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티베트문 법지 (보물 1376호)
순천 조계산의 송광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중의 하나로, 그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규모를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전쟁 당시, 대웅전과 국보인 백운당이 소실되기는 하였지만 그 외의 건축물과 유물들은 너무나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국보인 국사당과 보조국사 지눌의 불감(佛龕), 고려 고종때의 교서 외에도 22점의 보물 (이중 화엄탱화는 곧 국보로 승격 예정), 10점의 전남도유형문화재를 비롯에 수 백점의 귀중한 유물들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또한 유난히 고려시대의 문서나 불교유물, 그리고 원나라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많이 남아있어,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 외에는 사료가 많지 않은 고려사 연구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 송광사입니다.
그리고 송광사에 전래되는 많은 유물 중에 오늘 보려고 하는 한 장의 문서가 있습니다. 바로 보물 1376호로 지정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입니다. 훼손이 극심해서 문서의 상당부분이 사라졌고, 표구 과정에서도 순서가 뒤바뀐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는 오랜 기간 동안 그 정체가 모호한체로 연구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고려시대의 문서라는 것, 그리고 해독할 수 없는 기괴한 문자로 쓰여졌다는 것으로 여겨져왔습니다. 송광사에는 워낙 전래되는 신기하고 특이한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문서도 그러한 것 중 하나려니 여겨져왔던 것이지요. 송광사에서 전래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문서는 송광사 16국사 중 6대인 원감국사(1226~1293)가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원 세조(쿠빌라이칸)을 만나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받아온 일종의 통행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용된 글자를 원나라 시기 티벳불교 사까파의 법왕으로 몽고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하는 빠끄빠(파스파 八思巴라고도 함)이 만든 전설적인 몽고문자라고 여겨져 오랫동안 송광사 팔사파문서라고 전해져왔습니다.
그러나 1999년에 우연히 한국에 와있던 티베트인 승려가 이 문서를 보게되었고, 그는 이 문자가 티베트문자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티베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문자의 정체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문서에 대한 연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서울대 김호동교수가 티베트에서 본 비슷한 문서를 근거로 티베트문자로 쓰여진 여행증이나 특혜문서라는 주장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문서에 대한 해독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연구는 2001년 일본인 교수 나카무라 준에 의해 이루어지고 발표되었습니다. 나카무라 준의 연구진들은 송광사 문서를 해독하고, 이 것이 황제에게서 나온 성진(聖指)가 아니라 원나라 최고 종교기관인 선정원에서 나온 원나라 법왕이 발행한 법지(法指)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단순히 문자 해독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연구된 원나라 문서를 종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 문서가 법왕이 내린 법지의 형식을 갖추고 있음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로써 티베트 팔사파문서는 세계에 단 24점만 존재하는 원나라 법지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름 역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로 바뀌어서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발견된 23점의 법지는 티베트 내부에서만 발견되었으나 송광사의 법지는 최초로 원나라의 직할지 이외의 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교류사의 연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문서의 보존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아 가장 중요한 발급일자와 수취인, 발급인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을 해석해보면 불교적인 내용의 명령이 쓰여져 있는 것 같고, 수취인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에 지방의 관원과 속세의 중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루가치라는 단어가 발견되었습니다. 문서의 성격을 자세히 할 수는 없으나 남은 부분을 바탕으로 지금도 고려사와 원사, 티베트의 역사서 등을 비교하며 문서의 성격을 명확히 밝혀내고자 하는 연구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원나라"의 법왕이 티베트 승려인 것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티베트 역사에 대한 간략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티베트인들은 본래 유목민족으로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다가 7세기 경에 통일을 이루고 토번제국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토번제국은 당을 위협하고 장안을 침략하기도 하는 등, 9세기 까지 그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토번제국 통일의 주역은 티벳의 전륜성왕으로 추앙받는 송짼깜뽀왕입니다. 티벳에서는 그의 부인 문성공주와 함께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데요, 한국으로 치면 광개토대왕+문무왕+세종대왕 정도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쉬울 것 같습니다. 잇따른 토번의 침략에 당은 회맹을 맺고, 흉노에게 한 것 처럼 공주를 시집보내는 혼인외교를 시도합니다. 그래서 당나라의 공주인 문성공주는 티벳의 왕 송짼감뽀와 결혼하면서 많은 선진 문물들과 불교경전, 불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때부터 불교는 티벳의 국교가 됩니다.
9세기 넘어가면 토번제국도 쇠퇴하고 결국 각 지역별로, 씨족별로 나누어져 사분오열 됩니다. 그러던 중 티벳은 전 세계를 휩쓴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고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몽골과 티벳의 관계는 참 묘한 관계입니다. 사분오열되어 있던 티벳은 비교적 몽골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지역 씨족이나 종파마다 몽골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티벳 불교의 4대 종파(닝마파, 사꺄파, 겔룩파, 카규파) 중 사꺄파의 지도자 빠끄빠(파스파, 八思巴 라고도 함)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을 만나고, 그를 감복시킨 후 티벳의 영토와 인구를 쿠빌라이칸으로부터 공양받습니다. 그리고 이후 백여년동안 티벳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사캬파의 법왕이 됩니다. 사캬파의 법왕은 티베트에 대한 상당한 통치권(완전한 통치권은 아닙니다. 군사권 같은 경우에는 몽골에 귀속되어 있었습니다.)과 함께 선정원의 장으로 불교 정책에 대한 전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과 티벳 간의 독특한 관계는 이후 공시(供施)관계, 혹은 단월(壇越)관계 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현재 티베트의 중국 귀속과 독립 사이에서 매우 첨예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후 티벳의 역사는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명대 이후에는 다시 중국과 상관 없이 지내다가 청나라 때 다시 원대와 똑같은 단월관계를 맺습니다. 이 때는 겔룩파의 법왕이 티벳을 지배하게 되는 데요, 그가 바로 5대 달라이라마 입니다. 특이하게도 티벳은 한족과는 관계를 멀리하고 북방유목민족과는 관계가 밀접합니다. 이후 영국의 점령하에 놓여졌다가, 중국혁명 이후 중국으로 병합됩니다. 이 병합과정에서 참 말이 많습니다만, 주제와 관계가 없으니 후에 특강 자리를 빌어 짧게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어쨋든 원대에 티베트 불교는 전 세계 불교를 통솔하였고, 따라서 고려 불교 역시 그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송광사의 티베트문 법지이고, 그 이외에도 여러 문화재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공주 마곡사 5층석탑 (보물 799호)
마곡사 오층석탑 상륜부의 풍마동(風磨銅)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의 고려 후기의 석탑입니다. 장신이 다소 단촐하고 각 층의 비례가 잘 맞지 않아 길쭉하여 안정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조형적 가치는 떨어집니다. 이 석탑이 중요한 것은 석탑 맨 위의 상륜부에 한 눈에 봐도 크고 다소 이국적인 장식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 것을 풍마동이라고 부르는 데요, 풍마동은 티벳 불교의 불탑과 모양이 완전히 똑같습니다. 오히려 석탑보다도 더 화려하고 자세히 조각되어 있는데요, 때문에 저는 이 것이 나중에 만들어져 첨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티벳불교의 양식과 고려불교의 양식이 결합된 흔적은 여럿이 있고, 조선 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렇게 어색하고 형식의 화학적 융합이 일어나지 않은체, 물리적 융합만 있는 것을 봐서는 아주 초기양식인 것 같습니다.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499호)의 상륜부
조선 세조때 만들어진 낙산사 칠층석탑입니다.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앞의 풍마동에 약간의 유사함이 느껴집니다. 전통적인 한국 석탑의 상륜부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곡사 풍마동에서 나오는 복잡한 亞자형의 기단은 극도로 화려해지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통해서 더욱 발전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일층에 서 있는 이 석탑은 고려식과 티벳식의 절충양식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화려한 석탑에는 고약한 이야기가 서려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려 말기에는 기황후 세력처럼 원나라의 세력가와 혼인관계를 맺거나, 혹은 원나라에 진상된 환관들이 성공하면서 고려에 권세를 부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권문세족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고려에 많은 불사를 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이 경천사지 십층석탑이고, 당시에도 대단히 인기가 좋았던 금강산에도 이들이 새겨놓은 불상이 아직도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천사지 십층석탑에는 발원기가 새겨져있습니다. 석탑을 세운 것은 강융과 고봉룡이라는 자인데, 고봉룡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던 경험으로 권세를 부렸고, 강융은 딸이 원나라 재상 탈탈의 소실이되어 부원군까지 하는 권세를 부렸습니다. 결국 이들은 공민왕 때 모두 숙청되게 됩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국보 86호) 과거 경복궁에 있던 사진입니다.
大華嚴敬天祝延皇帝陛下萬 / □□太子殿下 / 壽萬歲皇后 / 皇秋文虎 / 協心奉□/ □調 / 雨順 / 國泰民安 / 佛日增輝 / 法輪常轉 … / 現獲福壽當生 / 覺岸至正八年 / 戊子三月日 / 大施主重大匡晋 / 寧府院君姜融大 / 施主院使高龍鳳大化主 省空 / 施主法山人六怡 / 於一切我等與衆 / 生皆共成佛道
이 것이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발원문입니다. 당시에는 명문에 먼저 원나라 황제, 태자, 황후의 안녕을 빌고, 고려 왕과 세자, 왕비를 언급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고려의 왕과 세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기실, 이 탑 자체가 원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서 지어진 것입니다. 이 탑은 예술성과 희귀성을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본래 이 탑은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 홀에 세워질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거를 지닌 탓에 여러 전문가들이 반대하였고, 결국 중앙통로 안쪽으로 놓이는 곳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전해오는 불상에도 티벳 불교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아래 두 불상을 혹 티벳 불상과 비교할 기회가 있다면 그 양식이 똑같은 대에 아마 놀라게 될 것입니다.
금동대세제보살좌상(보물 1047호) 호림박물관 소장
순천 선암사 금동관음보살좌상(전남유형문화재 272호)
티베트 불교의 지도를 받는 고려 불교계의 기분을 어땠을까요? 마냥 좋지는 않았겠죠. 당시 고려불교는 선종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티벳불교는 밀교 계통이 강했기 때문에 잘 맞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이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많은 없습니다. 신비주의적이라고만 알려진 밀교는 그러나 사실 대단히 복잡한 철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교종이나 선종을 현종(顯宗)이라고 하고 이에 대비되는 의미로 밀종(密宗)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티베트인들은 스스로 현종 다음 밀종이라고 하며 현종을 다 깨쳐야 부처에 더 가까운 신비의 세계인 밀교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티벳은 네팔, 인도와 왕래가 용이했기 때문에 잇혀진 초기불교의 경전도 많이 구할 수 있었죠.
현대 한국 불교를 흔히 선종 중심의 통불교라고 합니다. 선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교종적인 전통 역시 함께 추구하는 정혜쌍수, 선교일통의 정신을 추구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사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 많은 불교교단들이 한꺼번이 통합되면서 종파불교의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현재 스님들은 선정에 드는 선원,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 계율을 공부하는 율원을 모두 거쳐야 하고, 이 3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절은 총림이라고 합니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이 대표적인 총림이지요. 그러나 총림에는 사실 하나의 원이 더 있습니다. 바로 염불원입니다. 말 그대로 염불을 공부하는 이곳은 주문과 진언을 중시하는 밀교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고려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미쳐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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