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작변-만들어진 사건, 은폐된 기억
정조의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정치 기간 동안 정조가 추진해온 수 많은 정책들이 무산되고 다수의 정치가들이 숙청되었다. 이 때 노론 벽파는 남인들에 대한 정치 공세를 통해 그들의 정치적 재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를 들 수 있다. 신유박해는 노론 벽파가 천주교에 경도된 기호 남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종교적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인은 두 부류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기호 남인과 영남 남인이다. 당시 남인은 천주교도라는 도식 아래 신유박해를 통해 남인이 대거 몰락했다고 역사적 판단을 하지만 영남 남인은 천주교에 관심이 거의 없었고, 신유박해 당시에도 처벌 받은 영남 남인은 거의 없었다. 즉 신유박해를 통해 축출된 남인은 기호지역의 남인이었고, 영남지역의 남인은 아니었다. 영남남인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온 사건은 “인동작변(仁同作變)”이었다.
1. 1800년 인동작변의 발발
경상감사 김이영은 8월 18일 인동부사 이갑회로부터 비밀 첩보를 한통 받았다. 16일 새벽에 장시경, 장시욱, 장시호 3형제와 장시경의 아들 장현경이 동네사람 60명을 대동하고 관가에 난입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 남산에 거주하는 유한봉이 도망치다 나졸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다음은 심문의 내용이다. 사건은 추석날인 15일 초저녁에 시작되었다. 장시경은 동네사람들을 모아두고 “국왕(정조)이 약을 잘못 쓴 탓에 승하하셨고, 사왕(嗣王)은 고단하며 국사는 다난하다. 이 틈을 타서 감사, 수령들이 모두 노론들로 채워졌다. 나는 영남의 사대부로써 장차 국가를 위해 군사를 모아 상경하여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인동부사 이갑회는 포교들로 하여금 관련자들의 체포를 지시했다. 그러나 장시경과 장시욱은 낙수암에서 투신자살하여 즉사했고, 막내동생 장시호는 먼저 투신한 형들의 시신위에 떨어져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목숨은 건졌다. 그리고 장시경의 아들 장현경은 도망쳐 행방이 묘연했다. 이것이 인동작변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전말이다.
경상감사 김이영의 조사보고서는 사건 발생 13일만인 29일 중앙으로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그날 바로 형조판서 이서구를 영남안핵사에 임명하고 당일 경상도로 내려갈 것을 지시했다. 이서구는 김이영과 더불어 공동 조사관이 되어 진상 조사 작업에 착수했고,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9월 23일에 중앙에 제출되었다. 한마디로 특검조사.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작변의 핵심 주모자는 장시경이었다. 길흉을 점치는 잡술을 주로 공부한 그는 귓병이라 칭탁하고 깊은 곳에 홀로 거주한 아주 불령스러운 인물이었다. 그의 부자와 형제들이 그를 신령처럼 믿고 의지하고 노복들이나 동리의 상놈들이 그를 생불이라 떠받들었으며 그가 한번 몸을 드러내자 추종자들이 사방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시경 형제를 제외하면 동조세력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인동작변은 핵심 주모자 장시경과 그에 동조한 동생들, 아들, 그리고 행동책인 노비 영태가 주동이 된 단독 범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핵심 주동자 장시경의 장기음모 구상이나 여타 세력과의 동조여부, 그리고 작변의 구체적 정황에 이르기까지 숱한 의혹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생불이라고 하지만, 실제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통 성리학자였다. 여타 세력과의 동조도 없이 형제와 자신의 노비만 참여했으며 그들이 관가에 난입할 때 가지고 갔던 무기는 겨우 나무 막대기였다. 이런 이유로 정순왕후는 이 사건을 역모사건으로 규정할 수 없었다. 파리 앞에 칼을 빼드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 심환지ㄷ지는 이들을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하여 결국 주모자 장시호는 사형을 받고 나머지 친척들은 유배형을 받거나 노비로 전락하였다.
2. 또 다른 증언들
그러나 이사건과 관련된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 8월 15일 초저녁에 발생했을까. 명절 분위기로 설레어야 할 그날 저녁 장시경은 왜 그러한 일을 벌였을까. 다행히 의문들을 해명해줄 기록들이 여럿 본재한다. 장시경 집에 전해오는 증언록과 정약용의 기록이다. 이 두 기록을 중심으로 인동작변의 또 다른 사실들을 추적해 보자.
장시경의 본가에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사건의 주인공은 장윤혁과 인동부사 이갑회였다. 사건은 추석을 며칠 앞두고 인동부사 이갑회가 그의 부친 생신 축하 행사에 지역 유지들을 초청한데서 출발한다. 정조의 죽음에 슬퍼하던 장윤혁은 노론 무관 이갑회의 이러한 행동에 분개하고 초청을 거절했다. 정조의 국상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이갑회가 행사를 마치고 남은 음식을 보내오자 그것마저 거절했다.
장윤혁의 이러한 행동에 당황한 이갑회는 자신의 범법 사실을 은폐할 구실을 찾고자 했다. 지방관이 국상 줄에 잔치를 벌이는 행위는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갑회는 평소 장윤혁 가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해 개인적인 감정도 품고 있었던 찰라였다. 결국 이갑회는 음모를 꾸미기로 했다. 아전과 공모하여 장윤혁의 집에 소머리를 던져두고, 군졸을 동원하여 소머리를 찾아낸 뒤에 장윤혁이 국장 전에 소를 도축했다고 그의 노비를 구금했던 것이다. 장남인 장시경이 관가에 항의했으나 그마저도 구속되고 말았다. 다시 장씨 집안의 사람들이 몰려가자 이갑회는 그들이 관아를 침범하고 서울로 진격하여 집권 노론세력을 척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장시경은 투신자살했던 것이다. 이갑회는 곧 경상감사에서 이 사실을 은폐보고하고 역모사건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3. 정조독살설의 유포의 노론 벽파의 대응
부친 생신 잔치를 둘러싼 인동부사 이갑회와 장윤혁 사이의 단순한 대립이 당대를 대표하는 역모사건으로 발전된 것은 무엇일까.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조 독살설이었다. 이 소문이 없었다면 장윤혁 부자의 거친 행동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정조의 실제 사인이 무엇이었던 간에 정조 독살설이 확산될 여지는 많았다. 우선 정조가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조의 투병 소식을 전한 조보의 내용이 처음부터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파장은 정조와 관련된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 은폐되었다는 의혹으로 쉽게 번질 수 있었다.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정조의 급서 이후 정순왕후의 수렴첨정, 노론 벽파 정권의 출범이라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 한층 커져갔다. 그와 함께 정조 독살설의 확산 속도는 매우 빨랐다. 이미 정조 독살설은 서울의 수많은 관료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었고 이후에는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노론 벽파의 핵심부는 소문의 확산을 틀어 막을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정순왕후는 두 차례의 전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경향에서 괴이한 문장을 내어 소문을 유포시키는 자들”과 “중외의 어리석은 무리들로 혹 무지하여 망령된 짓을 하는 자들”을 난적으로 간주하여 “부득이한 조처를 취하고”, 이들에 대해 “시험삼아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즉 시범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는 공갈과 협박이었다. 정순왕후의 전교가 내려지자 중앙의 관료들이나 서울 유생들은 크게 움츠러들었다. 정순왕의 전교는 곧 이어 단행된 인사조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전참판 이서구는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같은날 노론 시파였던 경상감사 신기는 파직되고 충청감사였던 김이영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정조 말기 심환지의 심복이었다. 노론 벽파는 그들의 전략을 충실하게 실행해 옮길 인물이 간절히 필요했고,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 발탁된 이들이 바로 이서구와 김이영이었다. 두 사람의 합작품이 바로 인동작변이었다.
노론 벽파의 입장에서 볼 때 인동작변은 기회였다. 장윤혁-장시경 부자가 이갑회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정조 독살설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정조 독살설의 조기 차단에 고심하던 노론 벽파들은 이 사건을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결국 인동작변은 노론벽파 핵심부가 작전 명령을 내리고 이서구와 김이영이 실행에 옮긴 정치적 조작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 김성우, “1800년 인동작변을 둘러싼 다중의 시선들”, <역사와 현실> 8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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