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근현대

리영희의 중국담론

同黎 2014. 12. 19. 15:53

리영희의 중국담론

 

고려대학교 조선후기사 박사2 박세연

 

들어가며

1. 리영희의 생애와 저서

2. 사상과 이념

3. 중국을 바라보는 눈

  1) 왜 중국인가?

  2) 리영희 중국담론이 가지는 의의

맺음말

 

들어가며

 

 70~80년대 남한사회에 있어서 리영희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반공과 냉전이데올로기가 남한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을때 그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며 냉전이라는 우상을 부수려 하였다. 또한 단지 中共으로 불리며 한국전쟁 휴전의 원인으로 폄하되던 중국의 8억인과 대화하려한 거의 최초의 남한 지식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왕성한 실천 때문에 그는 ‘사상의 은사’ 혹은 ‘의식화의 원흉으로 불리며 상반된 평가를 받아왔다.1)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가 취한 대북정책의 성과인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을 통해 우리는 남·북간의 대립이 일견 해소되었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 그리고 백낙청, 강만길, 강우창, 리영희, 송건호 등 이른바 ‘시민사회 원로’라고 불렸던 이들의 담론과 사회사상이 젊은 연구자들에게 점차 잊혀져 갔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리영희의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은 수정주의 혹은 시대적 한계로 평가되며 차츰 잊혀졌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10년이 지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들어와 우리는 남북의 냉전이 끝나지 않은 현실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70~80년대 청년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리영희의 사상을 다시 들추어보는 것은 지식인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우리의 통일운동과 진보적 시민사회 운동의 근원을 살펴본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군사독재시기 한 실천적 지식인이 바라보았던 한국사회를 살펴보고

지금의 통일논의 및 (무너진) 사회주의권에 대한 인식과 비교함으로써 그동안 남한사회에서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발표문에서는 리영희의 저서를 중심으로 다른 이와는 차별적이었던 중국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리영희의 사상은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크게 변화하였다고 한다.2) 여기서는 90년대 이후의 리영희의 사상보다는 군사독재 시절, 즉 70~80년대의 리영희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리영희의 생애와 저서

 

 리영희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빈곤한 운산지방에서 비교적 유력한 집안이었다고 한다.3) 해방 후에는 고향을 떠나 해양대학에 진학한 후 잠시 교사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7년간 군대에 연락장교를 있으면서 외국어를 익히고 전역 후에는 외무고시 준비를 하다가 합동통신의 외신부 기자로 채용되었다. 식민지나 한국전쟁의 경험은 리영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이 시기의 경험의 체계적인 사회의식 형성과 직결된 것 같지는 않다.4) 오히려 이때의 경험은 잠복해 있다가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맡았던 주 업무가 국제관계인 관계로 점차 국제정세에 흥미가 생기고, 또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되면서 비로소 사회의식과 결합되어 중국혁명과 동남아시아 민족해방운동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5)

 1972년 리영희는 한양대에 교수로 부임하여 중소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권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 하였다. 그러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2번 교수에서 해직되었고, 5번의 구속과 2번의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저술활동은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관심사는 중국문제에서 주로 한·미, 한·일관계와 남북문제로 바뀌어갔다.

 그의 삶은 김원에 의해 서벌터니티를 지녔다고 평가받은 박현채6)와도 다른 것이었다. 빨치산이었던 경험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통제를 가했던 박현채와는 달리 리영희는 매우 당당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었다. 유신체제의 한복판이었던 1974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당시의 학생·지식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거기서 리영희는 중국을 긍정적으로 보는 한편 한미안보체제를 재론하였고 권위주의를 비판하며 언론자유를 주장하였다. 지금까지 중공이라고 부르며 비하하였던 중국의 정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당시 지성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이어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분단을 넘어서』, 『10억인의 나라』, 『역설의 변증』 등의 저서를 연달아 낸다. 그가 치러야 했던 옥고는 바로 이런 활발한 실천활동의 결과였다.

 그의 저서는 80년대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80년대 초 중앙정보부에서 학생운동의 사상적 맥락을 조사하였는데 영향을 끼친 대표적 저서 30여권 중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이 각각 1·2·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7) 이로써 ‘사상의 은사’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생운동권은 간접적으로나마 그의 저서를 통해 사회주의를 접할 수 있었고, 리영희의 책을 시작으로 좀 더 엄밀한 이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리영희 자신은 그러한 이론 논쟁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그가 80년대 운동진영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8)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붕괴로 인해 리영희도 어느 정도의 반성과 성찰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70년대 문혁에 대한 입장 역시 조금씩 바뀌었다.9) 그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를 제어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적 철학과 정책은 반드시 필요하는 입장을 밝혔고, 그러한 생각을 담은 저서가 바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였다. 1991년 이후의 이른바 ‘인간주의적 사회주의’ 혹은 ‘휴머니즘’으로 일컬어지는 리영희의 사상은 좌·우 양쪽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96년 교직에서 정년퇴직하고 난 후 리영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한편 저술활동보다는 과거 시대의 증인으로써 주로 대담이나 정리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10년 향년 81세로 사망하였다.

 

2. 사상과 이념

 

 리영희가 7·80년대 ‘사상의 은사’라고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냉전체제에 반대하고 남한사회에 왜곡되어 있던 사회주의권에 대한 시각을 수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서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난후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강조하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극단적 인간소외를 발생시키지 않도록 견제하고 균형을 잡게 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이야기했다. ‘사상의 은사’의 이러한 발언이 이른바 진보적인 학계나 운동진영이 미친 영향을 적지 않았다.

 일부는 그가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개량주의로 전향했다고 비판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그는 원래 사회주의를 철학으로서만 받아들였을 뿐이기 때문에 변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그의 사상을 둘러싼 연구와 논쟁이 적지 않게 학술지의 지면을 장식하였다. 전향의 여부를 떠나 당대를 살고 있는 한 지식인의 사상이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여기서는 리영희의 중국관과 냉전담론을 살펴보기 위해 그의 사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정리하도록 하겠다.

 리영희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외신기자였던 리영희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민족 범주 안에서의 일만 생각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했다. 최근 한국의 다민족화 분위기에 대하여 그는 더 열리고 더 섞여야 한다며 자신이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10)

 윤평중의 지적에 따르면 리영희는 사회주의에 가까웠지만 그것은 경제를 토대로 하는 맑스주의 전체에 대한 동의라기보다는 초기 맑스가 발견했던,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인간 소외 현상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는 것이었다.11) 윤평중은 리영희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게 되는 인간소회 현상을 견제하기 위한 (초보적인 단계의) 휴머니즘적 성격을 지닌 ‘인간주의적 사회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윤평중은 리영희가 자본주의와 냉전체제라는 우상을 부수기 위해 북한의 현실을 외면하고 사회주의라는 또 다른 우상을 세웠다고 비판했다.

  이순웅은 윤평중의 ‘인간주의적 사회주의’라는 리영희에 대한 정의에 일견 동의하면서 리영희의 강조점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간주의에 있었다고 보았다.12) 때문에 이순웅은 리영희의 사상에서 사회주의에 방점을 찍었던 윤평중을 비판하고 리영희가 사회주의를 옹호했던 이유는 그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판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주의에 매몰된 사회주의는 리영희가 원하는 도덕적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사회주의의 도덕이 결합된 사회민주주의가 리영희의 사상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리영희는 사회주의자로 보기엔 무리가 많다. 그는 실제로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를 강조한다. 즉 리영희는 사회주의가 그 자체가 아니라 (도덕적·인간주의적인) 사회주의적 이념과 가치관, 철학을 유지해야 하며, 그러한 사회주의가 있어야 자본주의의 자기수정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13)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가장 이상적이고 대안적인 체제로 보기도 하였다.14) 통일 역시 북한의 사회주의적 성격과 남한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합쳐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리영희는 구조적 태도 즉 구조결정론에서 벗어나 이념을 생각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의 구조는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즉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완벽한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장점을 융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주의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비과학적이고 개량적인 것으로 비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영희의 경제주의에 대한 거부와 인간주의적 태도는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와는 애초에 거리가 먼 것이었고 사회민주주의로의 귀결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리영희를 변절로 보는 것은 70~80년대 운동에서의 리영희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중국을 바라보는 눈

 

   1) 왜 중국인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보이는 70년대의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매우 긍정적으로평가하고 있다. 이는 당시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던 남한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정반대의 태도였다.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의 인간혁명이라고 부르며 높이 평가했는데 어떠한 배경에서 이러한 시각이 나올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리영희가 중국에 관심을 기울기에 된 것은 합동통신과 조선일보의 외신기자였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70년대는 동·서 냉전체제가 비교적 완화되던 데탕트의 시대였다. 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미·소, 미·중간의 긴장 완화가 이루어졌고, 동·서독 사이에서도 화해 분위기가 이루어졌다.15) 리영희는 여기서 고착된 냉전체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남한 사회 내부의 분위기였다. 데탕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으나 남한사회는 여전히 군부독재로 인하여 냉전 논리만이 통용되고 있었다. 예컨대 중국만 하더라도 닉슨이 북경을 방문하면서 미·중간의 화해무드가 시작되었으나 남한에서는 아직도 "중공하면 소련의 괴뢰이고 민중은 기아선상에서 피골이 상접해 있고, 인민은 금시라도 폭동과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려 하고 있고, 농민은 모두 강제 수용소에서 웃음을 잃은 동물이 되었고, 과학이니 문화는 모두 파괴되어 야만상태가 되었"16) 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냉전 체제 속에서 남한사회의 인식론적 기능이 마치 '조건반사의 토끼'처럼 되어버린 상황,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그의 첫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의 문제의식이었다.

 리영희가 중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 이유에는 현실 남한사회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영희는 70년대 남한사회의 개발주의, 대외의존적 경제성장, 비인간화된 사회의 모습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군부독재 상황에서 남한사회에 직접적인 비판은 거의 불가능했다.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통해 소련과 미국이 아닌 새로운 가치관과 사회를 발견하고 미국에 종속된 박정희 정권의 반공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한국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중국 문제를 이용하고 이를 계몽적인 수단으로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7)

 중국을 서술하는 리영희의 언어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할 때에는 '가설의 해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관찰의 모습을 차용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남한사회 주류의 공산권에 대한 서술에 대한 대항이자 전복의 전략이었다. 관찰을 통해 독자가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벗어나도록 추동하는 것이었다. 한편 리영희가 자신의 '가설'을 사실이라고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가설이라고 한 것은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던 반공주의 담론 역시 가설임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즉 반공 담론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그 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적 선택이었던 것이다.18)  

 그렇다면 리영희가 생각하는 중국 문화혁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먼저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이 중국근현대사에서의 '전통적 사상 위에서의 외부사상의 흡수'라는 전통의 한 과정 혹은 결과라고 보았다. 즉 중국은 ‘비형이상학적 현세위주, 정치주의’라는 전통적 사상의 토대 위에 외부사상을 수용하였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전통적 사상 위에 기독교를, 변법자강운동 역시 전통적 사상 위에 서구사상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5·4운동을 거쳐 중국혁명까지 이어졌으며 이렇듯 중국의 전통적 사상 위로 맑스주의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라는 인간혁명이 가능하였다는 것이다.19) 이러한 중국의 전통사상을 존중하지 않고 이질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서구의 것 그대로 수용하려 한 장개석 정권이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20)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보이는 전통적 사상의 특징을 리영희는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그것은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하는 것이었다. 즉 개인의 경쟁이 아니라 전체의 협동을 강조한다는 것이었다.21) 두 번째 특징은 물질주의에 대한 경계와 정신주의에 대한 숭상이다. 중국 근현대사상에서 항상 물질을 중시하는 세력과 정신과 물질의 발전의 길항관계에 있다고 보는 세력이 대립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양무운동, 장개석 정권, 유소기를 들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 변법자강론, 모택동 정권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결국 항상 후자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리영희는 물질주의에의 경계와 정신주의에 대한 강조는 현재 중국 지도부의 권력 교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았다.22)

 리영희가 보기에 문혁은 이러한 중국의 전통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모택동은 경제주의에 매몰된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중국의 정신 우선적 전통에 따라 혁명우선, 정치·사상 우선, 인간제일주의 사회주의 건설방식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23) 이는 경제성장을 우선으로 하는 물질주의적인 유소기 노선과 반대한 것으로 즉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혁명, 인간개조 혁명이었다.24) 인간혁명은 제도적 혁명, 경제적 혁명에 그치지 않고, 혁명의 영역을 공공의 윤리를 건설하는데 까지 연장시키는 것으로써 마르크스나 레닌, 스탈린의 혁명보다도 한층 더 나아갔다고 보는 것이다.25)

 문화혁명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그는 긍정적이었다. 특히 지식인과 당 간부를 공장과 농촌에 파견해 노동자·농민의 고충을 알게 하는 하방(下放)운동에 대해서 인민 중심적이고, 교육에 대하여 지식인 중심을 벗어나 민중지식을 신뢰하는 근본적 혁명 방식이라며 높게 평가했다.26) 그리고 일반적으로 숙청이 난무했다고 알려진 문화혁명의 과정에서 토론과 설득, 자기비판이 있을 뿐 숙청은 없다고 보았다.27) 그리고 이는 사회주의에 걸맞은 인간상의 재구성 없이 일방적으로 계급 소멸을 선언하였던 소련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 혁명의 과정을 거쳐서 중국은 물질과 정신이 동시에 성장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로 거듭났고, 그 결과 제3세계 일종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28)

 리영희가 보기에 인간혁명으로 인해 건설된 중국은 여러 제도 면에서 물질주의적인 미국이나 소련과는 달랐다. 먼저 지식인계층과 노동자계층 통합하였다. 자신이 직접 만든 탁구공으로 경기를 하는 탁구선수의 예와 같이 중국의 교육의 목적을 지식인이 대중과 유리되지 않고 노동을 통해 계급적 차이를 해소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하급 노동자를 교육시켜 과학과 기술을 습득하게 함으로써 전문가 중심주의를 해소하였다. 공장에서도 관리자와 생산직의 차이를 타파하였다.29)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리영희의 중국에 대한 연구는 중단되었다. 이는 리영희가 개혁개방이 생산과 물질을 중시하는 노선의 승리로 인식했고 이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었다.30) 대신 그의 관심은 냉전체제의 해체와 통일담론으로 이동하였다.

 

   2)리영희 중국담론이 가지는 의의

 

 리영희의 중국담론은 당대 지식인 혹은 대중의 일반적 인식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사실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대와 (긍정적) 영향은 리영희뿐만 아니라 60~70년대의 유로맑시스트들도 가졌던 것이다. 여기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시 유로맑시스트, 신좌파 및 유럽  마오주의자들의 평가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다.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로맑시스트 혹은 신좌파들의 평가는 이렇다. 동유럽과 소련,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지만 내적인 모순에 빠져있었다. 노동기피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감 지식분자의 우월감 팽배, 농민의 도시민에 대한 열등감과 적대감 도시와 농촌 각 분야에서 격차의 확대로 표현되는 인민내부의 모순의 격화가 그것이었다. 모택동은 계속혁명을 주장하며 사회 내부에 있는 모순들을 해결하는 문화혁명을 주장하였고, 노동자 대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홍위병을 조직하고 大亂大治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31)32)

 유럽의 마오주의자들은 문혁의 계속혁명론을 긍정하며 모택동의 『모순론』, 『계급론』에서 보이는 중심모순과 주변모순, 主攻方과 主打方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문혁의 권력투쟁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은 마오주의를 바탕으로 스탈린주의와 차별적인 공산주의를 건설하였다. 중심모순과 주변모순 개념을 통해 계급모순을 중심모순으로 하는 공산주의 안에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 시대에 따라 '중심모순'을 추가로 설정할 수 있었다. 문혁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된 후에도 모순은 남아 있고, 이것들에 대한 끝없는 '혁명'이 진정한 공산주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부는 신좌파로, 일부는 좌익적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견 비슷해 보이는 리영희와 다른 유럽 마오주의자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점은 리영희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본데 비하여, 마오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리영희는 꾸준히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주장하였고, 후일 공산권이 무너지고 난 후에도 자본주의를 견제한 "정책과 철학"으로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란 단순한 경제주의도 아니지만 철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리영희는 사회주의를 철저하게 이해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그의 문혁에 관한 담론은 다분히 낭만적이었고 남한사회 사회주의운동의 마중물이 되었지만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가 유입된 후에는 어느새 운동진영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담론이 담론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사상가들이 탄생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니다.33)

 그러나 '사상의 은사'라는 명칭이 이야기하듯이 그의 사상이 엄혹한 70년대 민주화운동의 마중물이 된 것은 사실이다. 냉전체제에서 中共이라고 부르며 적대시하거나 후진국으로면 낮춰보던 중국을 사상의 나라로 봄으로써 남한사회에 주었던 사상사적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리영희는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맺음말

 

 리영희는 사회주의를 정신적, 인간주의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적 혁명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혁명까지 이른 중국의 문화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냉전체제 하에서 중공이라고 평가 절하되던 중국이 아니라 전통적 사상을 토대로 외부의 사상을 받아들여 융합시키는 중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남한사회의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사상의 은사로써 불림받았다.

 리영희 은퇴 후 있었던 수많은 대담과 끝나지 않은 저술활동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사상은 주로 그가 당시에 알 수 없었던 사실관계에 따라서 사후에 평가받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냉전체제 하의 한국사회에서 주었던 충격과 파장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중심으로 그를 평가할 때 리영희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고스란히 들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정문상, 2006, 「문화대혁명을 보는 한국사회의 한 시선 - 리영희의 사례」, 『역시비평』77, 214쪽.

2) 박병기, 2006, 「휴머니즘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 『시대와 철학』7-2.

3) 리영희·임현백 대담, 2005, 『대화』, 한길사, 36쪽.

4) 김원, 2012, 「리영희의 공화국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논의를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27. 후에 리영희는 절은 시절 사회의식이 없었던 사실에 대하여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밝힌 적 있다. 김원은 이때의 경험이 기억의 유구로 남아 70년대 리영희가 새로운 대안적 공화국을 상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5) 리영희·김동춘 대담, 1996, 「리영희-냉전이데올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 『역사비평』36.

6) 김원, 2011, 「박현채, 소년 빨치산과 노예의 언어」,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현실문화연구.

7) 리영희·임현백, 『대화』, 한길사, 466쪽.

8) 김원, 2012, 앞의 논문, 63쪽.

9) 정문상, 2006, 앞의 논문.

10) 리영희·김동춘 대담, 1996, 앞의 논문, 206쪽..

11) 윤평중, 2006, 「이상과 우상 -한국현대사와 리영희」, 『비평』13.

12) 이순웅, 2008, 「리영희의 '인간주의적' 사회주의에 관한 비판적 연구」, 『시대와 철학』19-3.

13) 리영희, 1994,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두레; 리영희, 1994, 「사회주의는 끝난 것인가? 자본주의는 이긴 것인가?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두레

14) 리영희·임현백 대담, 2005, 앞의 책.

15) 물론 이러한 화해 무드가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군사 개입을 통해 데탕트는 깨지고 미·소 갈등은 다시 강화되었다.

16) 리영희, 1974, 「조건반사의 토끼」,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17) 김원, 2012, 앞의 논문, 69쪽.

18) 박지영, 2006,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인민의 표상 정치 -1970년대 한국에서의 중국 인민 논의, 리영희의 경우」, 『중국어문학논집』47.

19) 리영희, 1974,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 근대화 백년사」,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20) 리영희, 1974,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21) 리영희, 1974,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 근대화 백년사」,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22) 리영희, 1974, 「중국 지도체제의 형성과정」,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23) 리영희, 1977, 「모택동의 교육사상」, 『우상과 이성』, 한길사.

24) 리영희, 1974, 「대륙 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25) 리영희, 1977, 「모택동의 교육사상」, 『우상과 이성』, 한길사.

26) 리영희, 1974, 「중국 지도체제의 형성과정」,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리영희, 1977, 「모택동의 교육사상」, 『우상과 이성』, 한길사.

27) 리영희, 1977, 「중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우상과 이성』, 한길사. 91쪽.

28) 리영희, 1977, 「제3세계는 왜 중국을 바라보는가」, 『우상과 이성』, 한길사. 91쪽.

29) 리영희, 1974, 「대륙 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30) 리영희·김동춘 대담, 1996, 「리영희-냉전이데올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 『역사비평』36.

31) 백승욱, 2012, 『문화대혁명 -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살림. 
    참고로 최근 문혁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백승욱이 문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음과 같다. 백승욱은 문혁의 배경 중 권력투쟁설은 모택동이 문혁을 단순한 정풍운동 혹은 당 지도부의 교체로 끝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정한다. 또한 유로맑시스트들의 모택동 계속혁명론의 경우 문혁 과정에서의 모든 사건과 홍위병을 모택동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부정한다. 백승욱은 설령 권력투쟁이 있었다 하더라도 문혁은 근본적으로 계속혁명론에서 시작된 것이 맞으며, 그것이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모택동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고 그 결과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교체되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보았다. 즉 문화대혁명의 대중운동의 양가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문혁에 대한 중국 지식인과 국가 중심의 평가, 즉 문혁을 일종의 파괴행위로 규정하는 현재의 대다수의 평가 역시 부정한다. 오히려 강제 하방당한 지식인층이 아닌 노동자들 중에서는 문혁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도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백승욱, 2012,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그린비 참조) 이러한 부분은 김원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32) 개인적으로 문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서발턴 연구과 결합될 때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혁을 단순한 지도자의 선통을 통한 대중 동원으로 보기보다는 대중 각각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었던 대중운동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서발턴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百花齊放 百家爭鳴 선언을 통해 서발턴으로 존재했던 중국의 노동자들은 대자보를 통해 스스로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식인(士)이 스승(師)으로 존경받아야 했던 중국 사회에서 비지식인이 지식인을, 혹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욕망을 말해도 된다는 기회를 얻게 되자 이들은 일봉의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을 말할 수 있게 했던 모택동조차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혁이 한 공장의 대자보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문혁이 낭만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혁은 성공한 대중운동으로 평가하기엔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모택동이라는 절대적 우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홍위병들은 결국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기 보다는 모택동을 각자 해석하며 그 권위를 빌어 투쟁을 지속했다. 다만 이것은 개인숭배와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모택동을 숭배했다기 보다는 행위의 '방패막'으로 사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대중의 욕망을 모아내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폭발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공통의 권리로 모아내야 진정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문혁은 어느 순간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대중 공동의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실패했을뿐만 아니라 윤리를 상실하기도 하였다.

33) 중국 문혁의 현실을 몰랐다던지, 중국을 미화했다던지 하는 사후적 비판은 생략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