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근현대

강화의 성공회 전래와 강화 성공회 성당

同黎 2012. 10. 24. 01:41

강화의 성공회 전래와 강화 성공회 성당

대학원 석사과정

박세연

들어가며

강화도에는 전통 한옥건축과 서양식 교회건축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의 성공회 성당이 2곳 있다. 강화 읍내인 관청리에 위치한 강화 성공회성당과 길상면의 면소재지인 온수리에 위치한 온수리 성공회 성당이 그 곳이다. 두 성당 모두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졌는데, 강화 성공회 성당은 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424호로 지정되었으며 온수리 성당 역시 인천유형문화재 52호, 사제관은 인천유형문화재 41호로 지정되어있다.

강화도의 성공회 성당들은 지성소와 회중석, 회랑이라는 서양식 교회건축에 필수적인 요소를 갖추면서도 韓式 목조건축과 기와지붕의 전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유교 건축과 불교 건축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요소 역시 곳곳에서 보이고 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글에서는 영국 성공회의 강화도 전래부터 시작하여 강화도에 왜 이렇듯 독특한 모습의 성공회 성당이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영국 성공회의 한국 선교

조선의 그리스도교 포교 및 신앙의 자유는 1880년대 영국·독일 및 프랑스와의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인정되었다. 때문에 서양의 여러 교파가 경쟁적으로 조선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특히 미국 개신교회의 경우 조선 전체를 여러 관구로 나누어 관구마다 남침례교, 북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등이 적극적으로 선교를 펼쳐나갔다.

성공회의 경우 1883년 맺어진 조영조약에 따라 선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고, 1890년 서울에 진출한 영국인들을 위한 성당을 영국공사관 인근에 건립하였으나, 비교적 늦은 시기인 1892년부터 본격적인 선교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교회가 있는 곳에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경쟁적 선교를 피하고 교회 일치를 추구하자는 옥스퍼드 운동의 정신에 따라 다른 기독교회가 진출하지 않은 곳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인 트롤로프 신부(후일 주교로 昇座)를 비롯한 선교단은 아직까지 다른 교회가 진출하지 않았고 수운의 중심지로 교통이 편리했던 강화도를 선교의 중심지로 선택하게 되었다.

1894년 갑곶에 처음 교회를 건립한 성공회 선교단은 활발한 선교를 위해 강화 성내에 성당을 건립하려 하였다. 그래서 1896년 동문 안에 있던 영국해군의 숙소로 쓰였던 한옥을 구입하였다. 특이한 점은 당시 미국의 감리교와 프랑스의 천주교가 함께 강화성 내에 교회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거부당하고 성공회 성당만 허가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기억이 다른 두 나라를 거부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

차츰 신자가 늘어나고 포교 또한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자 틀롤로프 신부는 1899년부터 성당을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지금의 자리인 강화내성 성태 위에 700평 정도의 부지를 마련하고 신도였던 한국인 工匠 김희준을 공사감독으로 임명했다. 트롤로프 신부의 서양식 건축 지식과 한국인 도편수의 전통 건축 기술이 합쳐져 1900년 250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는 강화 성공회 성당이 완성되었다.

이후 일제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강화도는 성공회 신앙의 주요 거점으로 남아 있다. 강화군내에 가장 많은 때에는 15곳의 성당과 7곳의 회당이 있었으며, 지금도 서울교구 내 독자적 교무구로 설정되어 있으며 12곳의 성당이 있다. 이는 다른 어떤 교무구보다 단위면적 당 많은 숫자이다.

 

2. 한국 성공회 특유의 절충식 교회건축

개항 이후 한국에는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지금도 많은 교회건축이 남아있다. 그러나 천주교나 여타 개신교회가 대부분 서양식 건축양식을 그대로 들여왔고, 때문에 석조 혹은 벽돌조로 지어졌던 것이 비하여 성공회 성당은 유독 목조의 절충식 교회가 많이 남아있다.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총 57개의 교회가 한옥으로 지어졌다. 그 중 강화성당과 온수리성당을 비롯하여 청주성당, 진천성당, 음성성당, 아산 둔포성당, 천안 부대동성당이 현존하고 있다. 이 밖에 석조로 지어진 서울 대성당 같은 경우에도 기와 등 곳곳에 한국적 오브제를 가미하고 있다.

한국 성공회 성당의 절충적 양식이라 함은 기본적으로는 전통 한옥식 목조 골조와 지붕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서양의 교회건축(바실리카 양식)의 필수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서양식 교회건축에는 사제가 의식을 집행하는 지성소와 신도들이 자리하는 회중석 그리고 양편으로 자리한 회중석의 중앙·좌·우에 위치하여 지성소와 회중석을 잇는 있는 회랑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식 교회건축은 여기에 성가대나 예배당을 추가해 십자가 모양의 건물을 짓는데, 한국의 성공회 건축은 이를 생략해 세로로 길쭉한 직사각형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건축은 기존까지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성공회 건축에서 이러한 절충식 양식이 유행했던 것일까? 이는 성공회조직의 특성 및 선교 방향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성공회는 세계적인 중앙 조직이 없고, 일단 선교한 나라의 교회가 일정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되면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 한국의 대한성공회도 세계 어떤 나라의 지도를 받지 않는 독자적 조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언젠가 독립적 조직으로 성장할 한국의 성공회 교회가 한국의 전통 문화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배려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피선교국의 문화와 전통을 수용해야 한다는 성공회의 선교방향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조선후기 천주교는 선교에 있어서 지나치게 원칙론을 내세워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이후 천주교의 선교방향도 당사국의 사정에 맞추어가는 것으로 변화하였고, 특히 성공회는 이러한 원칙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피선교국의 전통을 흡수하는 선교 방향이 건축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3. 강화도의 성공회 성당들

강화도의 성공회 성당들은 개항기 성공회 성당의 절충적 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먼저 강화성당을 살펴보자. 강화성당은 배 모양의 부지에 지어져 2층의 교회와 십자가가 마치 배의 돛과 같이 부각되는 효과를 취하였다. 그리고 선수 부분에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선미 부분에는 사제관을 위치시켰다. 외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으로 향교나 서원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떴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종을 보관하는 용도로 지어졌다. 그런데 건축 양식이 사찰의 천왕문을 닮은 것을 알 수 있다.

성당 건물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고, 중층 건물이다. 2층은 실제층은 아니며 유리창을 두어 교회건축의 바실리카양식을 재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성당 기둥에는 유교건축에서 보이는 주련을 달았고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한문으로 써 놓았다. 실내에도 제단 뒤에 萬有眞原이라는 현판을 달아 기독교리를 한문으로 표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회중석은 건립 당시에는 좌우가 분리되어 서로 볼 수 없게 되어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남녀가 내외하는 유교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온수리성당 역시 단층이라는 것을 빼면 강화성당과 비슷한 양식을 띄고 있다. 온수리 성당은 1906년 건립된 것이다. 다만 강화성당과는 달리 대문이 1개 이며 종루가 따로 없는데, 대문을 솟을대문으로 짓고, 어칸인 중앙칸을 매우 높게 달아 거기에 서양식 종을 달았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절충한 형태를 매우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