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그 외

이 유물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同黎 2012. 11. 27. 03:43



복희 여와도. 중국 전설상의 인물이자 농사의 신으로 숭배되었음


용산에 새로 생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3층에 가면 아시아관이라는 다소 낯선 전시관이 있습니다. 아시아관은 한국 이외에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등의 다른 나라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 입니다. 각 국에서 대여한 유물도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직접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기도 합니다. 아마 박물관에 가시는 김에 여기에 들려 보면 생각보다 높은 수준의 소장품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인도의 간다라 불상이나, 의친왕이 수집한 일본의 현대미술품, 중국 당나라의 삼채도자 같은 것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관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앙아시관에서는 지금의 위구르 지역에 속하는 소위 "서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수집해온 각종 유물, 불상, 벽화 등이 가득있습니다. 참 신기한 유물들이 많은데, 베지클릭 석굴, 돈황 석굴의 벽화나 돈황에서 온 각종 비단 깃발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직조물(2000년도 더 된 것이 제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등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이것들을 세계적인 보물이라고 부르며 자랑하고 있는데 수량은 대략 1000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귀한 외국 유물들이 보관한고 있는 것이지요. 


이집트 신 세라피의의 신상


이 유물들을 어떻게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장하게 되었을까요? 이 유물들은 한국인이 수집한 것이 아닙니다. 일제시대인 1910년대에 일본인 서역 탐험가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동투르키스탄(위구르 자치구)를 돌면서 수집한 유물들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 유물들을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타니 고즈이는 일본의 백작이자 서본원사의 주지였습니다. 일본의 승려는 결혼이 가능하고 사찰 역시 대대로 물려주는 개념이 강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조금 낮선 직책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오타니 고즈이는 당시 열풍이 불고 있었던 서역 탐험에 27살의 젊은 나이로 뛰어들게 됩니다. 그는 학승들을 통해서 서역을 탐험하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유물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위구르 지역은 유물과 유적을 찾아 헤매는, 학자, 탐험가, 보물 사냥꾼, 스파이, 도굴꾼, 유물위조꾼 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중국에 속해있었으나, 당시 망해가던 청나라는 이 지역까지 중앙권력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상태였고, 유럽이나 미국 출신의 탐험가들은 지방 관리들에게 약간의 뇌물만 쥐어주면 입국은 물론 수백개의 상자 분량의 유물들을 본국으로 빼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웨덴, 러시아, 미국, 프랑스의 많은 탐험가 혹은 경제적 목적으로 흘러들어온 약탈자들이 실크로드의 유물들을 마구잡이로 가져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중국정부(청조 뿐만 아니라 중화민국 정부 또한) 역시 이 지역에 대한 서양인들의 더 이상의 조사를 막고 유물 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체의 절반이상의 벽화, 그리고 그 유명한 돈황문서들의 대부분은 위구르지역을 빠져나갔습니다.


베제클릭 사원의 벽화


실크로드가 여러 탐험가들 혹은 유물 사냥꾼들의 무대가 된 것은 본래 이 지역에 대한 영국과 러시아의 견제 때문입니다. 위구르자치구는 영국이 통치하던 인도와 당시 남하를 꾀하였던 러시아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현지인 등을 고용하거나 직접 측량을 하거나 이 지역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던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유적들이 보고되고, 한자나 또는 알려지지는 않은 새로운 문자로 작성된 여러 고문서들이 발견되자 이 지역에는 여러 학자와 탐험가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원주민들이 가져온 유물들을 구입하거나 노출된 유물만을 수습하던 단계를 거쳐 직접 유적을 찾아가서 발굴하고 벽화나 부조상등을 뜯고, 발굴보고서를 발행하는 데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웨덴인 스벤 헤딘은 여러 유적을 탐사하고 측량작업을 해 놓음으로써 실크로드 탐사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실크로드의 “탐험가”, 혹은 “도둑”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인 오렐 스타인과 독일인 폰 르콕의 실크로드 탐사는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많은 비판이 따르고 있는데. 폰 르콕은 실크로드의 여러 불교 석굴사원 벽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진 베제클릭 사원의 벽화를 거의 모두 뜯어가서 독일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불행한 사실은 이 벽화 들 중 상당수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스타인은 단단윌릭, 니야 등을 발굴하며 쿠차왕국의 실체를 밝혔고, 무엇보다도 돈황 막고굴에 감추어져있었던 수 많은 돈황문서들을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프랑스나 미국의 탐사 역시 진행되었고, 이들과 함께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에 합류하고자 했던 일본 또한 실크로드 탐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활발하게 실크로드 탐사가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은 가장 역사적인 발굴은 바로 20세기 초에 일어났습니다. 슐레이만에 의한 트로이 발굴, 하워트 카터의 이집트 왕가의 계곡 발굴, 미국인 빙엄에 의한 잉카제국 마추픽추 발굴은 바로 20세기 초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기간에 이루어진 발굴입니다. 또한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대대적 발굴과 유명한 엘긴 마블의 영국으로의 반출이 이루어진 시기 역시 바로 이 때입니다. 이 시기에는 유럽을 제외한 주변부에 대한 흥미와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물들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가지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명예, 만족감, 허영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럽인들은 그들이 무시하고 경멸했던 비유럽지역, 후진지역에서 유럽을 능가하는 문명이 발견되는 것에 대하여 흥미와 더불어 당혹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뛰어난 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여야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더욱 더 비유럽지역의 문명에 대해서 연구를 필요로 하였고, 따라서 이러한 수급을 만족시키기 위하 많은 탐험가들이 다양한 곳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실크로드 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래도록 모래 속에 잠들어있던 고대 국가들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특히 여기서 헬레니즘 왕조인 박트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유물들이 출토되자 실크로드 역시, 이집트, 팔레스타인, 중남미와 함께 각광받는 탐험지가 되었습니다.


호법신인 천(天)의 하나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이 결코 비유럽권 문명들에 대한 인정과 섬세한 연구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인조차 그 위대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집트와 일부 오리엔트 문명권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제외하고, 기타 비유럽권에서 보내진 유물들은(4대 문명에 속하지 못하는 곳에서 출토된 유물들) “역사박물관”이 아닌 “민족학박물관” 혹은 “인류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유럽의 유물들이 “역사”의 반열에 들어가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비교적 격상된 아시아사의 경우와는 다르게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의 역사는 여전히 “인류학박물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규모 건축물이나 석물군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건설의 주체를 원주민이 아닌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유럽인(백인)들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많습니다.) 지금은 우스갯소리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음모론 내지 괴담들은 백인들에 의한 뿌리 깊은 비유럽인에 대한 차별과 무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실크로드의 탐험가들에게도 존재하여, 우수한 유물의 경우 서쪽에서 그 기원을 찾곤 했습니다.


돈황에서 출토된 번(불당을 장엄하게 꾸미기 위한 깃발이나 드리개)

다시 오타니 컬렉션으로 돌아와 이 유물의 기구한 운명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오타니의 수집품은 당시 큰 화제가 되어 여러 언론에 소개되고, 고베에 위치한 오타니 개인 별전에 전시가 됩니다. 그러나 오타니의 서역 유물 수집은 전적으로 개인의 재산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타니 백작가는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게다가 서본원사에서 회계 비리문제 등이 일어나고 결국 오타니가 지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더 이상 오타니 백작가는 서역 유물들을 관리할 능력도, 의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유물의 일부를 매각하게 됩니다. 유물의 1/3은 동경의 오타니 저택에 남아 있다가 현재 동경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3은 여순( 뤼순, 당시 뤼순은 일본의 점령하에 있었습니다.)에 위치한 오타니의 개인 별장으로 옮겨졌습니다. 여순의 소장품은 2차 대전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현재 중국의 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3인 일본의 재벌인 구하라에게 넘겨집니다. 구하라는 1916년 조선의 광산채굴권을 얻기 위해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오타니 컬렉션을 기증하게 됩니다. 이후로 오타니 컬렉션은 서울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이 서역유물들은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합니다. 작은 것들은 포장하여 국립박물관, 개성분관, 간송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의 여타 유물과 함께 재빨리 부산으로 보내졌으나, 워낙 거대한 벽화 같은 경우 무게가 상당하여 이동시키지 못합니다. 이후 서울 수복 후에 다시 포장하여 부산으로 보내지만 일부는 파손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중국 남조 양나라의 여인 미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전쟁 통에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전생담을 그린 벽화


기구한 여행을 끝마치고 서역유물들은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편안히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이 유물들에 대한 중국의 반환요구입니다. 이 유물들이 본래 있던 자리가 현재 중국에 속하니 유물을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중국은 요즘 유물 반환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입니다. 이 당시 유물 약탈이 너무 심했기에 현재 가장 아름다운 벽화가 있던 곳으로 알려진 베제클릭 사원은 벽화가 한 점도 없이 뜯어간 흔적만 가득합니다. 보기에 처참할 정도로 철저히 여러 석굴들이 약탈당했습니다. 돈황문서들 역시 절반 이상이 프랑스나 영국으로 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많은 유물들이 불법으로 반출되었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몇가지 문제가 산재해있습니다.

우선 한국에 있는 서역유물은 법적으로 소유권 문제가 없습니다. 한국은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식민지였고, 오타니 컬렉션의 서울 소재는 그 식민지배의 결과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타니 컬렉션이 세계적으로 3위안에 드는 실크로드 컬렉션이라는 것도 고려의 대상이 됩니다. 최근에 국내 중심의 박물관을 벗어나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박물관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해외유물 수집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오타니 컬렉션 반환은 고민이 많이 되는 문제겠지요. 차라리 우리가 가지고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중국의 위구르 지배가 계속되는 때에 반환이 적절하냐는 질문입니다. 유물이 원 소재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되, 그것은 위구르 민족의 것이 되어야지, 중국의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요즘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이 가열된 상황에서 더욱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유물이 반환되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것이며, 중국으로 반환되는 것이니 위구르 자치구가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한 기관에서 소장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위구르가 당장 독립하지 않는 이상에는 딱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모호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국가간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 같은 방법을 통해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어 위구르 민족의 독립을 돕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반환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반환 이후의 문제는 중국과 위구르 민족이 알아서 할 일이며, 걱정이 된다면 반환시 여러 조건을 달아 반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는 한국이 현재 유네스코의 문화재반환 촉진 정부간 위원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식민지 이전 시대에 유출된 문화재의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반환을 거부한다면 앞으로 한국의 문화재 반환 요구 또한 명분을 잃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과 제국주의, 그리고 소수민족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는 오타니 컬렉션은 지금도 말 없이 중앙박물관 3층에 앉아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