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선생을 추억하며
윤 소 영
추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셨다. 어림잡아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으로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지난 봄에 뵐 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 고생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냥 잔병치레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갑자기 그런 말씀을 듣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추석쯤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때 다시 의논하자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추석 다다음날 사모님의 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선생을 찾아뵈니 힘겹게 단 두 마디 말씀만 하셨다. 한참 물끄러미 나를 보시다가 “돌아가야겠어.” 또 한참이 지나서는 “이번 생에서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진 가봐.” 그래도 내일쯤 다시 찾아뵈면 더 하실 말씀이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그만 오늘 아침 훌쩍 떠나버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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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나도 마흔을 넘기고 오십 줄에 접어들다 보니 사람이란 결코 단순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기질에 따라 나름대로 몇 가지 상이한 면모를 갖고 있겠지만, 선생의 경우처럼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조화시킨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일반 시민들은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실린 선생의 칼럼이나 선생이 사회를 보시던 텔레비전 시사토론을 더 기억할 것이다. 하기야 1850년대의 마르크스에게도 저널리즘이 단지 호구지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마르크스나 정 선생이나 모두 경제학자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1944년 아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경북중학교와 온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셨다. 64학번으로 이른바 6‧3 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상대신문>을 매개로 학생운동에 투신하셨고, 이 때문에 학부를 ‘5학년’까지 다니셨다. 석사과정에 진학하신 후에도 선생은 학생운동을 정리하지 않으셨는데, 그 시절 상대와 문리대‧법대‧사대 후배들을 아울러 한국사회연구회(한사)를 조직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선생이 아끼시던 한사 후배 중 하나가 아직도 노동자운동의 일각을 지키고 계신 김승호 선생이었다.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1970년에 선생은 피아노를 전공하신 박양선 여사와 결혼하여 곧 연년생인 유경‧유신 두 딸을 얻으셨다. 1972년 석사과정을 수료하신 후에 선생은 한국일보사를 거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셨는데, 입사 동기 중 한 분이 나중에 <이론>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시던 정춘수 선생이었다. 그러나 가톨릭 노동사목이나 학생운동과도 관련이 깊었던 선생은 그런 인연으로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얻어 곧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1973년 루뱅에 도착하신 선생은 학부과정부터 경제학 공부를 새로 시작하여 1981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학위를 끝낸 후 루뱅대 경제와사회연구소에 남을 수도 있었던 선생은 귀국을 결심하셨다. 알다시피 5공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 초는 너도 나도 도피성 유학을 떠날 때였고 학위를 끝낸 사람은 망명객을 자임하면서 귀국을 꺼릴 때였다. 그러나 1982년 선생은 영국에서 학위를 끝낸 김수행 선생과 함께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부임하셨다. 나와의 인연도 그때쯤 시작된 것인데, 1984년에 이영훈 선배와 함께 신임 교수로 선발된 것이었다. 강남훈 교수는 1985년에 임용되었다. 그렇게 해서 창설된 한신대 경상학부는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가, 1986년 겨울 학내 민주화 투쟁에 연루되어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해임되면서 한신대 경상학부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사실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한신대에서 해임된 것은 경상학부 교수 10명 전체가 연대로 져야 할 책임을 도맡으신 때문이었다.
그 후 김수행 선생은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초빙되어 해임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지만, 그런 행운이 없었던 선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널리즘에 몸을 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울상대 경제학과 출신인 박현채 선생의 선례에 따라 경제평론가를 자처하신 선생은 1988년 창간 시절부터 1990년대 내내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지내셨다. 그 때의 성과가 바로 1989년부터 매해 한 권씩 묶어내신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인데, 2002년까지 거의 격년에 한 권씩 나온 경제평론집은 모두 여덟 권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이른바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적 변질을 고발하는 <중국 경제 산책>을 쓰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신대학교에서 해임된 후에도 선생은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셨는데, 강의실은 언제나 열정과 토론으로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1987-89년에는 당시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였던 한국 사회 성격 논쟁의 이론적인 쟁점들을 해명하기 위해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네 권을 편역하셨다. 이는 1984년에 나온 두 권짜리 편저 <한국자본주의론> 및 <세계자본주의론>의 후속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1992-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마르크스주의의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동인지 <이론>의 초대 편집위원장으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남한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맏형 역할을 맡기도 하셨다. <노동가치이론 연구>가 출판된 것도 바로 1993년이었는데, 이윤율 저하를 통해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 자본주의를 분석한 박사논문을 중심으로 <자본> 전체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한 이 책은 아직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본 문헌으로 남아 있다.
1997년 <이론>이 폐간되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게다가 서울대와 고대의 강의까지 없어지면서 선생은 부쩍 쓸쓸해하시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덕분에 길거리나 산행길에서 아니면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선생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속 모르는 이들 생각처럼 그것이 마냥 신나는 일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1999년에는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로 임명되기도 하셨지만, 그것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 중에도 선생은 <노동가치이론 연구>의 후속작을 구상하여 2년 전쯤 원고를 거의 완성하셨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결국 출판이 미뤄지고 말았는데, 아마 마지막까지도 못내 아쉬워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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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선생에 대한 평가는 물론 역사의 몫으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처럼 오해를 받아온 분도 그리 흔치만은 않기에 한두 가지 변론 아닌 변론을 적고자 한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정운영 선생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자본의 하나로 꼽히던 조흥은행 창업주의 동생이었다.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이 경북중학교를 졸업한 것은 가족이 대구로 피난했던 때문인데, 그러나 동경 유학생 출신의 ‘한량’이신 부친은 곧 가산을 탕진하셨다. 기울어진 가세를 상징하는 일화로 선생의 ‘식탐’을 들 수 있겠다. 한창 자랄 나이였던 선생은 식은 밥이든 묵은 김치든 눈에 띠는 대로 입에 움켜 넣고 모친의 매를 피해 뒷간으로 달아나셨다고 한다. 선생의 집 여기저기에 사탕이나 과자 그릇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놀려대곤 하던 내게 언젠가 변명처럼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 겉으로는 같이 깔깔댔으면서도 속으로는 짠했던 생각이 난다.
남편과 사별하신 후 더욱 생계가 막연해진 모친은 선생과 작은 아들을 데리고 고향인 아산으로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다.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신 선생이 온양고등학교로 진학하신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 시절 선생은 전교 1등을 도맡긴 했지만 온양역 근처에서도 아주 유명하실 정도였다. 아마도 그 때문에 재수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울상대에 진학한 선생은 경제학과 선배인 신영복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행로를 크게 바꾸셨다. 그래서 철없던 시절 나는 이문열 씨의 <영웅시대>를 흉내 내어 선생을 ‘회개한 부르주아’라고 놀려대곤 했다.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아마 말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중앙일보>로 옮기신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사임하신 것은 결코 선생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국외자인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창간 시절부터 복잡했던 <한겨레신문>의 내부사정이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요인이었다는 생각이다. 왜 하필 <중앙일보>냐는 힐난에 대해서는 <한겨레신문>과의 차이를 그리 과장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중앙일보>로 옮기지 않고 <한겨레신문>에 그대로 계셨더라도 선생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나 이른바 386세대의 포퓰리즘적 정치행태에 대해 비판하셨을 것이다. 물론 50대 후반에도 전세 집을 구해야만 했던 선생의 고단한 경제사정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청빈이라는 미덕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재물욕이라는 악덕에 빠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한겨레신문>을 그만두시고 나서 정춘수 선생을 비롯한 몇몇 지기들의 주선으로 <중앙일보>로 옮기시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유들을 짐작하고 있던 나로서는 별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었고, 김승호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이 <중앙일보> 논설위원직을 이용해서 명예욕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오해다. 과거지사에 대해 가정을 세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직을 사임하면서 선생이 저널리즘을 아주 떠나실 수도 있었다. 신영복 선생을 비롯한 몇몇 사회과학 전공 교수들이 선생과 나를 성공회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초빙하려고 시도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신대‧성공회대‧상지대가 이른바 진보대학 네크워크를 구상하던 중이어서 세 대학 사이의 역학관계가 아주 미묘해졌고, 그 때문에 신영복 선생 등의 시도는 막판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한신대 경상학부에 걸었던 선생의 꿈이 성공회대 경제학과에서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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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내가 선생을 무조건적으로 변호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기에, 선생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 적고 싶다. 사실 선생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선생이 위암 선고를 받기 전후였던 것 같다. 내가 만 여섯 해째 조교로 있었던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로 바바리 차림의 선생이 찾아오셨다. ‘긴’ 키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한 존댓말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가 일반균형이론을 전공한다는 정운찬 교수의 말씀을 들었노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와서는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고 특히 알튀세르주의에 심취해 있노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만 당황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짐작컨대 아마 미시경제학을 전공한 신임 교수를 물색하시던 중이었던 것 같다. 바로 그 때 거시경제학 전공 교수로 선발된 사람이 이근식 선배였다. 결국 나는 그 이듬해 남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메카라고 불리던 한신대 경상학부 신임 교수로 선발되었다.
당시 나를 교수로 임용하는 조건은 이듬해까지 박사논문을 쓴다는 것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나를 닦달해서 두 해가 지난 1986년에 발리바르의 경제학 비판을 주제로 논문을 쓰게 한 것은 물론 선생이었다. 그런데 논문이 원체 부실하기도 했지만, 내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한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게 된 심사교수들이 큰 충격을 받으셨던 모양이다. 3심에 와서 심사교수들이 논문 주제를 문제 삼기 시작하면서 지도교수이신 임원택 선생이 마르크스와 베버의 비교로 논문 주제를 변경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심사를 받지 않을 테니 학위를 주실 테면 주시고 마시려면 마시라고 떼를 썼더니, 심사교수셨던 선생이 지도교수와 다른 심사교수들을 일일이 설득하여 결국 그대로 학위를 받게 해주셨다.
1985년 1학기에 설립된 한신경제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으신 선생은 내게 이제 학위논문도 끝났으니 연구소 세미나를 위한 워킹페이퍼를 한두 편은 써야 한다고 강권하셨다. 그래서 1986년 2학기에 쓴 것이 한국 사회 성격 논쟁을 통해 박현채 선생을 복권시키려는 글 한 편과 발리바르의 유물변증법을 소개하는 또 다른 글 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의 해임 절차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이 두 편의 워킹페이퍼는 연구소가 연간으로 발간했던 <경제와 사회> 2집에 실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남한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한신대에서 해임된 후에도 나에 대한 선생의 관심, 아니 사랑은 언제나 각별하기만 하셨다. 1987년 기흉이라는 병으로 갑자기 입원하신 선생이 내게 서울대 경제학과 강의를 맡기셨는데, 1990-92년간 서울사회과학연구소(서사연) 경제학 세미나의 성원들은 대부분 그 강의를 들은 후배들이었다. 1992년 동인지 <이론>의 창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초대 편집위원장을 맡으신 것도 <한겨레신문>의 복잡한 내부사정을 짐작하던 나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또 1994년 내가 <이론> 동인에서 탈퇴하고 과천연구실을 시작했을 때 선생은 무조건적으로 과천연구실과 나를 후원하고 격려해주셨다. <한겨레신문>을 그만두시기 직전인 1999년 말에 선생은 내게 이경‧조준상‧이주명 등 후배 기자들을 소개시켜주셨는데, 그 인연으로 이듬해 조준상 기자가 신설한 <가리사니>를 통해 처음으로 칼럼이라는 것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늘 내 글을 이두로 쓴 것이라고 놀려대던 선생은 못내 불안하셨던지 나를 집으로 불러 첫 칼럼 한 편을 손수 다듬어주시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생활에서도 선생을 닮아가는 것을 깨달은 것은 요즘 들어서다. 한신대 경상학부 시절이나 <한겨레신문> 시절 선생이 정장을 한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학부 때부터 양복을 즐겨 입고 넥타이도 곧잘 매던 내가 언제부턴가 어쩌다 양복을 입기라도 하면 불편해 하고 넥타이는 죽어도 매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또 선생에게 포도주를 배운 내가 몇 해 전부터는 포도주만 마시게 되었다. ‘세미나 마르크스주의자’로도 모자라 ‘와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생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알려드리자면, 선생과 내가 즐겨 마시는 포도주 한 병 값은 맥주 두 병 값 정도다. 물론 맛은 더 좋고 건강에도 더 좋다.
그러나 선생과 나 사이에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김승호 선생의 뒤를 이어 내가 선생에게 끝없이 대들고 떼를 쓴 거의 유일한 후배였을 것이다. 물론 내 경우는 고질적인 철없음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한신대 경상학부 시절 나는 말끝마다 “선배, 마흔 넘으면 죽어야 해요” 했었는데, 나중에 선생은 “마흔 넘었는데 너는 왜 안 죽냐?” 하면서 나를 놀려대시곤 했다. 내가 철이 들면서 사람의 기질, 즉 능력과 성격의 차이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은 모두 선생과의 갈등 덕분이었다.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선생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조화시키실 수 있었다. 선생은 인간관계의 폭이 아주 넓으셨지만, 나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우리 둘 사이의 원칙적 차이가 아니라 기질적 차이로 이해하게 된 나는 더 이상 선생과 갈등을 빚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선생은 내가 철이 들어가는 십 년 세월을 사랑으로 지켜보셨던 것이다.
만으로 꼭 열 살 차이인 선생과 내가 서울상대 경제학과 선후배 사이이긴 하지만, 나는 우리 둘이 학연으로 묶여 있다고 생각한 적이 맹세코 한 번도 없었다. 경복고등학교 출신인 나는 학부와 석사과정 시절 워낙 ‘마당발’이어서 아래위로 너덧 기 정도의 동창들과 친하게 지냈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이든 지방이든 다른 고등학교 출신들도 아래위로 한두 기 정도는 알고 지냈다. 그러던 내가 박사과정부터 고등학교나 대학 동창들의 모임에 나간 것은 두 손은커녕 한 손으로도 꼽고 남을 정도다. 그런 나를 두고 내가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서울대 경제연구소 조교로도 몇 년 같이 지냈던 이병천 선배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소영아, 사상에 따라 친구도 달라져야 한데이” 했던 충고 때문인 것 같다. 말하자면 서울대 경제연구소, 한신대 경상학부, 서사연, <이론> 동인, 과천연구실,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선생 없이는 그런 내 세상도 없었을 것이다.
‘정 선배’는 나의 스승이었다. 게다가 선배는 자신의 세상을 만드는 대신 내가 내 세상을 만들어가는 스물 두 해 세월을 늘 한결같은 사랑으로 돌보아주신 형이었다. 아니 아버지, 아니 어머니였을까.... 그런 선배 때문에 나는 세 번째 울고 있다. 첫 번째는 선배가 해임되었던 1986년 겨울, 두 번째는 선배의 복직을 위한 한신대 학생들의 투쟁이 좌절되었던 1989년 겨울이었고, 세 번째가 바로 올 가을이다.
200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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