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5차

기나 긴 일본답사기 - 20일 고세 (수평사박물관水平社博物館·츠바메신사燕神社)

同黎 2019. 4. 15. 02:36



와카야마를 대충 둘러보고 빨리 수평사박물관으로 가기로 한다.

어제부터 장지훈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곳이기에 미친듯이 밟았지만

문제는 고속도로가 2차선이다...

박물관에 전화해서 사정을 하니 알겠다고 일단 오라고 허락


해가 떨어질 쯤 겨우 도착했다.

정신없이 들어가니 운영하는 시민단체분들이 친절하게 맞이해주고

여러 자료와 도록도 공짜로 주며 위안부 문제도 물어보신다. 감동

무려 퇴근까지 미뤄가며 내부 사진 촬영도 허락해주셔서 또 감동

어제의 그 료젠역사관과 비교된다.


수평사박물관(水平社博物館, 스이헤이샤박물관)은 공익법인 나라인권문화재단에서 세운 박물관으로

일본의 대표적 신불차별문제인 부라쿠민(부락민)의 해방 운동을 이끈 수평사(스이헤이샤)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박물관이다. 박물관이 위치한 나라현 고세시 카시하라는 1922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생긴 전국수평사(全国水平社)의 발상지이다. 어떻게 보면 현재 공공연하긴 하지만

비밀로 되어있는 피차별부락 중 거의 유일하게 대놓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의 천민은 나라시대 이후로 에타(穢多), 히닌(非人)등으로 불리며 차별받았다. 이들이 사는 곳은 따로

있었고 본래 단순한 마을을 가리키던 단어인 부락(部落, 부라쿠)는 이들 천민층이 살던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웃긴 것은 모모야마~에도시대를 거치면서 같은 상공인이더라도 무사의 이름을

습명할 정도로 부유해져 준 무사의 취급을 받던 이들이 있는 반면 도축업, 목수, 나막신(게다) 제조,

음양사, 가죽업, 장의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천민으로 완전 정착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형식적으로 신분이 철폐되고 이들이 상던 지역에 대한 차별로 철폐되는 일명 '동화(同和)'사업이

진행되지만 반면 이들의 해방에 반발하는 차별적인 해방령 반대 잇키(解放令反対一揆)가 빈발할 정도로

신분적 차별은 심했다.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뒤집어져 구시대의 신분이 거의 사라진 한국과 달리 일본은

신분 차별문제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고 이를 가리키는 문제가 '피차별 부락민 문제'라고 하여

지금까지도 간간히 사건을 일으키고 있고, 정치권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곳에 있던 사원 사이코지(서광사)에서 태어난 사이코 만키치와 도축업자의 가문으로 촌장의 손자인

사카모토 세이이치로, 오동나무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코마이 키사쿠, 소인증을 앓던 야마다 코노지로 등은

츠바메카이(燕会)라는 모임을 가지며 부락민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러시아혁명 등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해방운동을 구상하고 청교도혁명의 좌파인 수평차의 이름에서 모티브를 따서 수평사라는 모임을 구상해

1922년 창립대회를 선언한다. 이들은 교토 오카자키공회당에서 전국수평사 창립대회를 열고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인 수평사창립선언을 채택한다. 이들은 고위신분 출신들이 벌이는 융화운동을 비판하였고 문제는

차별받는 측이 아니라 차별하는 측에 있다고 하였으며, 이후 조선의 백정 해방운동인 형평사와도 연대한다.


이후 일본에 들어온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 특히 수평사의 청년조직인 전국수평사청년동맹은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과 결합하며 볼셰비키의 이름을 딴 보르파를 형성한다. 반면 이들의 계급주의적

성격에 대립하는 우파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나키즘에서 이름을 딴 아나파를 구성하고 결국 좌파의

강성 아래 아나파는 일본수평사라는 별도조직을 만든다. 전국수평사는 계급투쟁의 지침을 재확인하고

일본수평사는 결국 소멸되어 융화운동 측에 흡수되지만 중일전쟁 이후 파시즘의 물결 때문에 수평사는

불법화되고 단체도 자연 소멸된다. 부락해방운동의 아버지 사이코 만키치는 심지어 극우로 전향하기도.

그러나 1945년 10월 미에현에서 열린 시마회담이라는 회의를 통해 부락해방운동의 재건이

이루어져 부락해방전국위원회가 결성되러 부락해방운동은 이어진다.


현재 피차별부락민해방운동은 크게 3갈래로 나뉘어졌다. 전국수평사의 가장 적통은 부락해방전국위원회를

거쳐 부락해방동맹으로 이어진다. 부락해방동맹은 전후 사회당을 거쳐 민주당, 현재의 입헌민주당을 지지

한다. 가장 큰 단체이나 내부 비리사건이 폭로되는 등 여러 문제로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부락해방동맹의

민주당 지지에 불만을 가진 이들 중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탈퇴해 만든 것이 부락해방동맹전국연합회로

이들은 완연한 좌파이며 공산당 혹은 기타 좌익세력과 동맹관계이다. 한편 일본수평사 및 융화운동과

관련된 이들은 전일본동화회, 자유동화회로 정리되었으며 이들은 자민당과 연대 관계이다.

수평사박물관은 이들 중 어느 곳과 뚜렷한 연결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오사카 인권박물관과

연대하는 것을 보아 인권문제를 다루는 범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받는 모양인 듯하다.


참고로 2011년 이곳에서는 한국병합 100주년을 맞이하여 코리아와 일본이라는 특별전을 열어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 재특회 회원들이 박물관 앞에서 확성기로 이를 비난하며 일본에서 금기시되는 에타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여기는 에타의 성지라서 위안부를 좋아하는가보다 등의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이것이 수평사박물관 앞 차별 발언 사건인데 인권옹호 업무를 맡는 오사카법무국(일본 법무성의 출장소)은

정작 이유 없다고 각하하기까지 했다고... 결국 민사소송으로 150만엔을 배상을 받아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면


사카모토 세이이치로의 회상록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 수평사운동 관계 사료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어 팜플렛도 마련되어 있다.


전시 시작

구름 속의 서광


천민들의 차별


이들이 주로 종사했던 직업


마을의 호적

과거 이와사키촌이라는 이름일 때의 호적이다.


마을 회의 문서


카시하라에서 나라현지사에게 올린 취학원서 초고

메이지 유신 이후 해방령은 선포되었으나 소학교에는 부락 아동들을

분리하여 가르치거나 따로 학교를 설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에 따라 학교 통합투쟁을 벌인 흔적이다.


해방운동을 주도한 사카모토가의 자료들


당시 이 마을은 오동나무와


아교 생산이 주 업무였다고


오동나무 산업


아교


이후 학교통합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나라현 부락민들을 중심으로 야마토동지회가 결성된다.


당시의 자료들


야마토동지회 안내장

사카모토 키요토시 앞으로 간 것


교풍사업현의회출석부

마을 스스로 일으킨 교육, 위생운동의 기록


대일본동포융화회취의서

해방운동의 시조 격으로 피차별민 스스로 일으킨 사업의 시작이다.


혁신동맹회의 간사촉탁서


사카모토 키요토시가 사용하던 벼루


안내판


이들이 봉납한 에마

인근의 진무천황사에 있던 것


전국수평사 창립 전야


야마토 타케루를 그린 에마

진무천황사에 봉납된 것으로 사이코 만키치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카시하라청년공화단 명의로 바쳐졌다.



카시하라청년공화단

차별철폐운동을 벌이던 마을의 모임


이들은 츠바메카이라는 모임을 가지고 있었고 해방령 50주년을 맞아 1921년 마을의 시작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언덕에 이들의 마을 신을 모시는 신사를 짓는다. 이것이 츠바메신사

자신들의 신사를 가지고 싶었던 이들의 소망이다.


츠바메카이의 참석자들


모임에서 이세 여행을 다니면서 주인을 받았던 수첩


카시하라청년공화당의 직인


모임 멤버들의 이름으로 보낸 엽서들


사카모토 카즈에의 일기장

사카모토 세이이치로의 부인으로 당시 기록이 잘 되어있다.


좋은 날을 위하여 라는 팜플렛

츠바메카이에서 발행한 것으로 이를 계기로 수평사운동이 진행된다.


책의 내부


전국수평사의 전개


각종 자료들


관동수평사대회 포스터


이 가시관 모양의 기는 형관기라고 하여 예수의 가시관처럼

피차별민들의 희생을 의미하는 부락해방운동의 상징이다.


1922년 전국수평사대회를 보도한 신문들



대회 선언문과 수첩


부락위원회 활동을 담은 팜플렛


제10회 대회 신문 기사


제6회 대회 대의원선정 자료


10회 대회를 끝으로 전국수평사는 해소된다.


전국수평사청년동맹의 사진


전국의 활약상


여성들의 활동


소년소녀의 활동


세계기록유산 등재


당시 대회 모습


수평사와 형평사

1923년부터 조선의 형평사와 연대한다.


역대 대회 회의록



후쿠오카연대 폭파사건의 정체라는 팜플렛


수평신문이라는 신문도 발행했다.


수평신문


각종 팜플렛


차별행위에 대한 규탄대회


이것이 전국수평사의 초대 깃발이다.


형관기

카시하라수평사에서 사용했던 것


츠 형무소장의 부락민 차별 사건에 대한 규탄 자료



형평운동과의 연대


한쪽에는 제1회 창립대회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선언문


결의문



당시 상황 재현


연극식으로 보여준다.


가장 핵심적인 전국수평사강령 및 선언


전국수평사대회로 가자는 안내문

대일본동포파별철폐대회에서 요네다 토미와 이시다 쇼지라는 운동가가 배포했다고

이 역사적 두 자료는 그대로 복제해서 판매하고 있다.

우리는 선물받았다.


잡지 수평 제1호


조선형평운동이라는 팜플렛


재일조선인운동가들의 명함


운동가들

사이코 만키치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이후의 부역 때문인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특별전시실에는 쿠마모토대지진에서 봉사활동한 내용이 전시


장애인차별철폐운동에도 연대하고 있는 듯


안내문



모두가 형제자매, 모두가 가족 친척이라는 연대의 깃발


다 보고 나왔다


세계기록유산 등재서


2층 발코니에는 동네를 조망할 수 있게 해놨다.


저 방향이 츠바메신사


진무천황사

이곳의 산 위로 진무천황이 올라가 다스릴 나라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와 진무천황사라는 신사가 있다.


사이코지


사이코 만키치가 태어나 수평운동의 중심을 이루던 곳이다.


안내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해가 다 저물었다.


옆에 있는 전국수평사창립선언 기념비


앞은 인권의 고향 공원이라는 공원이다.


동쪽을 바라보는 눈부신 생명의 등불이라는 기념비

야마토동지회 100주년, 전국수평사 90주년을 기념해 세웠다고


전국수평사 강령



기념비 내력


흔들렸군


야마토동지회 창립선언문


사이코지 입구


해가 완전히 졌으나 츠바메신사는 꼭 봐야할 것 같아 올라왔다.

차로 헤드라이트 비추고 촬영 중


츠바메카이 기념비


이곳이 토론의 장소였다고 한다.


본전에 모신 신들

뭐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츠바메신사(燕神社, 연신사)는 제비처럼 훨훨 날기 원했던 츠바메카이 청년들이 주도하여 지은 신사이다.

1921년 해방령 50주년 기념으로 세웠다고 하며 이들도 우리들의 신사가 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마을의

유래가 되었다는 언덕에 신사를 세웠다고. 연못 아래는 4개의 하천이 모여 수운을 담당했던 곳으로

아교와 오동나무를 생산하던 마을을 지탱해주는 물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기념하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했고 이후 오사카 어느 마을의 폐신사를 사들여 말에 실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곳 앞마당은 밤마다 츠바메카이 청년들의 토론장이었다고


신들도 의미가 있다. 이 동네에 있는 진무천황사의 진무천황과 타케미카츠지, 이세의 참배를

다녀와 감명을 받았을 토요우케비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름 모를 지주대신


신사 본전


헤드라이트를 키고 촬영해봤다.


하 여기까지 결국 왔군


전경


지주대신을 모신 곳


정성스럽다


이렇게 감명 깊게 20일차가 끝났다.

모두 녹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