지만 자발적 부역 형태를 띠었던 것이다.

병호시비가 다시 재개된 시기에 경절사 건립에 1800여명, 김학배 추향에 900여 명이 시도했다는 것은 호론 유림의 결속력을 가늠케 한다. 물론 병론에서 약간의 후원이 있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이미 호론이 중심이 되어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추향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의성 김씨와 전주 유씨가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병론 인사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김시온·김학배 추모 사업에 참여한 이들은 곧 호계서원 이상정 추향 운동을 벌인 유림과 같은 것이다.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유림으로서는 향촌 사회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규모 유회가 필요했다. 유회를 위해서는 사당 건립이나 배향의 일을 추진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한 안동 유림의 대규모 유회는 순조 이후 전개된 병호시비에서 호론의 세력 기반으로 작용했다.

 

필자의 본고는 19세기 안동유림들의 대규모 결집인 유회를 통해 재지 유림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사우 건립과 배향이 진행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서원의 문중서원화가 된 상황에서 친화성을 지닌 각 문중들이 지방 주도권 확보를 위해 어떻게 협력하고 있는지는 파악하는 데에도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론자는 본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첫째, 대규모 유회와 이를 통한 현조 현창사업 추진을 통해 향촌 주도권을 획득하려던 시도는 안동유림, 그 중에서도 호론만의 특징인가 아니면 재지사족들에게 광범위하게 보이는 특징인가? 만약 안동유림 중 호론에게만 보이는 특징이라는 호론이 대규모 유회를 열 수 있는 물질적·인적 기반은 무엇일까?

둘째,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지역 유림이 마을 장정 등을 부역의 형태로 동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후기 경제사·사회사에 대한 개설서적 이해에서 보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동유림이 이토록 강한 향촌지배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회를 통해 향촌 지배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가? 혹은 반대로 이미 강력한 향촌 지배력을 통해 유회를 열어 그 지배력을 재생산했던 것인가?

셋째, 김시온·김학배의 배향 과정에서 보이는 호론의 동원력은 각각 1800여명과 900여명으로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적 동원력이 병론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병호시비의 과정에서 이런 동원력이 호론에게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하였는가?

넷째, 경절사의 제향 홀기 등을 보면 사빈서원의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사빈서원에서 모시고 있는 인물이 청계 김진과 그 다섯 아들인 것을 보아 사빈사원은 의성 김씨의 중심적 서원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서원들 간에도 종적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는가?

다섯째, 의성 김씨와 전주 유씨라는 두 개의 거성 이외에 안동 혹은 그 인근에 세거하고 있었으나 이보다는 한미했던 가문들은 병호시비 혹은 유회의 과정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