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답사 기본상식

일본답사 기본상식 2 : 불교와 사원1 - 일본불교의 역사와 종파

同黎 2018. 7. 27. 05:14

3. 불교와 사원

 

일본에서의 불교는 생활과 같습니다. 불교신자의 수도 굉장히 많을 뿐만 아니라 에도시대에 단가제도(檀家制度)를 실시해 모든 사람을 사찰에 등록하도록 하고 호적을 관리하였기 때문에 특히 장례에 불교에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묘지는 가족묘지의 형태로 사찰에 모셔져 있으므로 일본 국민의 대부분이 장례식 참석이나 가족의 기일 참배 등의 문제로 사찰에 갈 일이 많습니다. 때문에 일본 답사에서 불교문화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 장에서는 일본의 불교문화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 일본의 불교 종파


일본의 불교 종파는 시대에 따라 성립되었습니다. 크게 아스카시대에 공인되어서 나라시대에 절정을 맞은 나라불교, 헤이안시대에 견당승을 통해 들어온 헤이안 불교, 가마쿠라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되거나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가마쿠라 신불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시대에 새로운 불교사상이 들어올 때마나 일본 사회는 적지 않은 파동을 겪었습니다. 특히 정토진종과 일련종 계열의 종파들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자생적인 종파들로 중세에는 정치적, 군사적 세력으로까지 성장하여 농민봉기를 주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는 불교 종단을 탄압하여 종파를 1356파로 제한하고 더 이상 새로운 종단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종전 후에는 이에 따른 반작용으로 수많은 불교 종파들이 새로 생겨나기도 했지만 대략적으로 메이지시대의 1357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메이지시대 규정된 화엄종, 법상종, 율종, 천태종, 진언종, 임제종, 황벽종, 조동종, 정토종, 정토진종, 시종, 융통염불종, 일련종의 13종을 중심으로 이들 종파의 특징을 시대순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1. 나라불교

 

남도육종(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일본 불교의 원류는 본래 중국에서 건너온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라고 하는 법상종(法相宗), 삼론종(三論宗), 구사종(俱舍宗), 성실종(成實宗), 화엄종(華嚴宗), 율종(律宗)의 여섯 종단입니다. 그러나 사실 헤이안시대 중반까지도 일본에 불교 종파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남도육종도 불교의 여섯 가지 학문 분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런데 헤이안시대 천태종과 진언종이 새로 유입되고 이들이 기존 불교세력에 대항하여 종단화 되는 모습을 보이자, 이러한 남도육종도 점차 종단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주로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나라불교라고 합니다.

나라불교 중 독자적인 종단화에 성공한 것은 화엄종, 법상종, 율종3가지입니다. 나머지 삼론종, 구사종, 성실종은 종단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들 나라불교는 교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천태종이나 진언종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승병을 모집해 무력을 갖추고 교토의 여러 사원과 신사를 점거하여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사정권을 거치면서 또다시 새로 유입된 선종과 정토종계, 일련종계 종파에 밀리면서 지금은 가장 적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그래도 유서가 깊은 많은 유명하고 오래된 사찰은 이 나라불교에 속하는 종파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가 화엄종이며,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와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가 법상종에, 나라의 도쇼다이지(唐招提寺)가 율종에 속합니다.


3-1-2. 헤이안불교


 헤이안시대에는 견당사가 끊기게 되지만 역으로 불교문화에 있어서는 가장 강력한 충격이 중국에서 건너오게 됩니다. 바로 밀교(密敎)의 유입입니다. 거의 마지막으로 파견된 견당사를 따라 간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라는 두 걸출한 승려는 잇따라 천태종과 진언종을 수입하고, 그 제자들 역시 중국으로 건너가 더 많은 경전과 불교 도상을 수입했습니다. 천태종과 진언종이 경쟁적으로 수입되면서 기존의 나라불교는 위협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종파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편 천황과 귀족들은 경쟁적으로 사찰을 후원하며 거대한 토지를 기증해 사찰이 지주가 되었고, 거대 사찰을 중심으로 승군(僧軍)이 만들어져 자체적인 무장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천태종天台宗 (천태밀교天台密敎)

천태종은 중국에서 성립한 종파로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기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체계화하여 만들어진 종파입니다. 기존의 불교는 화엄경(華嚴經)과 계율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던데 비하여 법화경을 중심으로 성립된 천태종의 교리를 여기서 다 풀이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교종(敎宗)의 성격을 지닌 종파라고 보시면 뵙니다. 그러나 천태종은 방법론에서 교학(敎學)과 참선(參禪), 계율(戒律)과 비밀(秘密)을 모두 인정하여 선종이나 밀교로의 발전 가능성도 열어 놓았습니다.

잘 알려다있지만 고려의 경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처음 천태종을 들여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천태종은 교종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천태종을 후일 참선을 강조하며 점차 선종의 성격을 띠고, 결국 조선시대에 다른 종파와 함께 선종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천태종은 밀교로 정리됩니다.

일본에 천태종을 전래한 사이초(最澄) 스님은 곧바로 후배인 구카이(空海)가 가져온 진언종의 밀교가 엄청나게 유행하자 직접 구카이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밀교 법식에 대해 배웁니다. 그러나 사이초의 제자가 구카이의 밑으로 전향하는 일이 생기자 이 두 사람의 사이는 급속히 냉각됩니다. 결국 사이초의 제자인 엔닌(円仁)과 엔친(円珍)이 중국에서 밀교를 배워와 진언종과는 다른 새로운 밀교를 정립하게 됩니다.

일본의 천태종은 신라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중국과의 공식적 외교관계가 끊긴 상태에서 당과의 교류는 당시 남해 일대를 주름잡았던 신라의 해상세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엔닌의 경우 장보고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고마움을 표했으며, 엔친의 경우에도 귀국길에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이라는 신이 도와주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천태종의 총본산인 엔랴쿠지(延暦寺)에는 장보고기념비가 서 있으며, 엔친이 세운 절인 미이데라(三井寺)에는 국보로 지정된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신라(新羅)의 일본식 발음이 시라기(しらぎ)인데 비하여, 유독 천태종과 관련된 곳에서는 신라(しんら)로 읽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어 발음이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의 천태종은 기존의 정치세력 및 나라불교와 격렬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승려가 되려면 국가에서 정한 도다이지(東大寺)를 비롯한 규슈, 간토의 세 곳의 계단(戒壇)에서 계율를 받는 수계(受戒)의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천태종은 자신들이 참된 불교라고 말하면서 도다이지 계단에서의 수계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총본산인 히에이산(比叡山)의 엔랴쿠지에 따로 계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라의 승려들과 말 그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대규모 승병 집단을 키웠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나중에 수천명이 되었는데, 당시 천황마저 천하의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만, 쌍륙판의 주사위, 가모가와(교토에 흐르는 강)의 홍수, 히에이산의 승군만은 나도 어쩌지 못한다.’ 라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이들 승군은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엔랴쿠지를 통째로 불태워 버릴 때까지 계속됩니다.

 

진언종眞言宗 (진언밀교眞言密敎)

진언종은 구카이(空海)가 중국에서 들여 온 밀교 종파입니다. 밀교(密敎)라고 하면 무엇인가 비밀스럽거나 신비주의 종파를 생각하시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밀교는 부처의 비밀스러운 법에 직접 접촉하려고 하는 종파입니다. 더 명확히 말하면 소승불교가 인간의 성불(成佛)을 불가능하다고 보고 단지 아라한(阿羅漢)의 단계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인간도 불심을 가지고 수행하면 죽어 윤회에서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밀교에서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바로 성불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神成佛)의 교리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활불(活佛)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밀교를 신비주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언(眞言) 즉 주문과 각 종 의식을 통해 부처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것은 사실입니다.

진언종은 기존의 일본 민간신앙과 결합해서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구카이가 일본에서 가져온 각종 불상과 불상들, 그리고 화려한 법구(法具)는 귀족적인 취향을 자극해서 천황을 비롯한 교토의 귀족들이 진언종을 많이 신앙하게 되었고, 교토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지어졌습니다. 교토의 한복판에 있는 도지(東寺)가 구카이에게 하사되어 지금도 그가 당에서 가져온 불상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궁궐에는 진언종 밀교 의식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복잡성 때문에 엘리트주의적 성격이 많았다고 하며 민간의 서민에게는 광범위하게 퍼지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천태종이 나라불교와 대립한 것과는 달리 구카이는 기존의 불교세력과 대립하지 않고 타협하였습니다. 때문에 교토에 별 무리없이 안착할 수 있었고 더불어서 오사카 남부의 고야산(高野山) 지역을 하사받게 됩니다. 지금도 고야산에는 산 속 분지에 300여개의 진언종 사찰이 들어서서 일종의 종교도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카이는 홍법대사(弘法大師)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앞서 밀교에서는 즉신성불을 인정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제자들은 구카이를 부처의 화신으로 믿게 됩니다. 진언종에서 는 반드시 그를 모신 대사당(大師堂)이 있으며 대사(大師)라는 단어가 곧 구카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정착할 정도입니다. 서민문화가 발달한 에도시대에는 순례문화가 발달하는데 전국에 구카이와 연관있다는 장소만 5천곳이 넘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시코쿠에는 그가 세웠다는 사찰 88곳을 순례가는 오헨로 순례길이 남아 구카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다라(曼茶羅) : 밀교가 일본에 가져온 중요한 개념은 만다라입니다. 만다라는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부처와 보살 및 신을 배치한 그림으로 밀교에서는 깨달음에 도달한 경지, 그 자체를 배치와 도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불교철학이 발전하고 힌두교의 철학 까지 흡수하게 되면서 다양한 요소를 흡수하여 통일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밀교 특히 진언종의 만다라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일경(大日經)에 의거한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이고, 다른 하나는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의거한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입니다. 이 두 만다라는 밀교에서 가장 중요한 만다라이며 근본만다라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만다라는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태장계만다라는 가운데 불법의 근원인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연꽃처럼 여러 부처와 보살, 천부들이 퍼져있습니다. 마치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 만다라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의 부처와 보살들이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불법계계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반면 금강계만다라는 전체를 9구역으로 구획하고 각각의 구역에 독립적인 만다라가 펼쳐져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만다라에서 변화하여 다른 만다라가 생기고 또 거기서 다른 만다라가 생기는 것을 상징합니다. 즉 대일여래의 지혜와 불성(佛性)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행의 방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면 됩니다. 각각 질서와 변화를 상징하며 불법(佛法)의 근본과 실천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언종 사찰에서는 가운데 대일여래를 모시고 양벽에 태장계와 금강계 만다라를 배치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후 만다라라는 단어는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됩니다. 한국에서 불경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변상도(變相圖)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것을 모두 만다라라고 합니다. 즉 부처나 보살, 천 등이 등장하며 이들이 일정한 위계로 표현될 때 이를 모두 만다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경전을 모두 만다라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축약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경전에 의거하여 만들어져 의식에 쓰이는 만다라는 별존만다라(別尊曼荼羅)라고 합니다.

또한 만다라의 공간적 특징이 강조되어 절이나 신사의 배치도를 만다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즉 유명한 절이나 신사를 그려 넣고 각 건물 위에 모시는 신이나 부처를 모신 다음 이를 만다라라고 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이처럼 일본에서 만다라는 종파를 막론하고 다양한 경우에 쓰이는데, 사찰을 답사할 때는 이를 유념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태장계만다라


금강계만다라


후지산만다라


수험도(슈겐도)

수험도는 일본의 밀교와 전통 산악신앙이 결합한 형태의 종교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스카시대의 역소각(役小角 엔노 오즈노)라는 수행자가 일본의 산악신과 부처의 결합체인 권현(權現 곤겐)을 만나 만들었다고 하는 종교이지만 사실은 헤이안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권현(곤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험도는 일본 전통의 산악신과 부처는 같은 것으로 봅니다. 즉 일본에 불교가 유입되기 전 부처가 신의 모습으로 이미 일본에 있었고, 불교 전래 후에 비로서 부처로써의 참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험도의 수행자들은 독특한 의상과 법구를 지니고 산을 뛰어다니고 절벽에서 수행흘 합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종파로 있지 못했고 천태종과 진언종의 밀교 의식을 전수받아 각각 천태종 수험도, 진언종 수험도로 있다가 2차 대전 이후 독립된 종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3-1-3. 가마쿠라 신불교


가마쿠라시대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끊기게 되었지만 밀항을 통해 유학한 승려들을 통해 선종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무사정권과 맞물려 일본의 선종은 엄청난 확장을 하게 됩니다. 한편 무사정권의 성립으로 전쟁이 잦아지자 고통스러운 현세를 피해 내세의 극락세계를 갈구하는 정서가 광범위하게 펼쳐집니다. 이에 어렵고 현학적인 귀족불교와는 별도로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과 염불만으로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정토종계 불교들이 자체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태종으로 시작된 법화신앙은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를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여 일련종이라는 일본 고유의 종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가마쿠라 신()불교라고 합니다.

 

임제종臨済宗과 조동종曹洞宗, 황벽종黄檗宗

가마쿠라시대 일본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선종의 유입입니다. 복잡한 교학을 반대하고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은 한국, 중국, 일본을 막론하고 각국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선종에는 여러 종파가 있지만 일본에 전해진 선종은 임제종과 조동종이 대표적입니다.

임제종이라고 하면 어색할 테지만 사실 한국의 조계종이 바로 임제종과 같은 종파입니다. 임제종은 화두(話頭)를 설정하고 그 화두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며 그 깨달음을 벼락같이(頓悟) 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돈오를 중시하기 때문에 앉아서 고요히 하는 참선뿐만 아니라 여러 고승들의 선문답(禪問答)과 세상을 돌아다니는 만행(卍行) 등을 중시합니다. 이렇게 화두와의 정면대결을 강조하는 선수행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합니다.

임제종은 일본에 가장 먼저 전해진 선종으로 가마쿠라시대 초기에 전파된 이후로 무사정권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물론 귀족들도 선종에 관심을 보였지만 특히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무사들에게 현실에 초연하고 화두를 향해 돌진하는 선()은 무사의 덕목과 동일시되었고, 많은 무사들이 선종에 귀의하였습니다. 교토와 가마쿠라막부가 있는 가마쿠라에는 많은 대규모 선종사찰이 세워졌으며 각각의 도시에서는 임제종 사찰이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조동종 역시 선종의 일파입니다. 임제종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조동종은 같은 선종이지만 임제종과는 선수행의 기풍이 조금 다릅니다. 임제종이 화두를 향해 돌진하는 간화선을 채택했다면, 조동종은 마치 나무처럼 묵묵히 말을 읽고 자신의 본성 안에 내재된 불성(佛性)을 관찰하면 저절로 불성을 얻게 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채택했습니다. 때문에 조동종에는 임제종과 같은 선문답이 존재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고요합니다.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조동종은 단절되었고 오직 일본에서만 조동종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미 교토 등의 간사이 지방에는 임제종이 너무 융성했기 때문에 조동종은 간토 지방으로 옮겨갔고 지금도 간사이에는 임제종이, 간토에는 조동종이 더 융성합니다.

한편 황벽종은 중국 임제종의 일파입니다. 그런데 에도시대 초기 중국과의 교역이 재개되면서 임제종에서 황벽종의 가르침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중국의 승려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와 황벽종을 창종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그 세력은 크지 않지만, 메이지유신 직전까지 황벽종 사찰의 주지는 중국에서 직접 건너왔고, 사찰의 건축도 완전히 중국풍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재는 임제종과 공동 협의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보화종(普化宗)이라는 극도의 허무주의 일파도 교토에서 성행했으나 메이지유신 당시 억압으로 인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선종의 유입은 일본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이전까지의 불교사원이 대규모 불상과 불화 조성에 힘썼다면 선종은 명상을 위한 넓은 공간의 건물과 정원문화를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사제관계와 문파를 중시하는 선종은 다른 종파에도 영향을 주어 각기 문파의 사승관계를 정리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불교건축면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탑두(塔頭)사원의 건립이 그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절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정토종淨土宗과 융통염불종融通念佛宗

가마쿠라막부가 세워질 때까지, 또 막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무사들의 대립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실의 세계보다 내세에 갈 극락세계에 대한 염원이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교토의 귀족들이 먼저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여래를 위한 사찰을 지어 이러한 정토사상의 유행을 대변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교리를 가진 기존 종파의 틀 안에서는 극락세계에 대한 무사와 서민들의 열망을 모두 채워주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기존에 중심을 이루던 법화경화엄경을 존중하면서도 아미타여래에 대한 염불을 중심으로 수행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융통염불종이 료닌(良忍)이라는 스님에 의해 정립됩니다. 염불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처의 상이나 그림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관상(觀想)염불이고, 두번째는 부처님의 이름을 직접 소리내어 외치는 칭명(稱名)염불입니다. 이중 관상염불은 일정한 교리와 불상, 불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귀족들에게 성행했지만 칭명염불을 염주만 있으면 되었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칭명염불을 통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융통염불종을 통해 번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더욱 단순화한 것이 정토종입니다. 호넨(法然)이라는 스님은 법화경화엄경마저 버리고 오직 아미타불을 모시는 정토종의 교조가 됩니다. 호넨은 오직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많은 무사와 서민들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단순화된 교리는 기존 불교계의 반발을 사서 호넨을 유배보내기도 했지만 결국 엄청난 신도를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진언종의 구카이처럼 정토종 신자들은 호넨을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생각합니다. 결정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안 역시 대대로 정토종을 믿었기에 에도시대에 정토종은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정토진종浄土真宗과 시종時宗

정교종 계통 불교의 유행은 계속되어 정토진종과 시종이라는 일본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종파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정토진종은 신란(親鸞)이라는 스님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 간단히 진종(真宗)이라고도 하고 일향종(一向宗)이라고도 합니다. 정토종에 참 진자를 넣은 것은 호넨이 만든 정토종을 진실로 이은 종파라는 뜻입니다. 신란은 호넨의 제자로 정토종에서 말한 이야기를 거의 다 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정토진종에서 신란을 관음보살과 쇼토쿠태자의 화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리상의 큰 차이는 없으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승려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승려는 보통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입니다. 공식적으로 승려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종파는 정토진종 뿐이었습니다. 지금의 정토진종의 지도자들은 모두 창시자 신란 스님의 친 핏줄들입니다. 때문에 정토진종은 불교계 내에서도 위험하거나 이단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기존 불교계와 연결된 정치세력들과의 마찰도 찾았습니다.

이러한 마찰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토진종은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었습니다. 정토진종의 쉬운 교리와 출가의 용이함 때문에 많은 농민과 하급 무사가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을 규합하여 정토진종의 지도자는 거대한 성과 같은 사찰을 짓고 사실상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을 규합하여 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엇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잇코잇키(一向一揆)라고 합니다. 가신들의 충성심이 높기로 유명했던 도쿠가와 이야에스의 가신 중에도 주군을 배신하고 여기에 참여한 이들이 있을 정도로 정토진종의 위세를 높았습니다.

이들은 오사카지역에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라는 거대한 사찰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사카성의 전신입니다. 당시 천하를 제패하려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 절을 함락시키려고 햇지만 무려 10년간이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결국 정토진종 세력과 협약을 맺고 이들이 이시야마혼간지를 떠나는 대신 포교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주고 수도였던 교토에 새로운 절을 세워주기로 합니다. 이것이 지금 교토에 있는 니시혼간지(西本願寺)입니다. 그리고 이시야마혼간지를 무너트리고 오사카성을 쌓습니다.

이들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토진종의 후계자 문제에 간섭하여 정토진종 내부의 암투를 발생시킵니다. 그리하여 정토진종의 세력은 쪼개져 서쪽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동쪽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로 나누어집니다. 이렇게 된 이후에는 정토진종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한편 정토신앙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염불을 하지 않고 아미타불을 향한 마음만 항상 가지고 있어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종파도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시종입니다. 시종은 정토진종에 비하여 세력도 약하고 사찰의 수도 적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단순화된 교리는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련종日蓮宗 (법화종法華宗)

가마쿠라 신불교의 가장 특이한 탄생아는 바로 일련종입니다. 일련종의 뿌리를 찾으면 법화신앙이라는 면에서 천태종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그 결과는 달랐습니다. 희대의 성인(聖人)으로도 괴팍한 요승(妖僧)으로도 평가되는 일련종의 교조 니치렌(日蓮)은 천태종의 총본산인 히에이산 엔랴쿠지에서 홀로 공부하다가 득도했다고 합니다.

니치렌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모든 불경은 거짓이고 오직 법화경만이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라불교, 밀교, 천태종, 정토종, 선종의 모든 종파를 없애고 법화경의 가르침에 기반한 하나의 종파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한 가지 이를 정치적 상황과 연결시킵니다. 니치렌이 활동하던 시키는 원 제국에 의한 일본 침공이 진행되던 때입니다. 니치렌을 올바른 불법을 닦아야만 국가를 안정시킬수 있다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설파합니다. 또한 상대방의 논리를 극단적으로 공격하여 마치 검도의 도장깨기를 연상하게 하는 공격적 포교를 하였습니다.

일련종의 또 다른 특징은 본존(本尊)을 부처님이 아니라 법화경으로 모신다는 점입니다. 법화경만이 올바른 가르침이며 만약 법화경을 공부할만한 능력이 없다면 나무묘법연화경 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진언만 외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련종 사찰에 가면 가운데 불상 대신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글씨가 써있고 그 주위를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이 둘러 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명호본존(名號本尊)이라고 하는데, 특히 니치렌과 그 직계제자 같은 고승이 쓴 것일수록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명호본존

 

당연히 이러한 가르침은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고 니치렌을 유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일련종 신자들이 사찰을 세우면 엔랴쿠지나 나라의 승군들이 몰려와 절을 불태우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일련종도 사회에 적응하며 온건해졌고 무사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일련종은 모든 종파를 통일하려던 초기의 이상과 맞지 않게 가장 많은 분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연합과 분열의 역사는 너무 복잡해서 현대 연구자들도 추적을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 성향을 종합하여 크게 3가지의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치파(一致派) 혹은 수시파(受施派)라고 불리는 이들로 일련종계열의 가장 큰 규모를 이루면 통합교단을 이루어 일련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종단을 통합하려는 일치의 이상을 지니고, 일련종 신자가 아닌 이들로부터의 시주를 받아들이며 또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승렬파(勝劣派) 혹은 불시불수파(不受不施派)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보통 법화종(法華宗) 혹은 본문종(本門宗)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중요시하여 통합을 바라지 않고 일련종 신자가 아닌 자의 시주를 받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교리의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니치렌에 대한 평가입니다.

불교에는 삼보(三寶)라는 것이 있습니다. 각각 부처님(), 가르침(), 그리고 승가()로 이 세가지가 갖추어져야 교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승려파 중 일부는 부처()를 석가모니불로 보고 니치렌은 승()의 정점인 대성인(大聖人)으로 봅니다. 그런데 일부 가장 극단적인 종파는 석가모니는 가짜 부처이며 오직 니치렌만이 부처라고 하여 불()의 위치에 둡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로 현재는 일련정종(日蓮正宗)이라는 종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흔히 한국에 남묘호렌겟교로 알려져 있는 일본의 창가학회 (약칭 SGI)는 바로 일련정종에서 갈라져나온 일파입니다.

 

3-1-4. 신종교와 단립사찰

 

가마쿠라시대까지 활발하게 만들어졌던 각종 불교 종파는 무로마치시대의 혼란 이후로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선종의 일파인 황벽종 정도가 중국에서 들어왔을 뿐입니다. 오히려 불교 보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가 불교의 역할을 대신하여 서민과 무사 사이에 널리 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막부는 불교를 위해 천주교를 억압하고 사원에 호적의 관리를 대행시키면서 불교는 일본 사회에 깊숙이 침투합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불교는 강력한 억압을 받게 됩니다. 사찰의 소유였던 토지가 대부분 몰수되어 국가에 귀속되고, 신도와 불교를 완전히 갈라놓고 천황을 신으로 생각하는 신도를 높이는 면에는 불교를 격하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 상당한 사찰들이 파괴되고도 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는 불교 종파는 1356파로 강제 통합하고 새로운 종단 창설을 막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이러한 규제가 풀리게 되면서 1356파에서 이탈하는 종파와 사찰들이 대거 생겨났습니다. 특히 대형 사찰들은 자신이 속한 종단에서 벗어나는 편이 경제적으로 이득이었기 때문에 대거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 갈라집니다. 이들 중에는 종()의 이름은 같이하면서 파()의 이름만 달리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새로운 종을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까지 신앙의 대상이었으되 본존(本尊)을 되지 못했던 대상들을 본존으로 모시는 종파로 새로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유명사찰들이 이렇게 새롭게 종파를 만들었습니다.

종단에 메이지 않기 위해 아예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찰도 생겼습니다. 이를 단립(單立)사찰이라고 합니다. 단립사찰은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본말사 제도에 속하지 않기 위한 사찰들이나 내부 다툼이 있는 사찰들이 대부분입니다. 종단을 만들었으나 거기에 속한 사찰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사찰이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고 상속도 가능한 일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