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일본의 순례문화
3-5-1. 순례문화의 소개
마지막으로 소개할 일본의 불교 문화는 특유의 순례 문화입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시대부터 각지의 명찰이나 신사를 순례하는 순례문화가 있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여러 사찰을 묶는 순례 코스가 생겨났는데, 아래에 소개할 각종 영장(霊場)이 바로 이 때 성립되었습니다. 또한 교토와 나라 남부에 있는 여러 명산에 대한 신앙이 강화되면서 여러 순례길이 개척되었습니다.
헤이안시대에 시작된 순례문화는 에도시대에 꽃을 피게 되었습니다. 생산력이 늘어나고, 무사와 서민계층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순례를 떠나는 인원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관음보살과 이세신궁에 대한 신앙이 커지면서 순례가 일종의 붐처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화를 통해 여유로운 중산층이 늘어나고, 또 각종 신문에서 순례코스를 새로 개발, 소개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각종 순례문화는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몇가지 필수품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납경장(納経帳) 혹은 주인장(朱印帳)이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각 순례코스에는 몇 번 찰소(札所)라는 식으로 번호가 붙어 있고, 순례자들은 보통 이 순서에 따라 순례길을 돕니다. 각 사찰이나 신사에는 납경소(納経所)라는 곳이 있어 납경장에 순례를 했다는 붉은 도장을 찍고 묵서(墨書)로 순례지와 날짜 등을 기록해줍니다. 이러한 행위는 납경(納経) 혹은 주인(朱印)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전에 순례지에 들려 손으로 『반야심경』 등을 써서 봉납하면 이에 대한 증거로 붉은 도장을 찍어주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보통 한 사찰에서 주인을 받기 위해서는 300엔에서 500엔을 지불해야 합니다. 일본인들은 책으로 된 납경장 외에도 족자에다가 주인을 받거나, 수의(壽衣)에도 주인을 받는데, 이는 순례를 마치면 극락왕생한다는 믿음에도 유래한 것입니다.
그밖에 머리에는 삿갓을, 몸에는 흰 백의(하쿠이)를 입고, 염주와 와게사라는 목에 거는 간이 가사(袈裟) 등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꼭 갖추는 것은 오사메후다(納め札)라는 일종의 부적 같은 것입니다. 일본 사찰에 가보면 건물에 사람의 이름을 쓴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사메후다입니다. 일본인들은 여기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순례지에 붙이거나 서로 교환하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순례에 왔다는 것은 신에게 알리고 또 서로의 평안을 기원해준다고 합니다.
3-5-2. 주요 순례지
일본에는 수많은 순례코스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순례코스만 모아서 정리한 책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중 상당수는 메이지유신 이후 관광효과를 노린 지방자치단체나 신문사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래에서는 최소 헤이안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기며 일본의 여러 순례지 중에서도 매우 유명한 주요 순례지만 간단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이코쿠삼십삼소관음영장(西国三十三所観音霊場)
사이코쿠 삼십삼소 관음영장은 일본의 긴키지방에 있는 유명한 관음보살의 성지 서른 세 곳과 번외(番外)로 되어 있는 세 곳을 순례하는 코스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나라현 남부에 있는 하세데라(長谷寺)라는 절에 있는 한 고승이 병으로 죽어 염라대왕 앞까지 갔다가 “생전의 죄로 지옥에 오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힘들다. 서른 세 곳의 관음 성지를 순례하면 죄가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을 전해듣고 33개의 보인(宝印)을 받아 되살아 난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헤이안시대 후기에 본격적으로 천황과 귀족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믿어지며 에도시대를 거쳐 가장 대중적인 순례코스로 자리 잡습니다.
순례 때 찍어주는 붉은 도장은 바로 염라대왕에게 받아왔다는 33개의 보인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이코쿠삼십삼소관음영장은 다른 모든 순례의 준거가 될 정도로 유명하면서도 유서가 깊습니다. 만약 여기에 속하는 33개의 찰소를 순서대로 돈다면 대략 동선이 1000km에 이르는데 워낙 해당 사찰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기 때문에 걸어서 순례하는 이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 버스나 철도를 이용합니다.
해당하는 사찰은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清水寺)처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한 사찰도 있으며,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즐비할 정도로 대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아주 작아진 건물 하나만 남은 작은 사찰도 있습니다. 이런 사찰들은 주인을 받으려는 일본인들로 항상 붐빕니다.
●라쿠요삼십삼소관음영장(洛陽三十三所観音霊場)
사이코쿠의 삼십삼소 관음영장이 교토부, 오사카부, 나라현, 오쓰현 등 긴키지방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라쿠요 삼십삼소 관음영장은 교토 시내지역만은 대상으로 하는 관음영장 순례입니다. 라쿠요 즉 낙양은 교토의 별칭입니다. 교토를 세운 일본인들은 당시 번화한 수도의 모습을 제국이었던 당나라의 수도 낙양에 빗댔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도 교토는 낙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라쿠요삼십삼소관음영장은 헤이안시대 후기 천황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일시 중단되었으나 2005년 재개되었습니다. 교토 시내 안에 모든 찰소가 있고, 대중교통으로 접근 가능하기 때문에 사이코쿠삼십삼소관음영장을 시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요미즈데라나 도지(東寺) 같은 유명한 사찰도 있지만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작은 사찰도 있기 때문에 교토를 호젓하게 여행하고 싶거나, 골목길의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선택합니다.
●시코쿠팔십팔소영장(四国八十八箇所霊場)
일본을 이루고 있는 4개의 큰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를 한바퀴 뺑 돌면서 88곳의 사찰을 순례하는 코스입니다. 성립시기는 에도시대로 비교적 늦지만 일본에서는 가장 유명한 순례코스입니다. 순례의 대상은 생불이라고 여겨지는 진언종의 개조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입니다. 구카이는 시코쿠에서 태어났으며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자신의 고향인 시코쿠에 총 88개의 사찰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88곳의 사찰을 모두 순례하며 홍법대사 구카이와 같이 자신도 성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순례의 목표입니다.
이 시코쿠팔십팔소영장순례는 에도시대부터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순례로 여겨져 왔습니다. 진언종의 본존은 대일여래인데, 구카이는 대일여래의 화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카이를 가리키는 다른 호칭은 대일여래를 의미하는 편조금강(遍照金剛)입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시코쿠팔십팔소영장순례의 길을 헨로미치(遍路道)라고 하며 순례자는 오헨로(お遍路)라고 합니다. 오헨로는 순례 중 죽음을 각오하고 지팡이를 비석 대신으로, 삿갓을 무덤 대신으로, 흰옷을 수의 대신으로 지니고 다닙니다.
헨로미치는 총 1400km에 달하며 걸어서 갈 경우 6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일생을 걸고 도전해보는 순례입니다. 때로는 순례를 도중에 멈추고 중간에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는데, 순례를 멈췄던 자리를 표시해두고 1년 후에 그 자리에서부터 그대로 다시 시작하기도 합니다. 시코쿠 주민들도 순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순례자를 도우면 순례를 하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믿어 순례를 지원합니다. 도보 순례길 중간에는 인가가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휴식소나 작은 오두막이 있어 순례자들이 묵을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아무 조건 없이 음식을 베푸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도 많이 도전한다고 합니다.
워낙 유명한 순례이기에 여러 가지 전설도 많습니다. 순례자들은 항상 구카이가 자신과 함께 다닌다고 믿으며 이를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문구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잠을 자기 전에도 늘 구카이에게 기도하고 감사를 표합니다. 또 다리를 지날 때는 지팡이를 집지 않고 들고 다니는데, 이는 구카이가 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종파를 떠나 구카이가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시노(吉野), 고야(高野), 구마노(熊野), 이세신궁의 순례길
오사카와 교토, 나라의 남부지역, 그리니까 지금의 와카야마현과 나라현, 미에현에 걸쳐 있는 기이반도(紀伊半島)는 일본의 본섬인 혼슈에서 태평양쪽으로 돌출해있는 일본 최대의 반도입니다. 기이반도는 전체가 거대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부 해안가를 제외하고는 농사를 짓기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명산이 많아 산악신앙이 발달해있고 이세신궁이라는 일본 최대의 신사가 있기 때문에 이곳들 찾는 순례길이 발달해 있습니다. 이들 순례지를 잇는 고도(古道)는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요시노는 앞서 언급한 역행자가 수행한 곳으로 유명하며, 슈겐도의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더불어 벚꽃의 명소로 일본에서 아주 유명합니다. 고야산은 일본 진언종의 총 본산입니다. 해당 800미터가 넘는 산 속 분지 위에 100여 개의 사찰이 산중의 도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마노는 산악신앙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는 3개의 산이 있어 각각의 신이 있는데 이곳을 순례하는 구마노고도는 옛모습 그대로 잘 남아있습니다. 이곳들에는 모두 대규모 사찰과 신사가 남아있어 지금도 신앙의 대상으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매번 똑같은 교토, 나라, 오사카 여행이 질린다면 조금만 눈을 돌려 이곳을 찾아도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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