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조선시대 수군제도의 성립과 변화

同黎 2013. 5. 5. 15:25

조선시대 수군제도의 성립과 변화

 

1. 조선전기 수군 체제의 정비

조선시대 수군의 편제는 모두 왜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연악 지역을 중심으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으며 심지어 내륙 깊숙이 혹은 수도 가까이까지 왜군이 침입해온 경우도 있었다. 황산대첩 등에서 왜구를 물리친 바 있었던 조선의 태조는 개국 초부터 왜구 토벌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아직 체계적·조직적 수군제도를 정비하지는 못했고 임시방편으로 각 지방에 수군도절체사를 파견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수군 체제 정비가 시작되어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정점으로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의 관직이 설치되었다.

본격적인 수군 체제의 정비와 확장은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수군을 확대하면서 세종대에는 5만명 정도가 되었고, 그 이후로도 4만명 이상을 유지하였다. 군선 건조에 대한 관심 역시 확대되어서 태종 때 처음으로 귀선(龜船)을 건조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830척에 이르는 군선를 보유하게 되었다.

수군의 관칙체계도 정비되어 세종대에는 수군절도사-수군첨절제사-수군만호의 일원적 지회체계가 성립되어 경국대전에 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도에는 수군절도사가 수군첨절제사 1인을 거느리고, 수군첨절제사는 7~10명의 수군만호를 거느리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일본과 가깝고 왜구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던 남해안 방어를 위하여 경상과 전라 양도만은 좌우도로 나누어 각기 수군절도사를 두었고 수영(水營) 역시 2곳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 때 전라좌수영도 설치된 것이다.

이러한 수군 체제의 정비를 통해 대규모 대마도 정벌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왜구에 대한 군사력 우위를 바탕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는 대신 이들과 공무역 관계를 설정하고 왜관을 설치하는 계해약조를 체결할 수 있었다. 때문에 세종~세조에 이르는 시기까지 조선의 거의 왜구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2. 임진왜란과 통제영의 설치

조선전기 수군체제는 정비되었지만 문제는 수군의 역이 매우 고되었다는 것이었다. 수군의 복무기간은 1년에 6개월이나 되었으며 근무 환경도 좋지 않았고, 배가 침몰할 경우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성도 있었다. 게다가 수군은 조운과 수영 소속의 논밭을 경작하는 등 각종 잡역에도 동원되었다. 때문에 수군의 차츰 기피하는 역이 되었고, 사람을 사서 대신 보내는 대립(代立)이 성행하게 되었다. 수군만호 등의 관리들이 수군들에게 대립의 대가로 포()를 받아 챙기는 일이 성행하면서 수군의 이탈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때문에 점차 수군은 신분이 불분명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자들로 충당하게 되었고 수군의 신분 또한 하락하여 신분은 양인이지만 역은 천한 신량역천(身良役賤)과 같이 되었다.

국가는 수군의 이탈과 축소를 방지하기 위해 수군을 세습되는 역으로 고정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수군역에 대한 회피가 지속되자 어쩔 수 없이 수군의 역을 져야하는 사람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어, 도망가거나 세력가의 노비가 되어 역을 피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수군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조잔해진 상태에서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 영의정 유성룡(의 추천으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전라좌수사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이순신을 거북선 등 새로운 전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정비해 관군에 첫 승전보를 안겼다. 임진왜란에서 수군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수군체제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재기되었다. 특히 일본과의 전쟁시 가정 먼저 접전하게 되는 충청·전라·경상의 삼남지방 수군을 통합적으로 통솔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전까지는 각 수영의 수사가 관할지역 내에서만 움직였기 때문에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도 조정의 허락을 받고 경상도로 출동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전쟁중인 선조26(1593) 삼남지방 수군을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창설되고 이순신을 초대 통제사로 임명하여 삼남지방의 다섯 수영(충청수영, 전라좌·우수영, 경상좌·우수영)을 총괄하게 하였다. 이후 4대 통제사 이시언에 이르기까지 삼남 수사 가운데 전라좌수사가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니고 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최초의 통제영은 당시 이순신이 주둔하고 있었던 한산도의 한산진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칠천량해전의 패전 이후 고금도로 물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래도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4대 통제사인 이시언(李時彦, 이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에 객사인 진남관을 짓고 전라좌수영성을 축조하면서 전라좌수영이 통제영의 역할을 잠시 맡게 되었다. 그러나 5대 통제사인 유형(柳珩)이 경상우수사로서 통제사에 임명되면서 이후 경상우수사가 통제사를 겸하게 되었고 통제영 역시 경상우수영이 있던 거제도의 오아포진으로 옮겨졌다가 선조 37(1604) 지금의 통영(조선시대의 고성군 두룡포)로 이전되었다.

통제사가 창설되면서 비로소 수군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었다. 그동안 수군 최고지휘관이 부재하여 육군 및 다른 수사와의 갈등이 빈번하였다. 이순신과 원균(元均), 이순신과 권율(權慄)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창설되면서 이러한 갈등은 상당부분 해결되게 되었다. 또한 통제사가 남해의 수군을 총괄하면서 전력의 집중과 용이해지게 되었다. 통영을 중심으로 각종 수군진이 설치되어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하루이틀 사이에 남해의 주요 수군기지 병력이 집중될 수 있게 되어 대()일본 방어체계가 공고해지게 되었다. 때문에 17세기 내내 통제영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통제사의 권위는 점점 더 높아지고, 통영으로 많은 군비가 집중되게 되었다.

 

3. 정묘호란과 통어영의 설치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통제영의 중요성이 급부상하였으나, 정묘호란으로 동시에 만주족의 침입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 이후 조선의 방어체제는 진관체제 같은 지역 거점 방어에서 수도인 한성, 그리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수도방위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 위기상황시 정부가 옮겨가서 농성할 한성 주변의 방어지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요새화된 방어지가 바로 남한산성과 강화도였다. 그 중에서도 북방민족은 바다를 잘 건너지 못한다는 특성을 고려해 강화도가 주요한 방어지로 급부상했다.

강화도 수비체제 강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통합적인 서해안 방어의 필요성이 동시에 제기되었다. 그래서 경기 남부에 위치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다시 강화도 옆의 교동도로 옳겨가게 되었고, 인조 11(1633)에는 마침내 경기수사를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御使)로 승격시켰다.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충청·황해의 세 수영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였다. 문제도 통제영과 통어영에 동시에 소속된 충청수영이었는데, 왜군의 침략시에는 통제영에, 북방의 침입시에는 통어영의 지휘를 받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조선후기의 수군 지취체계는 이렇듯 서해의 통어영, 남해의 통제영이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방안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