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본
불교 신앙의 연속성과 변화상
석사 2 박세연
1. 머리말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연구방법은 각 시대별로 그 시대적 특징을 문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라는 틀 안에서 같은 주제를 설정하고 그 것의 연속성과 변화상에 주목한 연구는 흔치 않았다. 때문에 ‘한반도’라는 일정한 공간 안에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이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는지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에서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민족사와 일국사에 대한 해체 담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전통시대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한국사라는 개념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민족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관점을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생각이 어떻게 지속되고 변화되는가 하는 고민은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한반도 안에서 시대별로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어떻게 연속되고 변화하는지 불교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한국사 안에서의 사상의 연속성과 변화상에 대하여 시론적 글을 써보고자 한다. 불교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불교가 삼국시대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신앙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중심으로 古代와 조선시대의 불교 설화와 신앙의 양상을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변화점을 찾아볼 것이다.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의 불교에 대하여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료로써의 효용성은 의심할 바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시대 관찬 지리지로 佛宇條에서 비교적 많은 설화와 금석문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정리된 불교관련 사료가 없는 조선전기의 불교 상황을 살펴보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 동람)』은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 『동람』의 내용 중 불우 관련 기록은 『삼국유사』를 전거로 한 것이 많으나, 『삼국유사』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도 비교적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간략할 경우 『조선왕조실록』등 다른 사료를 참고하였다.
2. 『삼국유사』와 『동람』에 볼 수 있는 불교 신앙의 연속성
『삼국유사』와 『동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통된 불교 신앙의 양상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조선 世祖와 관련되는 기록들이다. 세조는 조선의 군주들 중에는 이례적으로 불교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한 왕이다. 그는 많은 불교적 祥瑞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 했을 뿐만 아니라. 行幸을 통해 중요한 사원들을 직접 방문하고 중창하였다. 그가 찾았던 사찰은 모두 고증할 수는 없지만 세조 12년 강원도 행행에서 방문했던 사찰로 유점사·낙산사·상원사 등이 확인되므로 우선 이상의 사찰들과 관련된 불교 신앙의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양양의 낙산사는 지금까지도 중요한 관음신앙의 중심이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낙산사는 의상이 당에서 돌아온 후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지은 그 말에 따라서 절이라고 한다. 이때 만든 관음보살상은 많은 신통력이 있다고 믿어진 듯하다. 신라 통일 이전부터 이어진 관음신앙과 낙산이 관음보살의 住處라는 불국토 신앙은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동람』에는 낙산사가 의상일 창건한 것이라 하여 『삼국유사』의 내용을 전거로 하고 있으며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하였다가 신축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 때문에 낙산사가 신축되었는가? 이는 세조 12년 이루어진 강원도 행행과 연결된 일이다. 세조 12년 3월에 세조는 낙산사 관음보살상에서 사리 분신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최항의 『관음현상기』에 따르면 이 때 사리 분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세조가 직접 관음보살을 목격하였다. 때문에 낙산사가 중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세조가 낙산사의 창건설화와 똑같이 관음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서 알 수 있는 한국 고대사의 불교 설화가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시대에 재현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비단 낙산사만의 일은 아니다. 오대산 상원사는 역시 세조에 의하여 중건된 사찰이다. 세조는 직접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을 내려 불제자의 이름으로 시주했을뿐만 아니라 많은 공신과 종친, 그리고 전국의 거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시주를 동참하게 하였다. 상원사의 목조문수동자상은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와 사위인 하성위 정현조가 시주하여 만든 것이다. 그런데 상원사에는 한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세조가 피부병에 걸려 상원사 근처에서 목욕을 하는데, 어린 동자승이 나타나 시중을 들게 하니 종기가 나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동자에게 옥체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자 역시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며 사라졌다고 한다.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물고 있으며 이를 친견했다는 이야기는 역시 『삼국유사』에 동일하게 전해오고 있다. 즉 자장이 중국에서 귀국할 때 꿈에서 한 스님이 나와 해동의 오대산이 1만 문수보살의 현신이 거주하는 곳이니 가서 절을 세우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淨神大王의 아들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으로 출가하여 지금의 상원사인 眞如院에서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것이다. 한 편 왕이 동자로 변한 불보살을 보고도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신라 효조왕의 이야기와 같다. 결국 세조의 문수 신앙과 상원사 중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삼국유사』의 여러 설화들과 결합되어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렇듯 불교 신앙은 고대사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같은 모습으로 신앙되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전혀지는 불교 관련 설화는 그대로 이어지기도 하고 왕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되기도 하였다. 이는 국가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종교로써의 불교는 일정 부분 같은 모습으로 신앙되었으며, 오히려 시대에 따라 그 중요도가 강조되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삼국유사』와 『동람』에 볼 수 있는 불교 신앙의 변화상
그러나 불교의 모든 면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장에서는 『삼국유사』와 『동람』에서의 불교 관련 기록의 차이점을 살펴보고 그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고찰해보겠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불국토관이다. 『삼국유사』에는 아육왕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8만4천개의 탑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고구려에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의 聖王이 국경지역을 순행하다가 탑을 하나 발견했는데, 이것이 아육왕이 세운 불탑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아육왕의 탑 중 20여개가 중국에서 있다는 논리가 연장된 것으로, 고구려의 왕이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고구려는 불국토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즉 불교가 왕권 강화를 위하여 동원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초기에 간행된 『월인석보』에 이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즉 『월인석보』권25에서 아육왕이 84000개의 불탑을 세우는 이야기가 서술되는 도중, 그에 대한 주석으로 강원도 금강산과 전라도 천관산에 아육왕의 탑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이다. 『월인석보』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약간 수정하여 합한 것으로, 『석보상절』의 落卷이 워낙 많아 완전히 알 수는 없으나 아육왕의 탑과 관련된 이야기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석보상절』은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직접 찬술하여 바친 것이며, 『월인석보』 역시 세조가 직접 언해한 것이다. 즉 전거를 알 수 없는 금강산과 천관산의 아육왕탑에 대한 기록은 세조가 직접 관여하여 넣은 것으로 그 정치적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초기의 불국토관은 여기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기거하는 보살주처로 신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낙산 역시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금강산의 경우 『화엄경』에 등장하는 담무갈보살이 머무는 금강산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려 태조가 금강산을 방문하였을때 담무갈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이 만들어졌으며 이 전설은 『동람』에도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세조 12년의 금강산 행행에서 세조는 직접 담무갈보살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賴永의 使者 중 守藺이 돌아갔다. 임금이 日本國王에게 글을 부쳤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중략) 우리나라에 名山이 있어서 金剛山이라 하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여 우뚝하게 깎여서 희고, 金이 구름 밖에 솟아올라 높고 넓어서 里數가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니, 華嚴經에 이른 바, 曇無竭菩薩이 그 1만 2천 보살의 眷屬과 더불어 상시로 머물면서 說法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산입니다. 요즘 내가 지방을 순행하고 인하여 이 산에 나아가서 三寶에 瞻禮하였는데, 산기슭에 이르지 못하여 땅이 진동하고, 洞門에 들어가자 瑞氣가 뻗치고 상서로운 구름이 둘렸으며, 四花가 내려서 크기가 오동잎과 같고, 甘露가 뿌려서 草木이 목욕한 것 같았으며, 햇빛이 누래서 눈에 보이는 곳이 모두 금빛을 이루었는데, 이상한 향기가 퍼지고 큰 광명한 빛이 발하여 산과 골짜기가 빛나며, 仙鶴이 쌍으로 날아 구름 가에 돌고 산중의 여러 절에 사리(舍利)가 分身하여 오색 빛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明揚勝會를 열자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기이한 상서가 거듭 나타나고, 또 담무갈보살이 무수한 小相을 나타내었다가 大相을 나타내어 그 길이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중략) 예전에 부처가 滅度 한 뒤로 王舍城 사람이 금을 모아 佛像을 만들고, 文殊菩薩이 53軀를 金鍾에 간직하여 바다를 바라보고 맹세하기를, ‘마땅히 인연이 있는 국토에 가서 衆生을 濟度하면 내가 모름지기 그곳에 이르러서 길이 擁護하겠다.’고 하자, 이에 금종이 우리나라에 떠 와서 산 동쪽에 스스로 머물렀습니다. 新羅王이 인하여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이름을 楡岾寺라고 하였는데, 산 안팎에 伽藍이 얼마인지는 알지 못하나 유점사가 가장 좋은 곳입니다. (하략) ”
이는 불·보살이 해동에 거처하고 있다는 불국토 인식을 직접적으로 왕의 권위와 연결시킨 것이다.
그런데 『동람』에는 이런 내용들이 모두 사려지거나 부정되고 있다. 회양도호부편의 산천조에는 금강산에 부처가 머물러 있고, 문수보살이 불상을 보냈다는 내용이 최해와 하륜의 글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장흥도보후편의 산천조에는 아예 어떠한 설명도 되어 있지 않다. 즉 세조대에 걸쳐 왕이 직접 만들었던 불국토관이 『동람』단계에서는 부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미륵신앙에 관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륵신앙은 한국고대사에서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삼국유사』에는 상당한 양의 미륵신앙 관련 기사들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법상종의 비조라고 일컬어지는 진표와 관련된 기록들이다. 진표는 당에 유학하여 金山寺의 崇濟 밑에서 공부하다가 신라로 돌아와 고행 끝에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점찰경 2권과 簡子 178개를 얻었다. 그 후 금산사와 법주사(길상사)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동람』의 기록은 이와는 좀 다르다. 먼저 법주사의 경우 아예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삭제되어 있다. 금산사의 경우 아예 창건시대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佛宇에 대한 기록은 상당부분 『삼국유사』를 차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륵신앙과 관련된 중요한 두 사찰의 창건 기록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익산의 미륵사에 대한 창건설화는 삼국유사와 큰 차이가 없이 기록되어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하건데 이는 전자와 후자의 위상이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익산의 미륵사는 조선전기에 이르러는 그 사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금산사와 법주사는 조선시대에 여전히 대단히 큰 사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법주사는 세조가 온양 행행을 하면서 들렸던 곳이고, 법주사의 말사인 복천사는 세조대 가장 영향력 있는 승려인 학열·학조 등의 부도가 있는 곳으로 이들과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동람』이 편찬되던 시기 미륵사는 큰 영향력이 없는 사찰이었던 반면, 금산사·법주사는 정치적 영향력까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세조대 불교의 부흥을 겪어봤던 『동람』의 편찬자들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찰과 그렇지 않은 사찰을 같이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같은 미륵신앙에 기반한 사찰이라도 다른 서술방향으로 서술된 것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했지만 『동람』편찬자들은 세조대의 불교 중흥을 목격한 이들이다. 성리학을 단순한 정치운영론의 차원을 넘어 백성의 생활까지 재구성하는 불교를 대신할 사상으로 성장시키고자 했던 儒臣들로서는 世祖가 불교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바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 중흥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불국토관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국 지리지인 『동람』에서 세조에 만들어졌던 여러 가지 이미지와 상징이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이다.
한국의 미륵신앙은 불교의 구세관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본래 미륵불은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부처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미륵은 통일신라 말기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나타나는 末法시대의 구원자이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미륵신앙이 대단히 위험한 사상으로 낙인찍힐 수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교정치가 더욱 강화되던 성종대에 세조대에 큰 권한을 가졌던 사찰들이 민중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미륵신앙과 관련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4. 결론
불교가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전래된 이래 그 신앙적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문수신앙·관음신앙 등은 그 態를 바꾸지 않고 조선전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시대의 필요에 따라 확대되어 재생산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반도라는 문화권 안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그만큼 강력하게 영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시대 안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점은 바로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며, 따라서 전통시대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바꾸려는 시도는 儒臣들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선별적으로 수용하는데 이르렀던 것이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하나의 종교나 사상이라는 것은 굴절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라도 그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곧 한국사에서의 시대적 특징과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람』의 불우조에서 알 수 있듯이 몇몇 첨삭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불교가 신앙 형태는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삼국유사』와 『동람』을 비교·검토한다는 것은 결국 한국사에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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