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근현대

어느 민족종교의 불행한 최후

同黎 2012. 7. 27. 01:40


조계사 대웅전 (서울유형문화재 127호) 사진출처 : 다음 백과사전

한국 불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의 총본산은 어디일까요? 많은 분들이 혹 삼보사찰인 통도사나 송광사, 해인사를 떠올리실 수 있겠지만 조계종의 총본산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조계사입니다. 조계사는 그 역사가 오래된 절은 아닙니다. 본래 한양 사대문안에는 승려의 출입이 금지되고, 사찰 건립 또한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로의 원각사나 정동의 흥천사 같이 특수한 목적을 지닌 몇 개 사찰은 예외가 있었지요. (믿기지 않지만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그 쪽에 숲이 우거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종대왕 때 흥천사가 사라지고, 연산군 때 원각사마저 사라지면서 사대문 안에 사찰은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는 것은 갑오경장 이후입니다.

그렇다면 조계사의 역사를 짐작할 만 합니다. 조계사의 역사를 아무리 올려잡아도 경오경장이후가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조계사는 일제시대에 세워진 것입니다. 불교계는 공식적인 국가의 탄압이 사라지면서 불교를 중흥하고 밀려오는 일본 불교에 대응하기 위한 고민을 병합 이전부터 해왔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사찰령이 내려지면서 총독부의 불교 간섭이 심해지자 마침내 조선 불교만의 종단을 세우고, 거기에 알맞는 총본산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기존에 있던 사찰들은 규모가 클지는 모르나 수행의 목적으로 산 중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도시 포교나 총본산 역할 수행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때문에 서울 도심에 총본산을 새로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태고사라는 이름으로 조선불교의 총본산이 1938년 세워집니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불교계 내에서도 친일경력 승려 처벌과 비구승(비혼인승), 대처승(혼인승) 간의 처리문제를 두고 비구 측의 조계종과 대처 측의 태고종으로 갈라지면서 태고사도 조계사도 명칭을 바꿉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찰은 거의 다 조계종이며, 태고종 사찰로 유명한 것은 순천의 선암사와 서울의 연세대 옆에 있는 봉원사가 있습니다.


조계사 대웅전 내부 :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시나요?

제가 주목하는 것은 조계사의 대웅전입니다. 실제로 가보면 느끼시겠지만 조계사 자리는 상당히 비좁은데 반하여 대웅전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이 거대합니다. 최근에 거대한 삼존불을 새로 모시면서 그 위압감이 한층 더 커졌지요. 정면 7칸에 측면 4칸인 이 대웅전은 평수가 155평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래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살과 벽면까지 화려한 조각들이 빽빽하게 차 있습니다. 아무리 대웅전이라고 해도 사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과하게 화려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불교의 사찰령의 여파로 총독부의 간섭이 심해지고 밀려들어오는 일본계 불교에 위축되고 있을 때인데 어떻게 이렇게 크고 와려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답은 조계사 대웅전이 새로 신축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걱축물을 해체하여 다시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건축물은 돌로 기단을 쌓고 나무가 주요 골재가 되고 빅 공간과 벽을 흙으로 치기 때문에, 건축물을 해체하여 이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조계사 대웅전은 전북 정읍에 있던 "보천교(普天敎)" 라는 교단의 중심건물인 십일전(十一殿)을 구입하여 그대로 옮겨와 대웅전으로 삼은 것입니다. 보천교라는 신흥 민족종교의 교주가 엄청난 돈을 들이고 심혈을 기울여 지은 자신의 궁전이기 때문에 이렇게 화려한 건축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장식들이 사방 벽에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면 보천교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종교는 크게 동학계(수운계), 증산계, 단군계 등으로 나누어지고 이 밖에도 유교의 영향을 강한 남학계나 청학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 갱정유도 같은 유교계, 관우를 모시는 관성교 같은 도교계, 기타 불교계의 다영한 민족종교들이 있습니다. 단군계는 잘 알고 계시는 대종교가 대표적이고 동학계는 근본적 신인 한울님을 모시는 천도교와 수운 최제우 자체를 대천제, 혹은 상제로 모시는 수운교 계통으로 나누어집니다. 증산계통은 구한말~ 일제시기 실존인물인 증산 강일순이라는 인물을 상제로 모시고 있으며 대단히 많은 종파들이 있는데, 가장 잘 알려져있는 것은 증산도와 대순진리회입니다. 민족종교의 대부분은 이 세상은 말세이며 그렇기 때문에 후천개벽이 올 것이다 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고, 그 방법을 때로는 물리적인 것으로, 혹은 수행을 통한 정신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종교는 특히 일제시대에 많이 성행했습니다. 워낙 살기도 어려웠고, 조선이 망하면서 누군가가 이 나라를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종교가 성행하게 됩니다. 민족종교 대부분은 ○○년 천자즉위설, ○○년 개벽설을 내세우며, 후천개벽이 멀지 않았음을 내세워 포교하였고, 교주 스스로가 구세주임을 자임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종교는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실제로 지금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소소한 교단들의 독립운동이 일제시대 신문지상을 통해서나마 간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독부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독립운동에 뜻에 없었으나 신도를 모으기 위해 구세주 노릇을 하던 일부 민족종교의 교주들은 곧 일제에 협력하여 "정식" 종교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본래 조선총독부는 정식종교로 신도(神道: 일본의 전통종교), 불교, 기독교 만을 정식 종교로 인정하고 기타의 종교들을 모두 유사 종교라는 이름으로 관리하였습니다. (천도교나, 천도교에서 갈라져나온 친일파 이용구의 시천교 같은 경우 일제에 이미 상당히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半 공식종교 정도로 취급다고 있디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일본 본토의 종교 정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군국주의 하에서 혹 천황제를 위협할만한 요소가 조금이라도 보인다 싶은 종교는 설령 일본인들이 만든 종교라고 할지라도 무차별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보천교는 이러한 민족종교의 반일과 친일의 딜레마, 그리고 조선 총독부의 민족종교 관리정책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천교는 대표적인 증산계통의 종교입니다. 증산계는 한말 사람인 증산 강일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증산의 강일순의 호입니다. 강일순은 자신이 옥황상제이며, 천하를 순유하다가 조선 땅이 어려운 것을 보고 최제우를 내려보내 도를 밝히자 하였으나 실패하자 자신이 직접 내려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질병 치유를 중심으로한 많은 이적을 보이며 곧 후천선경(後天仙境)이 올것이라고 예언하고, 태을주(훔치훔치로 시작되는 주문)수행에 정진하여 신의 경지에 오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후천선경의 출현이 자꾸 늦춰지자 제자들은 의구심을 키웠고, 결국 불산신이라고 믿었던 증산이 죽자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 때 증산의 부인이자 증산으로부터 천지공사(天地公事)의 권세를 물려맏은 그의 둘째 부인인 고판례를 모시고, 증산의 유지를 지켰던 이가 보천교의 교주가 되는 차경석입니다.


보천교주 차경석

차경석은 본래 상민 출신으로, 아버지는 동학군에 가담하였다가 죽고, 본인도 동학, 영학, 남학 등에 가담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진회 활동을 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도교에서도 활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진회는 한말 손병희와 이용구가 만든 단체입니다. 송병준이 있던 친일단체입니다.) 그는 여러 종교를 전전했지만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는데, 증산을 만나고 그에게 빠져서 집안일조차 내팽겨치고 증산을 좇았다고 합니다. 증산 역시 그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차경석이 막내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증산 사후에 고판례의 믿음을 얻어 수제자로 인정받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증산 사후 가장 막내였던 차경석이 사실상 후계자로 지목된데에 불만을 품은 제자들이 빠로 교단을 세우면서 증산계통은 본격적인 분화를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배신의 배신이 이어지는데, 하여튼 지금까지 교단이 존재하는 것이 39곳, 이름만 남았거나 사리진 교단이 12곳으로 보고된 것만 51개의 교단이 있는데, 지방이나 만주에 존재했던 것들 중 보고되지 않은 것이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확정은 지을 수 없습니다.

하여튼 사실상 후계자가 된 차경석은 옥황상제의 황후라고 할 수 있는 고판례의 접견권을 독접하고, 고판례를 사실상 감금하여 교단을 장악합니다. 후에 고판례는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듭니다. 그러나 아직 보천교라는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고, 다만 일반적으로 증산계통을 종교를 태일교, 혹은 훔치교라고 불렀습니다. 차경석은 본래 머리가 좋고 민첩했다고 전해집니다. 차경석이 능력을 발휘해 교단이 점점 커지자, 백성들 사이에는 차경석이 진인(眞人)으로 조선을 구하는 인물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차경석이 후일 황제로 등극하며, 증산을 믿으면 개벽 후 높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됩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차경석의 교단에 합류하게 되며 그 교세가 6만명에 이르게됩니다. 당시의 6만명이라는 것은 당시의 인구나 교통 통신의 발달 정도를 고려해보았을때, 현재의 20만을 훨씬 상회라는 것입니다. (6만명은 호주만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가족까지 합치면 사실상 20만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금의 대종교나 천도교, 원불교보다 더욱 컸을 것이라고 추즉됩니다. 마침내 1921년 차경석은 제단을 쌓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내며 정식 종교의 이름을 보화교(2년후 보천교로 개칭)라고 정하며 기존의 비밀스러운 포교를 벗어나 정식 포교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교세가 확장되고 차경석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총독부에서도 차경석 교단을 주목하면서 탄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보천교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찾아보기 어렵지만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사실인 것 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독립운동과 관계된 집단으로 확정짓고 차경석과 고판례를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보천교가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댄다는 소문이 만연하였고, 때문에 교단의 간부들이 여러번 구속되거나 경찰에 불려간 것은 사실입니다. 보천교 관계자들은 1920~1922년 사이 수천명이 체포되고 백여명은 징역형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다른 증산계통 교단에 비하면 100배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차경석 교단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송진우, 장덕수, 안재홍, 조병옥 등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들이 차병석과 만남을 가졌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시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회의에 김규식, 여운형, 김철수 등을 파견하는데 드는 여비 1만엔을 차경석이 직접 전달햇다는 사실을 당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가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교주 차경석 역시 1920년에 체포령이 떨어지고 여러번에 걸친 도피생활을 합니다. 후일 보천교에 대한 탄압이 어느 정도 누그러질 때에는 물산장려운동에 뛰어들기도 하고, 교육계몽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이러한 여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차경석은 뚜렷하게 독립운동의 의지를 보인 적은 없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보천교의 교세 확장에 독립운동 소문이 상당히 기여했기때문에, 이를 의식한 행동, 내지 작은 양심의 문제 정도로 해석됩니다. 뒤에 행한 물산장려운동이나 계몽운동 역시, 차경석의 사치나 민족종교의 비과학성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키고, 교단의 재정 확충을 위한 의도 역시 다분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차경석이 무엇을 했는가보다는 보천교도들이 차경석의 행동이나, 소문을 어떻게 해석해고 행동했냐일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차경석의 고천제에서 차경석이 천자, 혹은 황제를 선언하고 시(時)라는 국호를 선포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집니다. 이는 헛소문이나 보천교 내부 이탈자의 악의적인 선전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차경석은 아무리 교세가 커도 교중천자(敎中天子)를 자칭했을 뿐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던 민중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중앙 교단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는 지방에는 보천교도들이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 교단에 대한 탄압이 많았지만 차황제 출현설을 믿는 민중들의 지지는 이탈되지 않고 교세는 오히려 계속 확장되어 갔습니다.

마침내 일본 경찰은 보천교에 대한 방법론에 수정을 가합니다. 보천교를 공인함으로써 지하에서 더욱 신비화되던 보천교를 양지로 끌어내 관리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21년 부터 시작된 회유책 끝에 차경석은 1922년 2월 교단을 양지화시키고 공인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이는 공인은 아니었고 유사종교로써의 인정이었습니다. 더욱 교묘한것은 경찰은 보천교단을 인정했지만 차경석에 대한 체포령을 풀지않고 그럼에도 차경석을 체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체포하지 않지만 체포령을 풀지 않은 것은 이후 보천교의 몰락과 동시에 일어난 차경석 체포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하여튼 1922년 이후로 보천교는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네어 공개된 본부를 가지게 되고 여러 사업에도 뛰어듭니다. 각종 공장을 세우고 학교를 인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5년 보천교는 공식적인 친일의 행보를 걷게 됩니다. 보천교가 친일을 하게 된 이유는 위기감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좌우익을 막론하고 보천교는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지식인들의 규탄대상이 됩니다. 보천교의 시대일보 인수는 이러한 목소리를 더욱 부추겨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보천교 박멸운동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본래 1924년으로 약속되어있던 차경석의 천자 취임도 총독부의 공인으로 인해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었고, 자꾸 미루어지는 개벽은 신도들의 의구심을 증폭시킵니다. 이러한 교단 내부와 민족 내부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차경석은 총독부의 지원이 강력하게 필요하였고, 결국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보천교는 문화주의를 표방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의 제안을 받아, 일선융화와 보천교 교지를 알리는 시국대동단 강연활동을 펼쳐나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지방의 보천교도들에게는 충격과 배신으로 다가왔고, 좌우익의 지식인들에게는 당연히 보천교 박멸의 이유를 강화시켜주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결국 보천교의 교세는 1925년을 정점으로 쇠락하기 시작하고, 차경석의 교단기금 유용문제와 맞물려 내부의 혁식운동과 이에 대한 숙청이 계속됩니다.


조계사 대웅전이 보천교 십일전이었을 당시의 사진


정읍에 있던 보천교도들의 마을

그럼에도 차경석의 헛된 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북 정읍에 보천교 본부를 정하고 엄청난 돈을 들여 교단의 중심 본부인 십일전(十一展)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이 이야기했던 정읍 등지에 공장 등을 지으면서 교인들을 정읍 본부 주변으로 불러모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허허벌판이었던 본부 주변에는 5만호에 이르는 보천교인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교인들은 대부분 전재산을 교단에 헌납하고 차경석의 약속을 믿고 모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잇따른 사업 실패와 본부 건축에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은 본부에 모여튼 교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했던 이들은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다가 1936년 보천교 강제 해산 때 함께 해산당합니다. 이때 이글의 귀향 모습은 거지와 다름없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결국 1929년부터 보천교에 대한 총독부의 탄압이 시작됩니다. 1929년 십일전이 완고되면서 차경석이 천자에 오른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빌미로 경찰은 차경석을 포함한 보천교 간부들을 체포하여 조사합니다. 이에 차경석은 총독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심지어 증산의 교리에 회의를 표하며 교리를 수행 중심으로 수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총독부에 대한 오판이었고, 오히려 교도들에게 실망감만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1935년까지 보천교는 많은 소송(특히 헌납금 반환이나 횡령 같은 민사소송)에 휘말리게 되어 이를 빌미로 교단이 압수수색 당하는 등 수난을 겪다가 결국 1936년 차경석의 죽음 이후 해산의 수순을 걷게 됩니다. 일본 경찰은 마을을 해체하고 교단의 모든 집기와 건물을 파괴하여 보천교에 대한 모든 흔적을 삭제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십일전은 해체 이전 능력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경매에 붙여져 결국 불교가 이를 인수하게 됩니다.


조계사 대웅전 건립지념 사진


보천교가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보천교는 민중의 독립운동의 의지를 바탕으로 성장하였으나, 역설적으로 교단 유지를 위해 민중의 기대를 배반함으로써 몰락할 수 밖에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만약 보천교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민족의식을 버리지 않았다면 설명 일제시대 가혹한 탄압에 시달렸어도 지금은 그 이름이라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천교는 결국 거대한 십일전 하나 만을 남긴체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보천교 해산 이후, 보천교 재건 운동이 여럿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던 중간 간부들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중앙과 먼 지방에서 활동했던 일반 신도들을 중심으로 재건운동이 진행되었고, 대부분 명확한 독립운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이 진정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