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9차

9번째 간사이원정기 - 4일 히로시마2 (히로시마성広島城, 히로시마대본영터広島大本営跡)

同黎 2015. 12. 25. 22:28



이제 히로시마성으로 간다.

히로시마성까지는 버스가 더 편하다. 버스를 타면 바로 성 북쪽에 내려준다.

여기서 동문까지 걸어가야 한다.


검은 색의 천수각 모습


히로시마성은 혼마루와 니노마루 부분만 남아 있고 혼마루는 섬처럼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히로시마 원폭을 제대로 맞고 모든 건물이 소멸되었다가 복구한 것이다.


동북쪽 모서리


해자가 정말 넓어서 강 같다.


천수각이 멋지게 보이는 풍경


거의 다 왔다


히로시마성(広島城)은 원래 모리씨의 영지였다.

교토에서 규슈로 이르는 두갈래 길인 산양도와 산음도가 만나는 곳이었던 이 곳은 본래 다케다씨의

영지였지만 다케다씨가 멸망하고 모리씨가 자체적으로 성장하면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대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본래 모리씨의 거성은 인근의 요시다 코리야마성(吉田郡山城)이었지만

모리 데루모토는 도시가 성장하자 당시 삼각주였던 이곳에 성을 새로 쌓고 히로시마라고 하였다.

그 후 모리 데루모토는 주코쿠일대를 지배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오대로(고다이로)까지

올라가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 쪽에 서면서 몰락하고 결국 모리씨는 지금의

야마구치로 감봉, 이봉되고 조슈번을 이룬다. 후일 요시다 쇼인, 이토 히로부미 등 조슈번 출신들이

일본 근대화와 제국주의화를 이끌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의 원류였던 히로시마는 원폭을 당하게 되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해자 바깥 쪽에 성벽의 잔해가 남아있다.


모리씨가 떠나간 히로시마성은 후쿠시마씨가 들어왔다가

후일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가 들어오면서 아사노씨의 영지가 된다.

본래 히로시마성은 5층의 대천수와 3층의 남소천수, 동소천수가 있었고 검은 성이었다고 한다.

별명은 잉어성. 해자에 잉어가 많아서라기도 하고 본래 이 지역이 잉어와 인연이 깊어서라고도 하고

이설이 많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으로 성 자체가 문자 그대로 증발하게 되는데 그 때 국보로 지정된

대천수를 비롯한 건물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복원한 5층짜리 천수각이 서 있다.

그 밖의 건물은 거의 복원되지 않았다.


해자 바깥쪽 동쪽 한켠에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의 흔적이 있다.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는 1896년 메이지 천황의 조칙에 의해 도쿄, 오사카, 나고야, 센다이, 구마모토에

설치된 육군유년학교 중 하나이다. 13세에서 15세에 이르는 소년들을 뽑아 미리 장교로 육성하여

졸업하면 일본 육사에 무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학교였다.


패전으로 폐지되었다. 원폭 당시에 히로시마성 내에 수천 명의 군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대부분 그대로 증발하거나 중상을 입없다고 한다.


옆에는 피폭 당시의 히로시마성 사진을 담은 안내판이 있다.

누군가 낙서로 천수각이 있던 곳을 표시해놨다.


이제 거의 입구에 다 왔다.


동문이 보인다.


히로시마 동문터


옆으로는 빌딩이 보인다.

1970년대 이미 성 주변에는 난개발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성벽은 잘 남아있다.


이제 성 내부로 들어간다.


동문 유적


히로시마성 공원 경내 안내도


안에 있는 건물터들


히로시마성 유적 안내도


성 안에는 이렇게 원폭을 이겨낸 나무가 몇 그루 남아있다.

이것은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 대본영에 있던 정원의 일부이다.


이것 역시 대본영 터에 있던 정원 유적


건물터 한쪽에는 히로시마 대본영 터라는 표석이 남아 있다.

위에 지워진 두 글자는 사적이다. 본래 메이지천황이 행행햇던 곳은 모두 사적으로 지정했지만,

패전 이후 군국의 색채를 지우면서 모두 사적에서 해제하였다. 그래서 사적이라는 글자를 지운 것이다.


히로시마 대본영(広島大本営)은 청일전쟁을 치루기 위해 설치된 통합 군사최고통수기관이다.

히로시마는 한반도와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여기에 대본영을 설치했고, 메이지 천황도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여기에 행차하여 살았다. 지금도 당시 메이지천황과 소헌황후가 살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이후 대본영은 러일전쟁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 전쟁 때 세워진다. 히로시마 대본영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였던 근거지로 우리에겐 매우 의미있는 곳이다.


대본영터 설명문


다른 건물 유적


이렇듯 히로시마는 군사도시로 성장했고

원폭 당시에도 일본군 2총군 수만 명이 여기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제 천수각이 보인다.



천수각 기념사진



많이도 찍었다.


이제 히로시마성으로 입장

코난패스가 있으면 입장료가 무료다.


아래로는 소천수각 터가 남아있다.


입장하면 볼 수 있는 석단

이 석단은 옛 모습이라고 한다.


본래 히로시마성의 복원 모습

건물로 가득찬 큰 성이었다.


피폭 직전의 대천수각

근세의 성곽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원폭으로 사라졌다.


피폭 이전의 사진

군대가 들어가 혼마루어전 등 많은 건물이 사라지긴 했지만 천수각 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폭 후 이렇게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성 한쪽에는 이렇게 일본식 갑주를 입어볼 수 있는 체험관이 있다.


군대 간 김동영




나도 기념사진


아예 하오리까지 다 입어 본 김동영


저 투구 꽤 무겁다.


똥폼잡는 김동영

훈련소는 따뜻하니?


성의 2~4층은 박물관이고 마지막 5층은 전망대이다.


히로시마 시청과 현청 등 건물들이 보인다.


돔도 보인다.




경찰서와 재판소 등


해자가 아주 넓다.


우리가 들어온 히로시마성 공원 전경



이제 성을 나온다.


나오면서 기념사진


소천수각터가 보인다.


소천수각들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계획도 없는 듯하다.


이제 남쪽의 니노마루 방향으로 나간다.

나가는 길에는 히로시마 고코쿠신사(호국신사)가 있다.

도쿄의 야스쿠니를 총본산으로 하는 우익 신사의 대표주자이다.


남쪽 성벽들


다리를 건너면 니노마루가 있고 거기 건물은 일부 남아있다.



원폭을 맞고도 살아남은 벚나무들

이런 나무들을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니노마루 전경


남쪽 성벽


복원된 니노마루의 망루와 오테몬(대수문) 등에는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별로 볼 것은 없어 보인다.


건너편에서 보이는 신사


거리를 건너 이제 성을 나선다.


뜻밖에 대본영터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히로시마성이었다.


이제 버스를 타고 마지막으로 원폭돔을 보러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