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근현대

일제시대 경복궁에 모인 유물들

同黎 2012. 7. 28. 01:02

지금은 경복궁 복원사업이 한창입니다만 예전에는 경복궁이 절반 이상이 잔디밭이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는 육중한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고, 뒤편에는 민속박물관 근처에는 전통공예전시관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육중하고 권위적인 건물이 또 하나 있었죠. 그리고 넓은 경복궁 잔디밭에는 탑과 석등, 부도 등등의 석조 문화재들이 널려있었습니다. 지금은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하나만 빼고 모두 용산의 박물관이나 본래 있던 지역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지금도 경복궁이라고 하시면 잔디밭에 널려있던 석조물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경복궁이 일제시대에 훼손되었고, 잔디밭의 석물들이 일제에 의해 옮겨왔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사연을 아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제시대 경복궁과 국립중앙박물관(구 총독부박물관)에 강제로 옮겨진 유물들의 사연에 대하여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국보 200호) 1915년 경복궁으로 옮겨진 석탑 중 하나입니다.

한일병합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격하되고, 궁내부는 일본 궁내성 소속의 이왕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황실 재산 정리가 시작되는데 각 궁과 능, 원, 묘, 사(祠)와 종묘, 사직단, 경기전, 준원전 등의 전(殿), 그리고 특별히 전주의 이목대, 오목대, 그리고 종로의 기념비전 등이 이왕직으로 소속되었고, 경희궁과 함춘원(지금의 서울대병원) 같은 황실 정원이나 왕족의 무덤인 원, 원구단, 각종 행궁과 별궁, 태봉 등의 일부 재산은 건물은 해체 매각하고 부동산은 분할 매각하였습니다. 지금 고려대나 연세대, 서울대 의대, 숙명여고, 풍문여고 등의 학교가 서울 시내에 위치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조선왕실의 부동산을 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연세대는 수길원이라는 무덤 자리에 지금 학교고 지금도 수길원 정자각이 학내에 남아있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지금 동국대학교에 이전되어 불당으로 쓰이고 있고요.

이러던 와중에 경복궁의 문제가 불거집니다. 경복궁은 상당히 큰 궁궐이었으나 고종이나 순종은 그 곳에서는 안 좋은 기억(을미사변) 때문에 기거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실제로 한일병합 이후 고종의 궁호는 덕수궁 이태왕, 순종의 궁호는 창덕궁 이왕이었습니다. 왕은 살지 않는 거대한 궁궐을 유지하기에는 이왕직은 예산이 부족했고, 결국 서울 한 복판의 경복궁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을 이왕직에서 총독부 직할로 전환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경복궁에 대한 파괴와 변형이 시작됩니다.

1915년, 즉 한일병합 10주년이 되는 해에 조선총독부는 시정 10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박람회를 개최합니다. 이것이 조선물산공진회입니다. 조선 물산공진회를 기획하면서 경복궁의 대부분의 건물이 헐리게 됩니다. 광화문, 근정문, 근정전, 경회루, 수정전, 집옥재, 향원정을 제외한 건물들이 헐리는데 그냥 헐리는 것은 아니고 모두 해체되어 판매됩니다. 동궁전이었던 자선등은 해체되어 어느 일본 호텔의 별관이 되었다가 관동대지진 때 사라지고 말죠.

건물을 철거한 넓은 공간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각종 유물들이 제자리를 떠나 들어오게 됩니다. 총독부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세워진 본관, 그리고 기계관, 미술관, 음악당, 양어장, 연애관, 철도관, 동양척식특설관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전시를 위해 많은 유물들이 반입되는데개중에는 지금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경주, 충주, 포천, 원주, 이천, 평양, 개성 등지에서 수집한 석탑과 부도, 석불과 철불들로 특히 한강으로 운반하기 쉬운 원주와 충주의 문화재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반입된 유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주 법천사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 부도 중 최고 걸작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다른 석조유물들이 모두 용산으로 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때 포탄에 명중당해 부서진 것은 간신히 수습해놓을 것이라 훼손의 위험이 있어 아직도 혼자 경복궁에 있습니다.

원주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현 국보)
원주 영전사보제존자사리탑(현 보물)
원주 석불 2구
원주 철불 5구
원주 본저전동오측석탑
이천 향교방석탑(현 일본반출)
이천 안흥사오층석탑
충주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현 국보)
충주 정토사홍봅국사실상탑비(현 보물)
개성 남계원칠층석탑(현 국보)
경주 남산삼릉계석조약사여래좌상
경주 감산사지석조아미타불입상(현 국보)
경주 감산사지석조미륵보상입상(현 국보)
경주 무장사아미타불조사비
경주 고선사서당화상탑비
포천 철불 2구
평양 율리사지칠층석탑(현 일본반출)
서산 보원사지철불

*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기록 카드 참조

명목상 보존을 위하여 옮겨왔다고는 하지만 사실 모두 잘 보존되고 있던 것입니다. 천년을 버텨온 유산들이 한갖 조선총독부를 찬양하는 박람회의 눈요기감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박람회는 공전의 히트를 하였고, 망국의 정궁을 보고 싶어하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문화재 뿐만 아니라 산업전시물과 고래뼈 같은 희귀한 것들도 함께 전시를 했었습니다. 많은 일본인들도 다녀갔지요.

박람회가 끝나고 난 후, 조선물산공진회 본관을 허물고 난 자리에 조선총독부 새청사가 들어서게 됩니다. 광화문은 지금의 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겨지게 되지요. 그나마 헐릴 뻔 한 것은 일본의 지식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철거 반대운동을 펼쳐 살아남은 것입니다. 총독부 건물 뒷편은 전체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조선물산공진회의 미술관 건물이 박물관의 본관이 되고, 근정전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은 관람객이 신발을 신고 들어가 전시물을 관람하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관리사였던 건물은 지금도 남아 경복궁 관리사무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하튼 1915년의 선례는 이후에도 많은 유물들이 경복궁으로 옮겨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염거화상부도, 정도사지오층석탑, 태자사낭공대사탑비, 고달사지석등, 나주서문석등, 북묘비, 개성현화사석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과 탑비, 월광사원랑선사탑비, 갈항사지삼층석탑 경천사지십층석탑, 중흥산성쌍사자석등, 산청범학리삼층석탑 등 지금 거의 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석조유물들이 집중되었고, 해방 후에도 서울홍제동오층석탑,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등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오면서 중앙박물관은 자의반, 타의반 엄청난 규모와 수준의 석조문화재들을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건물이 다시 복원되고 있지만 일제시대 받은 상처는 영원히 회복하기 힘들 것입니다. 복원공사가 끝나도 실제 건물의 절반만이 복원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기록의 미비로 일본이나 서울 등지로 팔려나갔을 많은 건물들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록만 있다면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은 텐데요. 실제로 얼마전 골프장에서 발견된 안동별궁 건물이나, 어느 별장에서 발견된 운형궁 건물, 원구단 정문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기록의 미비로 요원하기만 한 이야기입니다.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국보 102호) 지금은 용산으로 이전되었으나 수장고에 있어 볼 수 없습니다.

문화재를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가치를 지닙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모인 많은 문화재들은 제자리를 떠남으로써 그 문화적 가치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현재 일제시대 모였던 문화재의 일부가 대구나 광주같은 지역의 박물관으로 이관되었지만 완전한 원위치 복원이 아니기에 아직도 지역 박물관으로의 이전은 절반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아픈 과거는 우리의 역사를 이렇게 어지럽혀 놓았습니다. 경복궁과 박물관의 운명을 보면서 새삼 이러한 사실을 다시 느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