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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19세기 전반 반봉건 항쟁의 성격과 그 유형」,『1894년 농민전쟁연구』2, 역사비평사

同黎 2012. 9. 9. 21:01

한명기,「19세기 전반 반봉건 항쟁의 성격과 그 유형」,『1894년 농민전쟁연구』2, 역사비평사.

석사5 박세연

19세기는 중세의 정치사회적 틀이 무너지고 새로운 이행이 모색되던 시기이다. 18세기 집권세력에 의해 어느 정도 체제 내부로 흡수된 반체제적 움직임은 19세기 벌열정치로 두터워진 사회적 장벽 때문에 폭발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홍경래의 난, 1862년 농민항쟁, 1894년 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민중세력의 저항은 봉건체제의 해체를 촉진하였다. 본고에서는 그동안 주목되지 못했던 크고 작은 항쟁들의 유형과 단계, 성격을 규명하여 19세기 전반의 항쟁들이 점차 진전되어 가는 모습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9세기 전반은 조선후기 이래 사회경제적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모순들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시기였다.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 이권에 대한 열망은 심화되고 신분과 같은 봉건적 가치들은 힘을 잃었다. 정치적으로는 소수의 서울 유력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족 대다수는 경쟁에서 탈락해 향반, 토호, 잔반으로 고착화되었다.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층의 상승욕구와 더욱 폐쇄적인 된 중앙권력의 마찰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특권지배세력의 대다수의 권위가 실추되자 이들에 대한 여러 도전도 심화되었다.

항쟁의 성격은 즉 항쟁의 주체, 요구, 형태, 조직은 항쟁의 원인이 되는 봉건 모순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졌다. 당시의 봉건모순은 크게 첫째, 국가 대 민의 대립과 둘째, 지주 대 전호의 대립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모순이 원인이 된 항쟁은 민란과 변란 등의 유형이 있고, 후자의 경우는 항조투쟁, 爭雇 등이 있다. 19세기 전반에는 주로 전자의 유형에 속하는 항쟁이 주로 나타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후자의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경향분리의 추세에 따라 도시지역의 항쟁 양상은 향촌의 그것과는 다른 성격을 보인다.

그런데 1840년을 경계로 19세기 전반의 항쟁들은 투쟁 주체와 형태, 조직, 지역의 측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인다. 대체로 1840년 이전에는 몰락한 지식인의 주도 아래 개인적 친분과 지연 등을 매개로 하여 중앙권력의 교체를 목표로 하는 변란이 많은 반면, 1840년 이후에는 농민이 주가 되어 삼정의 폐해를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단적 움직임을 보인다. 농민의식의 성정과 농민의 조직화, 집단화 경향의 발전에 힘입어 1862년 농민항쟁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반봉건항쟁의 유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변란이다. 정조의 죽음 이후 교체된 집권권력이 보수반동화의 추세를 보여주며 많은 변란이 일어났고 이에 대하여 집권세력 또한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변란의 내부에는 대단히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항쟁들이 있다. 訛言과 掛書, 그리고 구체적으로 봉기를 모의하였지만 미수에 그친 作變이 그것이다. 실제 변란이 실행된 것은 홍경래의 난이 유일하다.

작변의 주체세력은 대부분 몰락 양반을 포함한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입신에 대한 열망이 높았지만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권력에 접근할 수 없었고,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부류였다. 때문에 현실 권력을 타도하는 것이 작변의 목표였다. 이들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대개 거처가 일정치 않은 떠돌이였거나, 향촌에 세거한다고 해도 서울 등지를 자주 왕래했다는 것이다. 서북지역 출신자들의 활동도 현저하였다. 서북 출신들의 정치적 진출이 구조적으로 막혀 있던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무역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하였고, 더욱 강렬하게 정치사회적 상승욕구를 불태우고 있었다.

19세기 전반 변란사건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봉기를 선동하는데 정감록이나 그 계통의 眞人說, 海島說이 예외 없이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감록의 역성혁명사상이 변란의 목표에 상당히 유용한 본보기를 해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란의 주도자들은 이를 이용해 민심을 선동하였다. 해도설의 경우 천주교의 전파나 이양선의 출몰 등 해방에 대한 위기의식이 점증하는 가운데 민심을 선동하게 유용한 수단이었다. 洪景來 不死說 역시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요소를 통해 민심을 선동했다는 점에서 정감록 사상과 유사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변란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고, 광범위한 농민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직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신비적인 요소에 힘을 기대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사회 저변을 이루고 있던 농민대중을 투쟁 주체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농민에 기반한 새로운 주체와 조직이 필요했다.

변란과 함께 민란 유형의 항쟁들도 격화되었다. 그 주된 원인은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부세제도의 문제와 수령 및 이서배의 탐학이었다. 국가는 수령의 비리를 감독하려고 여러 수단을 썼지만 중앙의 거족과 연계된 수령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령의 민에 대한 가혹한 徵斂과 형장이 그치지 않았다. 때문에 민란은 계속 일어났지만 1862년 농민항쟁과 같은 대규모의 광범위한 동시다발적 민란을 일어나지 않았다. 곡산민란을 제외하고는 주로 수령과 개인적 차원의 직접적 쟁투, 또는 감영이나 중앙에의 호소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1820년대 이후 조직 동원에 의한 수령과의 쟁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보부상 같은 일부 직업 집단의 경우 자신들의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흐름이 일반민들 사이에도 점차 퍼져나갔다. 184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더욱 현저해져 본래 사족을 중심으로 향촌을 교화하는 역할을 하던 鄕會가 관과 대립하는 투쟁조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향회가 농민을 조직화하고 그들의 불만을 수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집단적으로 등장을 올리는 등 낮은 수준의 저항에 머물러 있었지만 일반민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향회를 기반으로 고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경하여 직접 호소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이러한 움직임의 원인 중 하나로 이즈음 도결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은 음미해볼만 하다.

민란의 지향점은 변란처럼 현실성 없는 차원의 구호가 아니라 수령 및 이서배의 탐학 제거와 부세문제 해결 등 현실적 고통의 개선이었다. 때문에 요구조건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조직의 건설과 인원 동원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향회, 동계 등의 향촌자치조직이 활용될 조짐은 보이지만 아직 활발하지는 못했고, 1862년 농민항쟁의 단계에 이르면 확연히 달라지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당시 농민과 국가의 대립이 사회의 주된 대립관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본모순이었던 지주와 전호 사이의 모순 때문에 일어난 사건도 많았다. 항조, 거납, 쟁고운동이 그것이다. 궁방전이나 관둔전에 대한 항조도 일어났는데, 그 규모는 일반적 지주-전호의 대립관계보다 더욱 더 큰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항조운동의 사례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토지의 상품화와 이에 따라 광범위하게 발생한 유망농민에 의한 저항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격심한 차지 경쟁에서 밀려난 농민들은 일부 농촌 임노동자가 되었지만, 대다수는 농촌을 떠나 농업 이외의 부문에서 생존수단을 찾아야 했다. 이들의 일부는 도적집단으로 전신하였다. 이 시기 주로 보고되는 도적은 명화적으로 이들은 기호지방의 산간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며 가을과 겨울에 일시적이고 국지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도적집단 전부를 일률적으로 명화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명화적은 여리에서 불을 밝히고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인데, 19세기 전반의 사료에는 이 이상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던 경우는 찾을 수 있다. 즉 어떤 계기를 만나면 공권력과 직접 대결하고 더 나아가 변란을 도모하는 부류와 연결되어 집권세력을 처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특이한 점은 18세기에 비하여 19세기 전반의 도적집단 활동이 더 적다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 농민의 조직화 경향이 확대되어 향회 같은 조직을 통해 그들의 불만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즉 농민의 자체적 조직화를 통해 도적집단의 활동이 줄어들고, 또한 민란이나 변란의 보조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일어난 도시민의 폭동은 향촌에서의 저항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서울은 전국의 재화가 모여드는 상공업의 중심지고 정치의 중심지였다. 농촌에서 탈락된 유리민들은 상당수가 서울로 몰려와 도시빈민으로 전화되어 하층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지극히 열악한 위생과 영향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유리민 외에도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서울로 와서 구걸이나 관청의 하급 掖隸가 되는 무뢰배들도 있었다. 국가 변란의 상태에서는 이들의 동향이 지배층에게 위협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도시폭동의 주체는 도시빈민들이었다. 서울의 생필품은 모두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쌀값이 오를 경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窮班과 殘民으로 불리는 서울의 하층민이었다. 서울의 폭동에 주도자는 대부분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조직이나 준비기간 없이, 또한 어떠한 이념이나 시전상인에 대한 공격이라는 목표 이상의 목표 없이 일회적이고 즉자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도시폭동의 특징을 보여준다.

하급관리들의 도시민에 대한 침학과 토색 역시 도시폭동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포교들의 침학에 저항해 일어난 ‘뚝섬폭동’의 경우에는 동계와 노인계등의 조직이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도시 하층민의 조직력과 단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도시 폭동들을 반봉건적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당시 화폐경제의 분위기가 농후한 도시지역 하층민들이 관권에 대해 격렬한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19세기 전반에는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 흐름의 항쟁이 각기 표출되다가 농민의 조직화 추세가 진전되어 민란 계통의 항쟁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민란은 변란의 경험을 흡수하면서 1862년 농민항쟁으로 전화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