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溟堂 惟政과 日本
한국사학과 조선후기 석사 1
박세연
1. 문제제기2. 사명당 유정과 임진왜란 1) 출생과 승려로서의 삶 2)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3. 사명당 유정의 일본 使行 1) 유정의 史臣 差出 2) 일본에서의 활동 3) 유정의 對日 인식4. 사명당 유정의 역사적 위치5. 맺음말
1. 문제제기
불교는 동아시아사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사상사적으로도 그 영향이 막대할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사의 영역에서도 반드시 다루어지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전반적으로 13~14세기에 그 융성의 정점을 다하고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를 기점으로 점차 쇠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의 명, 한국의 조선,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가 여기에 속한다. 이 이유는 중국 남송에서 주희가 유교의 사상적 전환을 이루어 성리학을 탄생시키면서, 기존까지 유교가 설명하지 못했던 정신, 죽음의 영역을 설명할 수 있게 되고, 결국 불교의 영역에 침투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학이 陰陽家의 영역과 결합되면서 性과 理, 魂과 魄을 이야기하게 되고, 사상의 영역을 넘어 종교의 영역을 설명하게 되면서 불교의 영역을 크게 침범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비대해진 불교의 힘을 경계한 새로운 지배계층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의 위축은 조선에서 특히 심했다. 조선전기에 조정은 여러 번 불교 종파를 통폐합하고, 30여개 남짓한 사찰만은 공인하며, 이 외 사찰의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고, 승려의 도성 출입을 막는 등, 崇儒抑佛이라는 원칙 하에 사상의 중심을 재편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빼앗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기반으로 삼았다. 물론 국왕이나 왕실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앙하기도 하였고, 왕실과 관련된 부분에서 예외적으로 사찰이 창건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중종 때까지 불교에 대한 억제의 기조는 계속된다. 다만 예외적으로 明宗 즉위 초반, 즉 文定王后의 수렴첨정기간에 대대적인 崇佛 정책이 시행되는데, 비록 문정왕후의 죽음 직후 대대적인 유림의 복수가 이어진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전기와 같은 노골적인 억불책이 그리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불교의 대대적인 부흥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사료와 현상들을 살펴볼 때 불교가 체제내화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임진왜란 직후에서 정조에 이르는 시기에는 여러 가지 불사가 활발하게 이어지는데, 특히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전통사찰의 80% 이상은 임진왜란 직후에서 18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肅宗 年間에 중건되었다는 사실은, 임진왜란 후 조선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첫째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승병이 있다. 국가가 위태롭고, 백성들이 국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절대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승병의 활약은 의병 활동을 이끌어내기도 하였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때문에 종전 후 승직이 복설되고, 불교가 비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동시에, 불교 사원의 중건과 재산 소유가 가능해졌다. 한 편으로 중앙 정부는 승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어, 산성의 築城과 守城,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의 관리 등에 승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심지어 비변사에서 산성을 축성할 때 주변에 사찰이 있는지 살피고, 없으면 새로 세우거나 옮겨올 것을 건의하고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꼽으라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이라고 할 수 있다. 휴정과 유정은 임진왜랑 당시 가장 활약한 의병장일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에서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또한 이들은 조선에서는 유일하게 유림들이 자진하여 사당을 세워준 유일한 승려이다. 특히 사명당 유정은 승려, 군사지도자 외에 외교 전문가로서 활약한 모습이 보인다. 그는 명나라의 심유경이 담당한 고시니 유키나카(小西行長)과의 연락선과 함께 임진왜란기 양대 연락창구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연락창구를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일본과의 연락창구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최초로 조정의 명을 받고 일본에 파견되어 전후처리 문제를 협의한 사신으로 활동하였다. 임진왜란 전후, 이미 고령이기 때문에 산으로 돌아가 곧 입적한 휴정과는 반대로 유정은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게다가 조선을 통틀어 유일한 승려신분의 사신이었고, 또 전후처리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명당 유정은 이처럼 불교승려, 군사지도자, 외교전문가라는 세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진 시대가 낳은 특이한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승병장 활동과 일본 사행 활동을 살펴보면 기존의 연구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방면에서의 조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사명당 유정을 호국, 구국의 인물로만 평가하면서, 그가 가지는 다양한 시대적 의미를 놓쳐왔었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사명당 유정의 임진왜란과 그 이후 외교가로써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그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유정이 일본인들과 접촉하면서 때 불교승려로서, 그리고 조정의 명을 받은 사신으로서 일본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와 균열, 그리고 조선의 중앙정부와 지배계층이 그를 대하는 태도의 딜레마를 포착해 낸다면, 지금까지 호국의 인물로만 단석적으로 평가되었던 사명당 유정의 삶과 고민, 그리고 그자 차지하는 역사를 위치를 다른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사명당 유정과 임진왜란
1) 출생과 승려로서의 삶
사명당 유정의 속성은 임, 속명은 응규이며, 본관은 풍천이다. 법명은 유정, 법호는 사명, 송운 시호는 자통홍제존자으로 1544년(명종 9) 태어나 1610년(광해군 2) 입적하였다. 고향은 밀양으로, 대체적으로 조부 대에 밀양에 입향하여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조상에 대한 정확학 상고는 현재의 『풍천임씨세보』상으로도 불가능하나, 그의 집안이 사대부의 집안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14세에 부모를 모두 잃고 16~17세의 나이에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에서 출가했는데, 출가의 이유는 집안이 쇠잔하였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어 경제적 어려움이 출가의 이유 중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정확한 사실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증조부가 연산군의 총신이자, 중종반정의 주요 제거대상 중 하나인 임사홍과 사촌지간이라는 연구가 있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조실부모한 유정에게는 출사의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생계를 잇기 위해 출가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8세에 승과 선과에 입격하였으며 그 후로 30세에 이르기까지 봉은사에 머물렀는데, 이 때 동갑인 승려들과 함께 만든 계의 기록이 지금도 전해진다. 그는 임제, 허균, 이산해, 박순 등 유명한 유학자들과 교류하기도 하였고, 조선시대 선종의 중심사찰인 봉은사의 주지가 되는 등, 불교계의 기대 받는 재목으로 떠올랐다. 그러던 중 봉은사 주지의 직을 버리고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가 선종의 대선사인 서산대사 휴정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3년의 공부를 마친 후 여러 곳을 떠돌며 문하생 배출과 불사 등을 추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몇 년 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다가 스승 휴정과 함께 정인홍의 역모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에 연루되기도 하였으나, 강릉 유림들의 탄원으로 곧 풀려나기도 하였다. 그 후 유정은 잠시 금강산에 들어가 쉬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그의 나이 49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2)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유정과 왜군의 첫 조우는 금강산 유점사에서였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내려오는데, 대략 유점사에 왜군이 들어와 재물을 내놓으라 요구하자, 이 소식을 들은 유정이 유점사로 내려와 왜장과 필담을 나누고 꾸짖어 물러가게 했으며, 왜장이 탄복하여 앞으로 유점사를 범하지 말 것을 적어 일주문 앞에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고성의 건봉사에서 유정은 처음 의승군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유성룡이 지은 격문과 더불어 이미 승병을 일으킨 스승 서산대사의 통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휴정은 선조의 명을 받들어 전국의 승려들에게 궐기를 촉구했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의 자리에 올라 이들을 통솔하며 함락된 평양 근처에서 탈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유정은 승려 200여명을 모아 스승이 있는 곳으로 출발하였는데, 점차 인원이 늘어 평양 인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유정 외에도 전국에서 많은 의승군이 일어났는데, 공주 청련사에서 일어나 청주를 수복했던 영규와, 해남 대흥사에서 일어나 권율과 합류해 행주대첩을 치룬 처영이 대표적이다. 이들 승병은 주로 산에 머물렀던 경험을 토대로 게릴라전을 능숙히 치러 내어 많은 공을 세웠다.
상이 분부하기를, “승장(僧將) 유정(惟政)의 군사들이 매우 정예로와서 왜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여러번 세웠는데, 군직(軍職)을 주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닌 듯하다. 그는 방외(方外)1693) 의 사람이니, 파격적으로 특별히 상을 내려 훗날의 공효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정에게는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의 직을 제수하여 원근에 있는 승려들의 마음을 분발시키라. 만약 승려들이 곳곳에서 적을 벤다면 이 또한 일조(一助)가 될 것이다.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비변사가 그대로 파격적으로 당상관에 제수할 것을 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에서 무사(武士)를 배양해서 반질(班秩)을 높여주고 후하게 녹봉을 주어서 아끼지 않고 대우했는데도 강적이 충돌해 온 때를 당하여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은 정신이 아득하여 두려움에 떤 것은 물론 구구한 참획(斬獲)의 공도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으니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
평양에 도착한 사명은 승병 야전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의승도대장의 자리에 올라 명나라 조승훈, 조선의 도원서 김명원과 함께 평양성 탈환을 위해 복무한다. 그리하여 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의 군대 4만여명과 조선군 1만여명이 연합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조선군 중 절반에 해당하는 5천명이 바로 유정이 통솔하는 승병이었다. 그 후 유정은 남하하여 한양수복의 중요한 기점이 되는 수락산대첩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이 공으로 당상관에 제수된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한양 수복전투에도 함께하였으며, 그 후에는 명나라 도독 劉綎과 함께 영남으로 내려가 남은 왜군을 소탕하였다.
한양 수복을 즈음하여 명과 일본 사이에는 강화를 위한 물밑 교섭이 분주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교섭은 조선을 완전히 배제한 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작 강화의 당사자인 조선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였다. 때마침 명군의 도독 劉綎이 유정에게 당시 서생포왜성에 틀어박혀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가서 강화를 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을 것을 명령하는데, 유정은 3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사마와 회담을 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이 명에 제시한 강화 조건을 알아내어 조정에 알릴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서 후일 임진왜란 종전 후 유정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때 독실한 불교 신자인 가토 기요사마와 그 통역을 했던 일련종의 승려 日眞에게 법어를 써주며 종교적인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전쟁과 강화라는 상황에서는 첨예하기 대립하였으나, 종교적으로는 유정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치계하였다. (중략) “그리고 청정이 독부(督府)에 답한 편지에 ‘대명국(大明國) 유 도독부(劉都督府)께서 금강산(金剛山)의 대선사(大禪師)로 하여금 왕림하게 하였으니 한없이 기쁘다. 그리고 보내온 편지에 「유시(有始) 유종(有終)케 하라. 」한 훌륭한 말에 우리들은 한마음으로 기뻐할 뿐이다. 이제부터는 흉금을 남김없이 터놓고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 옛 선불(禪佛) 같은 분과 금석(金石)같은 교계(交契)를 맺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일이 정해진 뒤에 송운이 가서 하는 말이 있을 것이다. 조람(照覽)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서생포 왜성에서의 회담 이후 유정은 가토 측과의 연락을 전담하게 된다. 당시 오래되는 전쟁에 지친 일본과, 하루바삐 전쟁을 종결시켜야 하는 명에서는 비밀리에 강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명에서는 심유경이 일본에서는 고시니 유키나가가 강화 회담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군의 선봉장이자 고시니와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가토 측에는 어떠한 정보도 제공되지 않았다. 이러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어 유정과 가토를 서로를 경계하는 가운데도 회담을 유지한다. 이 때 유정의 승려라는 신분은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임진왜란 시 일본군에도 많은 승려가 들어와 있었는데, 승려는 문자는 알기 때문에 문관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유정은 이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가토와 만나지 못하더라도 상당한 정보를 듣거나 협상을 할 수 있었다. 또 가토 개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가토 측은 유정을 대단히 신뢰했는데, 유정이 승병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와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 편 유정은 승려라는 자신의 신분을 십분 활용하여 왕자가 일본으로 와 관백(도요토미 히데오시)에게 사례를 올리라는 일본의 강화 조건에 대하여 협상은 진행하면서 문서의 작성과 날인은 관직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등의 수완을 발휘하였다.
서생포 왜성에서의 회담과 여러 번의 정탐을 통해 유정은 일본에 대한 전문가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실록을 보면 일본군 동향에 대한 보고는 거의 유정이 한 회담의 내용을 都元帥 권율이 조정에 장계로 올리는 형식으로 되어있으며, 유정이 직접 상소를 올리는 경우도 많다. 그에게 일본의 동향을 묻기 위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 차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양방형은 일부러 유정을 만나러 오기도 하였다. 제독 劉綎 역시 그의 명성을 듣고 유정을 불러 보았다 도체찰사 유성룡 역시 그와 더불어 시사를 의논하였다. 유정은 왜군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정유재란을 예견하기도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정이 일개 중으로서 동반(東班)의 관직을 제수받기까지 하였으니 관작의 외람함이 심하도다. 그가 말재주가 조금 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적의 소굴에 들여보내어 적정(賊情)을 정탐하여 오게 하였는데, 이번에 갔다 와서는 이내 적을 토벌해야 하는 의리를 개진한 것은 흉적의 정상을 자세히 알았기 때문인 것이다. 난리를 겪은 이래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위축되어 더러는 강화의 의논을 빌어 기미책(羈縻策)을 꾀하고 더러는 훈련을 핑계하여 뒷날 도모하자고 하는 등 구차스레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6년이 벌써 지났는데, 한 사람도 의리에 의거하여 진취(進取)하려는 계획을 바쳤던 자는 없었다. 유정의 상소는 말이 조리가 있고 의리가 발라서 당시의 병통을 적중시켰으니 육식자(肉食者)들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었겠는가. 이 때문에 특별히 기록한 것이니 이는 그가 중이라고 해서 그 말까지도 폐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이다.
실록에 있는 위 기록은 유정에 대한 당시 지배층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東班은 문관의 벼슬을 말하는데, 당시 승려들이 戰功을 세워 받은 품계는 주로 西班, 즉 무신의 품계일 경우가 많았다. 선조 이후 僧職의 설치 자체가 승려들을 승병으로 재편성 하는 목적이 강하게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정은 파격적으로 문관의 벼슬과 품계를 받았는데,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賤人인 승려가 문관의 벼슬을 받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무능을 드러냄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위 자료에도 나타나듯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상대하는 자는 유정이었고, 그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딜레마가 위 자료에서 잘 보이고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과 유정에 대한 평가가 이와 같았기에 결국 승려인 유정이 전후문제 처리를 위한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 외교사상 가장 이래적인 사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사명당 유정의 일본 사행
1)유정의 使臣 差出
임진왜란 종전 후 유정은 잠시 안동, 원주 등에서 머물다가 곧 승병을 통솔하여 釜山城의 축성을 총괄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도성의 궁궐과 종묘, 사직이 모두 불탔음은 물론이고, 4대 史庫에 보관중인 실록 중 3부가 소실되어 나라의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또 국가 재정의 기초자료인 量案과 戶籍이 모두 불타 재정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일본으로 많은 포로들이 끌려가 농업, 공업 생산에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으로써 도요토미가가 몰락하고 도쿠가와가에 의한 에도막부시대가 열리게 된다. 권력을 잡고 정이대장군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은 임진왜란을 통해 단절된 중국,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할 필요성을 느끼고 1602년에는 조선에 통신사 요청을, 1603년에는 명에 화친 요청을 하게 된다. 특히 조선에는 만약 강화를 하지 않으면 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위협까지 해오며 강력하게 관계 회복을 주문하였다. 도쿠가와가 조선, 명과의 외교관계 복원을 꾀한 이유는, 주로 교역에 있었다. 특히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급하게 추진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평소에 명보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과 더 많은 교역을 했음을 물론, 명과 직접 교섭할 경우 스스로 天子國으로 자처하고 있는 일본의 외교적 입지가 명과 마찰을 겪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후기, 일본이 은의 해외 유출을 막을 때까지 조선은 일본이 필요한 외국의 물자를 들여올 수 있는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과의 무역에 사활을 걸고 있던 쓰시마번에게는 조선과의 관계회복이 절실한 문제였다. 명은 對馬 및 일본과의 交隣 문제를 조선에 위임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일본과의 문제에서 빠지려 하였다. 조선은 포로송환문제 등 전후처리가 시급했고, 또 대마도와 일본 본토의 사정을 살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강화 사신 파견에 동의하였다. 문제는 누구를 파견하냐는 것이었는데, 비변사에서는 유정을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경상등도 체찰사(慶尙等道體察使) 이덕형이 아뢰기를, “귤지정이 지금 이미 돌아갔으니, 내년 정월 사이에 대마도에 인마(人馬)를 보내어 정탐할 일로 전일 계하(啓下)하여 신에게 이문(移文)하여 왔습니다. 이 일은 기관(機關)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니 차임하여 보내는 사람을 모름지기 잘 가려 들여보내야 노적(老賊)에게 속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유정(惟政)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데 유정은 왜인이 이름을 아는 승려이니 지금 갑자기 들여보내면 뒤에 빙거하여 계책을 세울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존중을 받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영리한 승려로 하여금 유정의 사리(闍梨)라고 하여 유정의 사서(私書)를 가지고 가서, 유정이 바야흐로 만 군문(萬軍門)의 아문(衙門)에 있으면서 이 서신을 만들었다고 핑계하여 말하게 하고, 배첩(拜帖)·부계(副啓)를 담은 함(凾)의 안팎을 중국의 간지(簡紙)를 사용하고 겸하여 사구(辭句)를 만들어 ‘유정이 동쪽으로 가 반드시 평조신과 서로 모여 강화(講話)하겠다.’ 한다면 노적이 혹 그럴 듯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험하여 그 의도를 맞추어 주고 중국의 위관(委官)이 혹시 다시 나오면 또 다소 기미책(羈縻策)이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1, 2년 물려져서 우리가 스스로 조용히 정약(定約)할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습니다. 다만 우리 형세가 바야흐로 다급하여 근심스러운 기회가 박두해 있으니, 책응(策應)하는 즈음에 조금만 착오가 있어도 적이 화심(禍心)을 내부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이번 걸음에 평조신이 우리의 계책을 경청(傾聽)하게 한 뒤에야 다른 날 다시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번 걸음에 잘 조처하지 못하여 평조신이 절발(竊發)하여 으르고 위협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이 한 뒤에 우리가 비로소 부득이 화약(和約)을 한다면 일이 더욱 난처하게 되어 도리어 이때 하는 것만 못하게 됩니다. 그 사이의 득실과 이해는 오직 차견(差遺)한 사람의 능불능(能不能)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이 일찍이 남방에 있을 적에 유정이 거느리는 휘하의 여러 승려 가운데 유심(留心)하여 간택해 보았으나 마침내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군관이나 무사 중에 여러 방법으로 시험해 보았더니, 오직 동래 소모진(東萊召募陣)의 천총(千摠) 전계신(全繼信), 통영 군관(統營軍官) 김시약(金時若)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듯하였습니다. 일찍이 귤지정의 얼굴을 알고 있고 말씨도 가볍지 아니한 면에서는 전계신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유정의 서신을 가지고 가서 평조신에게 전달하되, 유정이 청정(淸正) 때부터 화의를 주장하였고 방금 군문(軍門)의 표하(標下)에 있으면서 모의에 참여하고 있으며 도덕과 식견이 매우 높다는 상황을 성대히 칭찬하게 하여 모든 일을 유정에게 미룸으로써 후일 서로 접촉하게 하는 소지로 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를 비변사로 하여금 익히 생각하게 하여 일이 행할 만한 것이면 속히 조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유정(惟政)이 왕년에 여러 차례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陣) 속에 드나들어 청정과 문답할 때에 큰 소리를 치며 굴하지 않았는데, 청정이 이를 매우 좋게 여겨 매양 유정의 사람됨을 일본인에게 칭찬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탈출해 온 사람들이 많이 말하기를 ‘왜인들이 송운(松雲)의 이름을 전해가며 칭찬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초에 휴정(休靜)을 시켜 통서(通書)하게 했던 것은 다만 훗날 유정으로 하여금 왕래하게 하는 장본을 삼고자 해서였습니다. 이번에 유정이 바다를 건너가면 당연히 고승(高僧)으로 지목되어 왜인들이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저 귤지정(橘智正)이야말로 대마도(對馬島)의 보통 왜일 뿐인데 유정 스스로가 가볍게 처신하여 내려가 서로 보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할 듯도 싶습니다. 지난번에 왜인이 유정에게 글을 보냈을 때에도 멀리 산 속에 있다고 하면서 즉시 답서(答書)하지 않았으니, 즉시 유정으로 하여금 귤지정에게 보내는 글 1통을 만들도록 하여 생각과 요량이 있는 사리(闍梨)를 시켜 귤지정에게 전해 주게 하면서 개유(開諭)하기를 ‘내가 오래지 않아 바다를 건너가서 보진대사(保眞大師)의 뜻이 끝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 네가 어찌 꼭 손문욱(孫文彧)이 돌아온 다음에 돌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면 일본 소식을 먼저 노사(老師)에게 말해서 알려야 하겠다.’라고 한다면 귤지정이 필시 기뻐하며 다행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와 강화(講和)하는 것만도 이미 수치스러운 일인데, 또 일개 사문(沙門)의 힘을 빌려 일을 이루려고 하다니, 육식자(肉食者)의 꾀가 비루하다 하겠다.
위의 두 자료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유정의 차출은 이덕형 등에 의하여 추천되었고, 비변사가 이를 적극 검토하여 결정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일본에 가길 겁내거나 사적인 문제로 거부하였기에 유정이 부득이하게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록을 살펴본 바로는 그는 맞지 않는 이야기인 듯하다. 그가 승병으로 있으면서 일찍부터 화의를 주장하였고, 또 가토와 접촉하면서 일본인들과 협상해본 경험이 있고, 일본 사정에 밝으며, 일본인들이 불교를 숭상하기 때문에 승려의 신분이 유리할 것이기 때문에 유정이 사신으로 결정된 것이다. 더불어 명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가는 것이었이었으며, 강화의 목적보다도 대마도와 일본의 사정을 염탐하는 것이 더욱 큰 목적이었기 때문에 조정의 관료를 보내기에는 곤란함이 있었다. 때문에 승려인 유정을 보내고, 만일 양국간이나 명과 문제가 생기면 이를 유정 개인의 사적인 일로 축소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사실상 유정에게 일본과의 회담을 전적으로 위임한 것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와 직접 만나 강화 조건 등을 합의하고 포로를 돌려준 것으로 보아, 그의 사행은 비공식적이면서 공식적인 이중적 성격을 지니는 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정은 1604년 여름, 스승 서산대사의 부고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조정의 명을 받고 일본에 강화사로 가기 위해 동래로 향한다. 그리고 8월에 마침내 일본 관료를 만나 바다를 건너게 된다.
2)일본에서의 활동
유정과 같이 일본으로 간 이는 裨將 손문욱과 역관 김효순, 박대근, 그리고 몇 명의 승려였다. 손문욱은 일찍이 유정의 이름으로 된 서신을 가지고 일본에 왕래한 경험이 있는 자였다. 이들은 일본 측의 접빈사 귤지정의 안내로 대마도로 건너갔다. 유정의 일본행에 대한 비변사의 보고에 선조는
국사를 위해 해도(海島)로 들어가게 되니 일행의 행장을 넉넉하게 제급하라. 전일 일본에 들어갈 적에는 내려준 물건들이 매우 많았었다. 그때의 행차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일본까지 가는 것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모든 일을 잘 참작해서 하라. 그리고 제급하는 물건과 지시하는 사항을 되도록 주밀하고 구비하게 해야 한다.
라고 하교하여 유정에 대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유정은 대마도에서 약 4개월동안 머물렀다. 본래 유정의 공식 임무는 대마도주를 開諭하는 것이어서, 예조의 서계를 지니고 대마도주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정작 일본 본토에 가서 도쿠가와를 만나는 것은 임무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어느 정도 유정의 쿄토행을 예상하고 있었다. 유정이 대마도주를 만나 전한 것은 본토와의 강화는 뒤로 미루고, 단지 대마도에 대해서만 화해하며, 개시를 허용한다는 내용과 대마도에 있는 포로를 쇄환하라는 내용의 서계였다. 그러나 애초에 일본 본토와 관계없이 대마도와만 許和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대마도주 역시 이를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막부의 장군에게 내용을 아뢰고, 그 소식을 기다리겠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서 이 서계는 유정이 자연스럽게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명목을 만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 해 12월, 유정은 대마도주와 함께 배를 타고 오사카로 가서, 다시 쿄토에 도착하였다. 다음해 3월 마침내 쿄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만남을 가진다.
도쿠가와와의 회담 내용은 현재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회담의 결과로 그 내용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사명당대사집』이나『분충난서록』, 혹은 일본 측의 자료에 부분적으로 실려 있는 기사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정이 도착하고도 약 2달 후에 쿄토로 들어왔다. 도쿠가와는 유정에게 군대를 보여주며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자신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적이 없으며, 조선과 원수진 일이 없으니, 조선과 화평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일본 측이 이렇게 通好하고자 하는 뜻을 확고히 하자, 유정은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였고, 도쿠가와가 여기에 협조할 의사를 보인 것으로 보인다. 이 회담을 마친 후, 도쿠가와는 사실상 조선과 강화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대마도주와 유정 등에게 많은 상과 선물을 내린다. 이 회담의 결과로 송환된 포로의 수는 『선조실록』에는 1390명, 『선조수정실록』,『석장비문』에는 3500여명으로 실려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회담이 끝난 후 유정은 주로 일본의 승려들과 시간을 보내고, 많은 일본의 사찰들을 유람하였다. 또 일본 지식인들과 만나 유교와 불교의 사상을 논하기도 하였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고승으로 생각하며 만나길 원했으며, 그림에 讚文을 받거나, 그의 글씨를 받기를 원했는데, 지금도 일본에는 유정의 필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유정이 일본의 사상계에 획기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었겠지만, 스승 서산대사의 저서인 『선가귀감』이 전해져 일본에서 출판이 된 사실이나, 일본 유학자들, 승려들의 문집에 그와의 대화 내용이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이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정은 5월 대마도주가 모아 준 포로들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때 가져온 대마도주의 서계는 다음과 같다.
평의지(平義智)가 올린 답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대마도 태수 평의지는 조선국 예조 대인(禮曹大人) 합하께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 지난 가을 절충 장군(折衝將軍) 손(孫)을 차임하여 바다를 건너 보내 화평을 허락해 우호를 다지게 하였으니, 매우 감격스러운 일이었으며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섬과만 강화를 허락하고 본국과는 불화를 계속한다면 뒷날 방해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조신(調信)이 합하의 편지를 가지고 우리 우부(右府)의 가강(家康)에게 한번 열람하게 하였더니, 우부가 조신에게 명하기를 ‘조선에게 말한 바는 모두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속히 사절(使節)을 인도해서 오게 한다면 내 직접 만나서 우리의 성심을 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장군(將軍)과 송운 대사(松雲大師)에게 선사(先師) 보제 대사(普濟大師)의 유촉(遺囑)을 받아 왕경(王京)으로 가서 우부의 말을 함께 듣고 돌아오게 하였는데, 귤지정(橘智正)을 보내 길을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귀국에서 강화를 맺는 증험을 보이신다면 양국이 큰 다행이 될 것은 물론 만민(萬民)의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나머지는 장군과 대사가 아뢸 것입니다. 황공하게 머리 조아려 삼가 올립니다.”
조선에서는 이 서계를 통해 사실상 일본과의 강화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일본에 공식적으로 國書와 왕릉을 범한 죄인의 목을 요구하고, 이에 국서와 왕릉을 범한 죄인들이 도착하자 최초의 공식 통신사를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파견한다. 유정의 사행은 비록 공식적인 사행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조일외교관계의 물꼬를 튼 공식적 사행과 같은 것이었다.
3)유정의 對日 인식
아! 늙어 버린 나는 장부가 못되는데
공손히 조정의 명을 받들어 멀리 뗏목타고 나갔다.
허리를 굳혀 잠깐 기미책을 세웠으나
어느 해 병사를 모아 오(일본)를 연못으로 만들까.
老去嗟吾不丈夫 恭承朝命遠乘桴
折腰暫遂覊縻計 生聚何年定沼吳
위의 시는 유정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 대마도의 객관에서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는 그의 일본 사행에 대한 감회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원수인 일본에게 잠시 허리를 굽혀 기미책을 세워야하는 것에 대한 한탄, 그리고 일본에 대한 복수 등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 조선을 생지옥으로 만든 일본에 대한 분노는, 승병장의 한 사람이었던 사명에게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의 대일인식의 사상적 기반이다. 기존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유정의 일본 사행의 사상적 기반을 호국에의 의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 등으로 해석해왔다. 그러한 연구가 護國佛敎라는 외피를 쓰고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유정에 대한 유교적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즉 조선후기 유정의 행동을 유교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기념하고자 했던 유학자들의 설명과 다른 부분이 없는 것이다. 물론『사명당대사집』이나 실록에서 보이는 유정의 글에 유교적 표현이 자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첫째, 임금에게 올리는 글일 경우 당연히 불교적 표현을 쓸 수 없으며, 둘째, 그의 출신 성분이 사대부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교적 표현에 익숙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승려 유정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그에 대한 현창 사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18세기의 지방사회의 분위기는 지역, 혹은 문중과 작은 연관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무조건 유교적 가치를 부여하였는데, 그 것은 바로 지역, 혹은 문중의 이권, 위상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직후 정부의 회유에 따라 환속하여 벼슬을 살았던 승려들이 대단히 많은 가운데서 그들을 질책하며 승려로서의 신분을 지켰던 이가 유정이었다. 그가 승병장으로 활동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길렀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의 모든 행동을 忠으로써 해석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그리고 그에 대한 현창 작업이 이루어진 18세기 이후 조선사회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최근에는 유정의 저작들, 특히 종교관련 저작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적 면모를 부각시키면서, 그의 승병 활동과, 일본행을 모두 그의 대승의식, 보살행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그의 일본사행은 더 이상의 전쟁을 막고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구해오기 위한 것으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중생의 구제라는 불교적 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기존의 승려 유정의 모습을 부각시키지 못했던 연구를 뛰어넘어 사상사적으로 一進展을 이루어낸 연구라고는 할 수 있다.
실제 사명은 일본 사행에서 많은 승려들을 만났는데, 나라를 넘어 한 명의 승려로써 교류한 내용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禪宗이 불교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던 일본에서 같은 선종 승려의 입장으로 조언을 하거나 대담을 했던 내용이 『사명당대장집』에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도쿠가와와의 회담이 성사된 직후, 도쿠가와의 측근 중의 하나이면서, 일본 선종의 대표적인 고승인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가 열어준 녹원원 법회에서 그들과 자신이 동일한 종파에 속해 있으며 모두 임제선사의 제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서소승태와의 불교적 교유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정은 조정의 신하로 일본에 왔지만, 스스로 선종의 승려임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인식 체계에 불교가 당연히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역시 이념적인 해석에 몰두하여 유정을 둘러싼 정치사적 해석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앞서 전쟁 이전 유정의 삶에서도 보았듯이, 이 시기는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숭불정책에 대한 역풍이 불교계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전쟁이 나자,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이라 할 수 있는 서산은 적극적으로 승병을 모집하고, 서산계열의 승려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서산과 쌍벽을 이루던 당대의 고승이던 부휴는 승려의 전쟁 참여를 비판하며 산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전쟁 이후 불교계를 바라보는 중앙정부의 시각 변화나 불교계가 서산계열로 재편되는 것 등을 본다면, 승병이 정치적 고려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이념적 산물이라는 해석은 문제가 있다. 결국 그의 對日 인식의 사상적 기반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명확히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유정에 대한 신화화를 계속하기 보다는 그가 내렸던 정치적인 판단에 대해서 좀 더 고려될 필요성이 있다.
4. 사명당 유정의 역사적 위치
그렇다면 사명당이 차지하는 특수한 역사적 위치는 무엇인가? 우선 그는 승려로써 조선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특히 단순히 조선 중앙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던 것이 아니라, 불교의 승려라는 자신의 환경을 이용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가 더 크다. 단순한 양반 사족들의 기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사정과 성향을 충분히 고려하여 그를 비공식적 사신으로 일본으로 파견하였다는 것은 조선이라는 더 없이 이상 지향적인 국가가 전후 민감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하고 하겠다. 즉 조선이 원수에게 먼저 강화를 요청할 수 없다는 명분과 포로 송환 및 강화의 필요성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성리학적 질서 바깥에 있었던 유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도 강력하게 사대교린의 명분을 고집하며 번번이 마찰을 빚었던 예조의 관원들보다는 이미 가토를 통해 안면이 있었고, 또 승려인 유정이 이야기하기 훨씬 편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정의 귀국 후에도 조선과 일본은 서로 요청할 일이 있으면 유정과 일본의 승려의 私信을 통해 해결하려 한 일이 많았다.
조선 전기 내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천인 취급을 받았던 승려가 국가적으로 큰일을 해내면서 조선 후기 불교의 위상을 재고되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하였다. 휴정과 유정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사당이 세워지는데, 특히 지역 유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립하고 국가에서도 이를 공인하였다. 특히 밀양의 表忠寺는 임진왜란 후 유정의 고향에 세워진 사찰로, 현종 때에는 서원으로 승격되기도 하는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위의 자료는 밀양 표충사를 수리하는데 돈을 낸 이들에게 발급한 일종의 공명첩 발급증서이다. 흔히 상민이나 천민이 신분상승을 위해 자발적으로 공명첩을 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 공명첩은 중앙, 혹은 지방에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각 고을마다 강제로 할당되고, 또 지방 수령도 이를 지역의 饒民들에게 강제로 사게 하는 재정충당원으로써의 성격이 강했다. 특이한 것은 절을 수리하게 위해 돈을 낸 이들에게 품계를 내린다는 것인데 이는 표충사가 단순한 절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렇듯 불교가 국가로부터 인정받으면서 적어도 조선후기에는 더 이상 조선전기와 같은 국가정책상의 탄압은 받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중앙정부가 승려를 적극 활용하는 계기가 되는데, 사실 이 것은 불교계에 또 다른 시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사찰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협받지는 않을 수 있었다.
유정이 일본에서 한 문화적 교류 역시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다. 에도시대 일본 불교는 기복적 성향이 강항 정토종이 주를 이루었고, 선종은 그 교세가 강하지 않았다. 때문에 유정이 가져온 서산대사 휴정의『선가귀감』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 책은 곧 일본에서 간행되기에 이른다. 전근대시기 하나의 책이 목판이나 활자로 간행된다는 것은 그 수요와 파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가귀감』의 일본 간행은 조선과 일본의 사상 교류에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인다. 유정이 녹원원에서 좌장으로서 법회에서 법문을 했다는 것 또한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일본의 유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그를 찾아 문답을 나누었다는 내용이 라잔 문집에 실려있는데, 뒤에 조선통신사와 일본인들 간의 문화, 사상 교류를 살펴보아도, 일본인들의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 조선-에도시대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문화교류에 대해서는 연구가 일천하여 유정의 영향력이 얼마였는지 추측하기 어려움이 있다. 다행인 것은 유정과 일본인 승려들 사이의 오고간 편지가 몇 편 남아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앞으로 유정과 일본 선종과의 관계를 더욱 정치하게 파헤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승려이자 외교가,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유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유정은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지배계층에게 朝日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면서 또 상당히 불편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유정을 유교적 가치를 실현했던 인물로 받아 안아 승려라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탈각시켰다. 그리고 그 때 강조된 忠과 護國이라는 이미지는 사명당 유정의 다른 면모를 가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외교가, 승려로서의 유정의 면모를 부각시켜 그가 지니는 대외관계사적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본 강의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다루지 못하고 있는데, 수 많은 전설 속에 나타나는 유정을 통해 본 민중의식과 일본 측의 문집, 사료를 통해 유정이 일본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는 것, 사상사적으로본 유정의 위치, 유정의 일본행 이후 통신사의 사행일기에서 나타나는 유정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면이 완전히 검토되어야 유정의 대외관계사적 위치가 더욱 명확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정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독특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과 그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 사회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한국사가 자국 사료만으로 안주하는 습관을 버리고, 다양한 해외의 사료에 눈을 돌려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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