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同黎 2010. 1. 11. 20:03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公의 貫鄕은 延安이요, 諱는 癖이고, 阿號는 碧壁이며, 살던 곳은 忠淸道 丹陽郡이다.生前 婚姻을 하지 않아, 妻와 子息이 없고, 다만 家門의 아우 셋이 있을 따름이다.일찍이 壬戌年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文章과 格物致知에 能하였으며, 性品은 思慮가 깊고 剛直하였다. 開國한지 六百十七年이 되던 해에 我朝에 入朝하였다. 天下의 人材를 뽑는 科擧에 應試하여 進仕試에서 滿點을 받아 本朝 最初의 壯元을 하여서 일찍이 그 이름이 朝野에 널리 퍼졌다. 以後에 大科 文科에 乙科 及第하여 弘文錄에 登載됨과 同時에 朝廷에 出仕하였으니, 처음의 品階가 通仕郞이요, 그 官職은 權知承文院正字였다. 以後 正職으로 使令된 後에도 生員試와 訓練院試에 一等으로 入格하여 그 文章을 天下에 뽐내었다. 後에 그 間의 試券과 詩賦, 論考를 모아 文集을 刊行하니 그 名稱을 謙遜히 하여 碧壁雜集이라 붙였다.

正職으로 使令된 以後, 여러 사람으로부터 그 出衆한 能力을 높이 사게 되어 벼슬에 벼슬을 더하였고, 品階는 갈수록 높아졌다. 直言을 諫하는 玉堂의 博士가 되었으며, 곧 關西의 暗行御史로 任命되어 世道를 바로잡고자 勞力하였다. 이때에 黙黙히 自身의 所任을 다하고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官屬, 訓長, 百姓들의 功을 御殿에 아뢰니, 이를 機會로 官에서 미처 살피지 못한 곳을 두루 어루만지는 效果를 낳아, 朝野에 公을 稱頌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어 禮曹의 佐郞으로 首長이 되었으며 몇 달이 지나 生涯 첫 外官職인 咸鏡道의 道使가 되어 關北으로 떠났고 品階는 從四品 朝散大夫에 이르렀다.

公은 生前에 官職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交友하였다. 그리하여 咸鏡道에는 遊樂을 함께 하는 이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또한 本朝의 經世濟民에도 觀心을 기울여, 邑內에 萬物工作이라는 市廛을 세우고, 좋은 商品을 普及하나 殖利에 執着하지 않으니, 많은 이가 公의 재주와 性品을 稱讚하였다. 또한 敎育에 힘을 기울여, 처음에 平安道 大同學堂의 訓長으로 在職하다가, 곧 忠淸道 政碩學堂의 訓長과 有司가 되어 政碩學堂의 講義와 運營에 큰 功績을 남기었으며, 同時에 學堂의 書院昇格을 위하여 勞力하였다. 이러한 公의 性品과 能力에 感化되어 아우 여럿이 公을 中心으로 家門을 세우기를 懇請하니, 그것이 公이 世主가 되어 慶尙道 大邱府 八公山 기슭에 礎石을 잡은 竹乭世家이다. 世家는 비록 父母는 다르나, 義로 맺은 兄弟들이 서로를 恭敬하여 더 없이 友愛롭게 지내니, 他의 模範이 될만 하였다.

그러나 재주가 뛰어난 이는 하늘이 일찍 데려가는 運命에 처한 것 일지라. 公의 剛直한 성격이 불씨가 되어, 咸鏡道 道使로 在職할 時에, 土官 任命을 둘러싼 狀啓가 御殿에서 문제가 되어 誤解를 사, 及其也 削去仕版이 되었다. 그러나 公은 本來 品階에 連延하지 않고, 이미 예전부터 淸野에서 살 것을 念願하였기에 이를 機會로 다만 草野에 隱居하는 선비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昊天不弔라! 갑자기 豫期치 못한 禍가 公을 덮치니 以內 不歸의 客이 되어버렸다. 兄의 悲報를 들은 아우들은 슬퍼 嗚咽하며 머리에 재를 뿌리고, 흙바락닥을 뒹굴으며,殯所에는 弔問行列이 줄을 이었다. 아! 이 世上 어느 곳에서 다시 公과 같은 이와 만나 家門을 이루고 한 時代를 살겠는가? 차라리 公의 재주가 뛰어나지 않아 朝廷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만, 다만 兄弟와 男妹의 友愛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더 누릴 수 있었을 것을!

不足한 아우들은 형님을 지켜드릴지 못한 것을 가슴을 치며 慟哭하고, 다만 開國 六百十八年 十二月 二十九日 작은 墓碣을 세워 公이 世上에 나서 돌아갔음을 알린다. 銘曰,

公再不歸 今竹不靑
公曠草廬 現石失剛
山下建意 但避煩邪
世不體其 只弟憶志
竹石氣 豈論直士

開國 六百十八年 歲次 己丑 十二月 二十九日에 아우 承議郞 行承文院著作 金民勝 이 삼가 讚하고, 通訓大夫 行掌隷院提擧 天魚이 삼가 書하고 篆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