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에 보관중인 사명대사 진영
이번 강의는 저번 특강을 구체화하여서 사찰 안에 사액서원이 등장하게 되는 특징적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절과 사액서원이라... 마치 절 안에 교회가 있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조선시대 불교는 많은 핍박을 당했고, 절을 무너트리고 무덤을 쓰거나 서원, 재실을 세우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지방, 특이 경상도 지방에 조사를 나가면 서원 주춧돌로 탑의 부재를 쓰거나, 무덤 석물로 석등이나 석탑 부재를 가공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찰 안에는 유교식 사당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찰 안에 유교식 사당이 등장하는 것은 두가지 경우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왕실의 복을 빌거나 죽은 왕족의 극락왕생을 비는 사찰로 지정된 왕실 원찰에다가 국가에서 왕의 사당이나 왕실의 장수와 복을 비는 건물을 따로 건립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건물은 지금도 종종 남아있습니다. (통도사, 법주사 등). 두번째는 자신의 사찰과 인연이 있는 큰 스님들을 마치 유생들의 사당처럼 만든 곳에 모시는 경우입니다. 조선시대 이렇게 모실 수 있는 스님은 임진왜란 때 공이있는 서산(휴정, 청허), 사명(유정, 송운, 홍제존자), 영규(기허), 처영(뇌묵)의 4명으로 제한됩니다. 서산대사는 처음 의승병을 일으켰고, 그 뒤를 사명이 이어 일본에 전후처리를 위한 사신으로 활약했으며, 영규와 처영대사 역시 의승병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특히 서산과 사명의 명성이 높았으며, 처영과 영규는 이들과 더불어 종향되는 정도였습니다.
표충사에 보관중인 사명대사 대장사령기.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선조가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사대선교행 이조판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양국대장 사명당현제군 사령 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원래 불교, 특히 선종에서는 사제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법맥을 기록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큰 절이라면 의례 선대의 큰스님의 영정을 모신 영각, 진영당 등을 지어서 불공을 올리곤 했지요. 그런데 조선 후기 성리학이 보학을 중시여기는 경향이 불교에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아울러 위 4분은 국가적으로 공인을 받은 분들이고, 유교적 덕목인 義를 지녔다고 하여 유학사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분이었기에, 특별히 유교적 위엄을 더하여 사당을 세우고, 입구에는 서원처럼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三門)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4대사의 위상이 높아지자 이들과 조금의 연이라도 있는 절들은 영정과 의발(가사와 발우 같은 승려의 유품을 말합니다. 보통 불교에서 의발을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법맥을 전수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리를 경쟁적으로 모셔가기 시작하였고, 저마다 법통이 자신의 절로 이어졌음을 주장합니다. 특히 조선후기 불교는 서산-사명으로 이어지는 법맥이 가장 절대적이었으므로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는 서산-사명과의 관계 설정이 아주 중요해지지요.
이렇게 정통성 확보를 위한 사우 설치작업을 벌인 곳은 합천의 해인사, 밀양 표충사, 해남 대흥사,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의 장안사와 유점사입니다. 이 중 해인사, 보현사, 장안사, 유점사 등은 고려시대부터 거찰이었고, 해인사가 사명사대의 입적지, 보현사가 서산대사의 입적지 등으로 비교적 서산-사명과의 관련도 깊은 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표충사와 해인사는 조선 후기에 비로서 커진 절들로 본래 서산-사명과의 연고도 깊지 않지만 사액 사우의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크게 중흥하게 된 곳입니다. 특히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유언으로 자신의 의발을 전수하라고 전했다는 소문만으로 서산대사의 사리와 유품을 가져오는데 성공하지만 실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표충사도 사명대사가 점시 머물었던 암자에 사당을 세운 것이 유례가 되었습니다.
표충사 안의 표충서원 건물, 해방 이후 바뀐 건물입니다.
특히 살펴보려고 하는 곳은 밀양 표충사(寺)에 있는 표충서원입니다. 본래 영정사라는 이름이었던 표충사(寺)는 병자호란 이후 인근에 사명대사가 잠시 살았던 작은 암자 자리에 세운 표충사(祠)라는 사당을 관리의 문제로 절 안으로 옮겨오면서 표충사(寺)라고 개명하였습니다. 표충사(祠)는 사명당의 5대 법손(기록에 따라서는 8대)이 밀양부사에 건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특이한 것은 표충사의 건립 과정에 승려 뿐 아니라 많은 밀양의 유생들이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유생들의 적극적인 건의로 밀양부사와 경상도관찰사는 사당을 세울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유생들의 참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직접 상소를 올려 영조 년간에는 표충사에 사액 현판이 내려졌습니다.
표충사에 대한 유생들의 적극적 참여는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표충사에 사액이 내려짐으로써 표충사는 면세와 면역의 특전을 얻게 되고, 사당을 관리하기 위한 토지와 노비도 하사받습니다. 그러나 표충사의 사액은 합천의 해인사로써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죠. 해인사는 사명당이 입적한 곳으로 부도와 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영각이라는 건물을 지어놓고 사명당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표충사가 사액이되면서 해인사의 영각이 첩설(같은 인물을 여러 서원과 사당에 모시는 것)금지 규정에 어긋나게 되어 강제 훼철될 위기에 처합니다. 이에 해인사가 표충사(祠)의 해인사 이전을 주장하게 되고 표충사(寺)와 해인사는 물리적 충돌을 비롯하여 갈등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더 큰 명분을 가지고 있던 해인사가 결국 지고, 표충사(祠)는 표충사(寺)안에 머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마 승려들만이 표충사(祠) 이전을 주장했던 해인사와는 달리, 밀양 지역 사족들의 적극적인 변호를 받은 표충사(寺)가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더 유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표충사(寺) 안의 표충사(祠)는 급기야 헌종 연간에 사액을 받고 사액서원이 됩니다. 절 안에 사액사우가 있는 곳은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와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 등 모두 3곳 입니다. 3 곳 모두 서원과 같이 원장을 두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으며, 제향의 예를 서원과 같이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러나 서원이라는 명칭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밀양의 표충서원이 유일합니다. 그러나 왜 서원이 되었는지, 그리고 표충서원의 운영이 일반 서원과 같았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현재 발표된 논문이 거의 없고, 해당 문서도 제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원과 사당으로 쓰이던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당시 사당 건물이 표충사(寺)의 중심 법당 바로 왼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격이 높았던 것 같은데, 해방 이후 부처와 승려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현재 본래의 건물에는 팔상전이 들어서있고, 서원과 사당은 남쪽으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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