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오영교, 「17세기 향촌대책과 면리제의 운영」, 東方學志85, 1994.

同黎 2012. 10. 21. 23:12

오영교, 「17세기 향촌대책과 면리제의 운영」, 東方學志85, 1994.

박세연

 

오영교의 본고는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조론의 관점에서 국가가 재지사족의 지방자치적 성격을 억누르고 지방 군현을 장악하기 위하여 面里制를 강화시키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面任·里任의 기능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은 공식적으로 법전에서 면리제를 채택하였으나 실제로는 고려의 유제인 任內가 잔존하였고 자연촌을 중심으로 재지세력에 의하여 지방 말단단위가 장악되어 있었다. 수령은 재지세력 특히 사족의 도움 없이는 임지를 장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복구를 위한 국가재건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村의 성장, 행정단위로서 面의 실물화, 民의 의식 향상에 힘입어 국가와 재지세력, 民 사이의 관계가 재정립되었던 것이다.

국가로서는 국가재건을 위하여 임진왜란 이전 무너진 부세제도를 복원하기 위해 지방의 말단과 人身에 이르기까지 직접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면리제를 현실화시키고 면임과 이임 등의 권한을 강화시켜서 그들이 실질적인 수령의 수족이 될 수 있어야 했다. 반면 재지세력은 토지의 사적소유 및 民에 대한 인신지배라는 기득권을 잃을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면리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면리제를 통한 사회통합의 중요성은 柳馨遠(1622~1673), 尹鑴(1617~1680), 安鼎福(1712~1791)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모두 古法에 따라 戶數를 기본으로 한 면리의 구성을 주장했지만, 조선의 현실에 적절히 古制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견들에 바탕하여 숙종대 五家作統節目이 발효되었다. 이후 이루어지는 국가의 對향촌정책은 面里를 기초적인 재정단위로 인식하며 부세와 병력의 안정적 확보와 이를 위한 소농경영의 안정적 확립에 주안점을 두도 있었다. 그러나 村 내에는 이미 다양한 사회관계, 생산관계, 사회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일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재지세력의 협조가 필요했다. 때문에 국가는 面任에 재지세력을 끌어들이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면임의 윤리적 역할이 강조되기도 했지만, 실상 수령과의 관계에서 명백히 아래에 위치한 면임에 자원하는 사족은 없었다. 사족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고 이들은 새롭게 편재되는 면리를 자신들이 세거하는 촌락을 중심으로 하게 하여 향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국가와 재지세력, 民의 갈등은 移邑·復邑의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면리가 어느 읍으로 옮겨가거나 새로운 군현이 생겨나서 면리가 옮겨가면 그에 따른 民戶, 軍役, 還穀이 동시에 옮겨가게 되었다. 국가에서 지방관청의 재정보충을 위해 면리를 분할할 때 재지사족이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고, 반면 재지사족의 요청으로 읍이 신설되거나, 면리가 다른 읍으로 이속될 때 부역이 늘어나는 것에 반발한 민이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국가의 입장이 관철되는 가운데 국가는 군현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면리조정에 적극 개입하였다. 정부가 면리 분급을 시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면리가 재정단위로 자리 잡았기 때문, 즉 면리제 자체가 그만큼 성숙되었기 때문이었다. 재지세력의 사적 지배는 점차 배제되기 시작하였고, 국가의 공적 지배는 확장되었다. 이는 국가의 공적 지배 외에 사적 지배를 거부하는 민의 의식 성장에 기인한 측면도 있었다. 재지사족의 면리지배는 국가권력의 강화, 민의 저항, 자체적 경제 지반의 축소 등으로 붕괴되어갔다. 그리하여 국가와 民의 직접적 투쟁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의도와는 반대로 면임은 부유한 良民(경영형 부농)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면역의 댓가를 받았고 관의 위세를 빌어 민을 수탈하기도 하였다. 재지사족 중심의 鄕所는 이들에게 감독 및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면임은 수령권에 부속되는 존재였다. 이들은 수령을 대신하여 진전의 개간, 농우 대여, 제언의 수축 같은 권농업무, 재실답험 및 행심, 전정·요역·耗穀의 수취·징발과 같은 부세업무, 관령조달과 호적작성 같은 행정업무, 풍속교화 및 기초적 재결권 행사와 같은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면임은 국가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경영형 부농 출신이었기 때문에 민과 결합하여 재지사족 및 국가에 저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오영교의 면리제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오영교는 면리제를 통해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는 가운데 국가와 민의 직접적 대립관계가 형성되는 과정, 즉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활발하게 일어나는 민란의 배경을 향촌사회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은 곧 오영교가 설정한 세 대립관계, 즉 국가와 사족(재지세력), 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다.

첫째, 과연 향촌에서 재지사족의 지위가 임진왜란 이후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수령권의 강화과 반드시 사족층의 지위 하락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특히 17세기는 경제적으로 노비중심의 생산방식인 작개제보다 병작제 즉 지주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경영형 부농의 존재가 부정되고 있는 가운데, 사족은 경제적으로 民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족 중심의 향촌자치적 성격 또한 19세기까지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수령은 사족과 협력한다는 조건에서만 향촌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와 사족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상치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민과 재지세력이 대립적이기만 했을까? 최근의 민란 연구나 일기 사료의 해석을 보면 향촌에서 사족이 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官과 民의 대립이 더 격렬하게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국가의 수탈이라는 측면에 사족과 일반민이 힘을 합쳐 대항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영교가 가정하듯이 향촌에서 재지세력이 탈락하고 국가와 민의 대립관계가 전면화되기보다는 재지세력과 민의 입장이 큰 방향에서 동일한 가운데 官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사족의 경제상황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더불어 필요할 것이다.

셋째, 국가 즉 중앙정부와 수령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닌 官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오영교는 수령권의 강화를 곧 국가의 향촌지배 강화와 등치시키고 있다. 조선의 지방제도는 수령이 왕의 명을 받아 지방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군현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 특유의 봉건제적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進上이나 忠逆에 따른 지방 군현의 지위 승격·강등, 그리고 이에 따라오는 면리의 부속이나 분할은 봉건제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즉 조선의 지방제도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령 역시 국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반영만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정 부분의 권한은 국가로부터 분리되어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 지방제의 성격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국가의 의지가 수령을 통해 차단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흔히 수령의 비위나 문란이라고 표현되는 것들 중에는 국가의 입장이 수령을 통해 지방 깊숙한 곳까지 전달되기 어려운 상황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가의 인신지배나 토지지배는 수령을 거쳐야 하는 것이었고, 수령의 판단하에 조절될 수 있었다. 호적이나 양안의 隱丁·漏丁이나 隱結·漏結이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수령의 수족이 된 面任의 활동 역시 국가의 권력이 면리와 같은 지방제도의 깊숙한 부분까지 투영되었다고만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