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13.04.18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봄이라서 어쩐지 설레이는 나날입니다.
요즘 월요일마다 서울대 규장각으로 출근을 합니다. 아침에 고등학생, 대학생의 무리에 섞여 출근을 하고, 오전부터 오후까지 자료를 봅니다. 날이 좋고 해가 길어 여섯시가 좀 못되어 일이 끝나도 시야가 밝습니다. 일을 마치면 긴 시간에 걸쳐 안암으로 돌아옵니다.
일이 끝나면 서울대 행정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역으로 향합니다. 버스는 행정관을 출발해 정문을 지나 신림천을 따라 굽이굽이 난 도로를 따라 달립니다. 그러다가 보라매공원 쪽으로 방향을 틀어 노량진역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내려 버스를 갈아탑니다. 버스는 다시 한강대교와 노들섬을 지나 용산을 거쳐 서울역과 남대문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을지로를 지나쳐 동묘앞을 지납니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 안암에 도착합니다.
짧아도 한 시간 반, 길면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들여 버스를 타는 것은 분명 비효율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학교로 돌아오는 시간이 저에게는 몇 안되는 소중한 사유의 시간입니다. 책상 앞에서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인가 삶에 대한 감각을 읽는 때가 옵니다. 또한 문자의 숲에서 헤매다가 보면 나의 생각이 과연 타당한건지에 대한 판단력도 흐려지게 됩니다. 이럴 때 두시간 정도 온전히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시간은 저에게는 굉장히 소중합니다.
제가 굳이 버스를 타는 이유는 사람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창 밖을 내다볼 수 없어 그저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졸고 있는 모습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치만 버스는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 버스이기 때문에 저는 가능한 버스를 탑니다.
공부를 조금 했을때 저는 사람의 감정을 믿지 않았습니다. 논리와 상식으로 무장한 체 마치 오욕칠정으로부터 해방된 군자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본래의 근기가 일천해서인지 사람이 본래 그래서인지 그 결과는 결국 가식으로 끝맺어졌습니다.
조금 더 공부를 한 뒤 오욕칠정을 사랑해야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입니다.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간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더 나아가 애정이 없다면 인문학을 알 수 없습니다. 기뻐하고 화내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고서 어떻게 사람과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영복 선생님이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이라고 한 말이 이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나 또한 그 안에 있어야 관계의 최고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흐르는 강을 종횡으로 통과하는 버스를 탑니다.
왕소군은 봄이 봄 같지 앉아 슬펐다는데(春來不似春), 저는 봄이 너무 봄 같아 봄이 와도 봄을 생각할 수 없어(春來不思春)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봄이라고 해서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것 같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감정의 강물을 피할 생각은 없지만 부디 잔인한 사월이 되지는 않기를 바라며 다시 버스를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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