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여성

페미니즘의 바다에 물결치다 1

同黎 2013. 3. 14. 13:38

 페미니즘의 바다에 물결 치다 

2004.10.14. 목요일

딴지 편집국



  지난 기사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에 보내 주신 독자제위의 열화와도 같은 원성에 심심한 애증의 뜻을 전한다. 금번에는 예고한 바대로 서구 페미니즘의 태동과 변천사를 디벼보기로 할 터이다. 후끈 달아오른 부뉘기 속에서 핏대를 올리며 가열찬 논쟁을 주도한 독자논객들께는 좀 맥 빠지는 주제가 되려나? 뭐 그러나 어쩔 수 엄씀이다. 당 시리즈는 기획한 기자 맘에 의거하여 흘러간다. 이 기회에 서로 삿대질하던 손구락들, 선수보호 차원에서 휴식케 하시라. 자, 그럼 이제부터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로맨티시즘이 싹트고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대혁명이 벌어지는 등, 한창 시끄럽게 뽁짝대던 18세기의 서구, 그곳으로 말이다.    어머, 천부인권은 남자한테만 있나봐?



시작은, 진부하지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다.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할 윌리엄 고드윈을 남편으로, 19세기 환상 문학의 정수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메리 셸리를 딸로, 낭만주의 시인하면 세 손가락 안에 들 P.B. 셸리를 사위로 둔 이 여성의 저작, <여성권리의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1792>는 최초의 여성운동 관련서로 그 상징적 의미가 크다 하겠다.


소규모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고 혹은 직업 작가로 활동도 했던 그녀가, 당대를 강력하게 훑고 지나간 계몽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뭐 이상할 게 있을까나? 특히, 하늘이 내린 권리로서, 지구상의 그 어떤 것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개인이 가지는 권리라 하는 '천부인권'설의 매력에는 대영제국의 식민이던 유에스 아메리칸들이나, 부르봉 왕가의 신민이던 프랑스 부르조아들조차 모두 열광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말이다.


고딩 교과서에도 나오는 바, 바로 존 로크(John Locke)의 천부인권론은 근대 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고, 이를 실현한 것이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의 부르주아혁명이었다. 어느 때보다 인간의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고조된 이 시점에 여성 역시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당연한 도출물이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크의 천부인권에 들어있는 '인간'은 스코프가 참으로 좁은 존재였음이 곧 밝혀지게 되겠다. 다시 말해, 여기서 인간은 유럽과 북미의 백인 성인남성을 의미했던 것이다. 마치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그랬듯이.


해서, 여성을 자알 교육시켜 궁극적으루다가 독립성에 근거한 자기존엄성을 획득하게 하고, 천부인권에 의거하여 딴 남자들과 동일한 사회적 제권리를 갖게 하자...고 주장한 울스턴크래프트는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는 별명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던 거다.


그리하야, 울스턴크래프트의 여러 후배들은, 인권이 'rights of man'이 아니라 'rights of human beings'로서의 권리라는 것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운동판에 뛰어들지니, 이제부터 '제 1의 물결(the 1st wave)'이라 불리우는 여성운동의 등장 되겠다.

 



보통, 제 1의 물결은 울스턴크래프트 이후 19세기로부터 시작해서 1960년대의 보다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를 지칭하는데 아무래도 하이라이트는 그 태동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을 획득한 무렵까지이다.



당해 시기를 풍미한 두 줄기의 큰 흐름이라면,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과 문화적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으로 볼 수 있다. 전자를 볼라치면, 남녀간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동일한 조건과 사회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 되겠다. 반면, 후자는 남녀간의 차이는 뚜렷하며 특히 여성의 여러 속성들에 보다 큰 가치부여를 하게 된다. 우선, 시기상 먼저 나타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살펴보도록 하자.


계몽주의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아 계몽주의 페미니즘이라고도 불리우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차이는 없다는 믿음이다. 두 존재는 그들의 영혼이나 이성의 능력이 같기 때문에 똑같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가부장제, 즉 부권사회(patriarchy)가 여성들을 장시간 억압했기에, 이들 여성들을 계몽할 강력한 필요가 있고, 부권사회가 여성을 향해 제한한 제도나 권한 등을 쟁취하기 위해서 열쒸미 싸워야겠다는 거다.



이런 주장들의 이론적 배경에는 전술한 천부인권설과 더불어 벤덤의 공리주의도 도입된다. 프란시스 라이트(Frances Wright)같은 이가 대표적인데 요거 참 간결하고도 감동적이다. 우선 다시 고딩 교과서의 추억을 들춰내 보자. 공리주의라.. 바로 '사회가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제공해야 좋은 사회고 발전된 사회다' 머 이런 거 아니었나? 라이트는, 인간의 절반이 무지 속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상태가 구성원들의 최대 행복을 택도 없이 충족시키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지적 했다.


즉, 여성의 억압이 있고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야그 되겠다. 딴 거 몰라도 인류의 최대 행복을 위하여 그 구성원인 여성집단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거, 굉장히 좋은 말씀 아니냔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 Mill) 역시 <여성의 종속>이라는 저서에서 성 평등의 당위를 이같은 공리주의로 설명하기도 했다.


여하간에 자유주의 계열에서는 이러한 근거들을 토대로 제도의 평등화를 추구했다. 직업 기회의 전면개방과 더불어, 여성에게 완전한 형태의 시민권과 정치적 평등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결혼과 관련된 불합리한 법제도를 개정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렇다면 문화적 페미니즘의 주된 주장도 함 들어봐 줄 차례 되겠다.


이들의 수식어구가 '문화'라 된 이유이기도 한데,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계열이 전력한 법적 제도 개선보다는 종교나 결혼, 가정 등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즉, 정치적인 변화 여부를 뛰어넘어 보다 큰 영역인 사회 전반의 문화적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합이성적 사고 및 남녀 공히 다르지 않은 능력의 존재 등등에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분명 여성과 남성은 다르고, 남성들이 이성에 포커스가 맞춰진다면 여성은 감성에 그렇다고 했다. 문제는, 사회가 여성의 감성에서 비롯하는 수많은 덕목들을 비하하고 남성적 덕목들만을 강조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문화론자들이 그리하여 특히 주목한 것은 '모성'이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 양육을 경험한다. 생명을 잉태, 부여하며 기르기까지 하는 여성들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이타적인 존재들이며, 집단의 발전에는 이러한 이타성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스펜서(Herbert Spencer) 등이 주도한 사회진화론과 정반대의 사회진화론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집단은 경쟁적이기보다 협동적인 기술을 요하는 집단체제로 발전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 이러한 전제하에 여성의 이타성이 궁극적으로 집단, 즉 인류에게 필요한 형질이라 주장한 이가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었다. 집단 내의 협동성을 강조하는 부분은 현대의 사회적 구성주의와 그 맥이 상통하고 있음이다.


정리하자면,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 여성의 권리획득은 그 자체보다는 더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모권제(matriarchy)적 비젼에 대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모권제에 대한 요소가 오바하거나 삐딱선을 타면 분리주의나 신비주의로까지 나가게 되겠지만.

 


남녀간의 유사성을 강조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과, 이 둘 간의 차이점을 더욱 강조한 문화적 페미니트스들은 이론상의 차이 만큼이나 활동에 있어서도 뚜렷한 행보의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 계열에서 여성의 정치참여에 왕성하게 노력해왔다면, 문화 계열에서는 가사노동의 재평가와 더불어 이를 보완해 줄 사회의 장치를 관철시키려 애를 썼다. 보다 단순히 말하자면 전자가 거시적이고 정치적이라면 후자는 미시적이고 사회복지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 모멘트에서 여성참정권 운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엄씀이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거세게 진행된 여성참정권 운동(Woman's Suffrage Movement)은 서구국가들에 전반적으로 나타난 경향성이었다. 18세기의 굵직굵직한 시민혁명, 예컨대 프랑스대혁명이나 미국의 독립 등 근대 민주주의의 세례가 당연히 여권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다. 거따가 저 두 혁명은 성공한 케이스일 뿐, 당시 유럽은 국지적인 혁명운동이, 종국에는 제압당하긴 했어도 광범위하게 휩쓸고 간 후였다.


영국의 경우, 이멜린 팬커스트(Emmeline Pankhurst, 1857~1928)등이 주도한 참정권 운동은 다양한 프로테스트의 진행과 함께 특히, 옥중 단식투쟁 및 이를 저지하는 공권력의 강제섭식 등을 통해 여론과 사회의 여러 계층들을 압박해 갔다. 상상해 보자. 일련의 여성들이 단식을 하며 항거하고 있는데, 남성 교도관이나 경찰들이 와서 우악스럽게 강제로 밥을 먹이고 있는 장면을 말이다. 이러한 비인도적 행위에 여론은 분노했고, 드디어 여성참정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 참정권운동에 보다 큰 도움을 준 것은 아이러니컬하지만 바로 1차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부족한 남성인력은 여성들로 대체됐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역할로 상정된 여러 부문이 여성에 의해 수행됐다. 이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은 1919년 여성 참정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했다가 1928년에 남성과 동일한 참정권을 인정한다.


물론 이러한 참정권 운동이 여성의 현실적 삶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을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은 지적했다. 여성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 있으나마나한 것에다가 밥 벌어 먹고 사는데 참정권이란, 더구나 여성의 참정권이란 참으로 요원한 야그였던 거다.


가장 극명하게는 20년대 미국에서의 여성관련 법안 제출에서 드러난다. 자유주의 계열에서는 앤터니와 스탠턴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평등권수정안'을 지지했고, 문화론 계열에서는 '여성보호법'을 지지한 것이다. 전자가, 여성의 능력은 동등한 기회와 천부인권의 허용만 보장되면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발로로 평등권수정안을 제출한 반면, 후자는 여성은 남성과 분명히 다른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차이점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수 법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여성보호법이 발효된 주에서 여러 문제점들, 예컨대 법률이 명시한 차이의 보호와 배려가 곧 여성의 무능으로 간주되어 실질적인 불평등이 발생되기에 이른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직업 선택에 합법적인 장벽이 만들어진 셈.


사실, 간단하게 이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도저도 들어주기 싫은 기득권자들의 미꾸라지식 회피 아니겠는가? 아무리 선한 의지와 장점이 많은 규정이라도 이를 지켜야 하는 자의 의지가 박약하다면, 그것은 유명무실한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되려 규정이 보호하고자 하는 자에게 날아오는 칼이 되는 법이다. 어떻게 하면 내주고 싶어하지 않는 자를 설득,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근대성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해 온 제 1차 페미니즘 운동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태동으로부터 제 1의 물결까지의 당 시기는, 여성지식인 스스로가, 자신의 성이 사회적으로 가지는 함의 즉, 젠더(gender)의 차별성을 뼈 속 깊이 느끼는 각성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근대를 열어제낀 계몽주의의 파고 속에서 이들 지식인 일당들은 천부인권이라는 고귀한 이념에 만빵으로 공감하며 당대의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 천부인권에 여성은 '해당사항 없음'을 속쓰리게 발견하게 된다. 사상적 동지들이라 믿었던 존재들로부터의 거부는, 나는 니를 칭구라고 생각했는데 니는 나를 시다바리로 생각했구나 머 이런 류의 분노와 비슷하려나?


1840년, '런던세계노예제반대회의'가 개최됐을 때, 여성운동가들은 입장조차 불허당했음이다. 대체 누가 누굴 도울라고 런던까지 찾아 왔쓰까나?? 황망함 속에서 자신들이 노예와 다름없음을 깨달았을 때 가심을 땡기는 비애감은 그러나 비애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8년 뒤 '세네카폴스 대회(Seneca Falls Convention)'라는 역사적인 첫 여성권리회의를 일구어냈다.


이런 예는 60년대 신좌파 운동에 합류했다가 일목요연하게 성차별을 경험한 뒤,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다시 태어나는 일군의 무리들에서도 발견된다. 이 부분은 담 호를 기둘리시라.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1의 물결을 이룬 페미니스트들은 이들이 리버럴이건 컬처럴이건간에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적 근대성이라는 시대사상에 지배받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또한, 전례없는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이데올로기의 세팅을 위해서 다각적이고 창의적인 시도를 행한 이들이기도 했다.


특히나,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의 경우, 기존의 뉴튼식 질서 혹은 사고 등 합이성적 절대주의를 향한 이들의 문제제기는 리버럴들의 제도 보정을 뛰어넘어 종교와 삶, 그리고 사유방식까지 걸고 넘어가려는, 21세기 현재에도 유효한, 진보적인 사고체계였음이다. 이들이 추앙하고 미화한 여성성 내지는 모성(애)조차 부권사회 내의 학습효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간과했지만서도...



해서 그들의 행위 결과물들이 비록 1920년대 여성참정권 획득을 정점으로 기울어간 듯 보이지만, 온통 극악한 전쟁판으로 변했다가 곧장 이'념'투구의 장이 되어 버린 세상을 늘 주시하며 부단한 감시와 노력을 단속치 아니하였던 바, 보다 강화되고 보다 전투적인 모습으로 제 2의 물결을 탄생시킨 빽그라운드가 되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