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교양 불교미술

불교문화의 개관과 한국불교 약사

同黎 2018. 7. 17. 02:26

1. 개관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를 가리킵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천 수백여년동안 불교는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도 한국인의 절반 정도가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전통사찰만 수 천 곳에 달할 만큼, 불교 문화유산 역시 많습니다. 따라서 불교문화를 파악하는 것은 답사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불교문화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러 불교와 불교문화재의 용어들이 한자로 되어있고,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무조건 외우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불교는 답사수업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치를 떠는 부분이 되어가는 것 같네요. 하지만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본 의미를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답사지 중 많은 곳이 불교와 관련된 곳이니 만큼 불교문화에 대하여 이해한다면 우리 문화재를 더욱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1-1. 한국불교 약사(略史)

①불교의 탄생과 분열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 북인도 룸비니에서 샤카족(석가족)의 왕자로 타어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계급차별적이었던 기존의 브라만교를 넘어 계층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구도를 통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을 펼쳐 많은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그의 사후에 500명의 제자가 2차례에 거쳐 결집하여 불경이 탄생하고 계율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리와 계율에 대한 차이가 드러났고, 결국 불교는 상좌부(上座部), 즉 소승(小乘)불교와 대중부(大衆部), 즉 대승(大乘)불교로 분할되게 되었습니다.

 

②불교의 동전(東傳)과 융성

기원전 3세기 인도의 통일왕인 아소카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함에 따라 불교는 인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융성에 따라 도덕적 결함이 생기게 되고, 교리가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변하게 되면서 인도에서 불교는 수세기에 걸쳐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기원후 1세기 경 중국 후한(後漢)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면서 불교는 차츰 그 중심을 동아시아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 4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으며 삼국이 각각 중국의 남북조(南北朝)를 통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 (372년) 전진(前秦)으로부터, 백제는 침류왕 원년 (384년) 동진(東晉)으로부터, 신라는 눌지왕 때 처음 불교를 접했습니다. 불교의 수용은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신라처럼 오랜 저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삼국 모두에서 불교는 성공적으로 정착하였고, 중국과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 유학승도 많았습니다.

통일신라에서는 불교문화가 정점에 달했습니다. 진표로 대표되는 법상종(法相宗)을 대신하여 의상과 원효로 대표되는 화엄종(華嚴宗)이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찰과 승려는 종교적 의미와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 지배층으로 변질되었고, 스스로가 대지주(大地主)가 되었고, 불교 행사나 사찰 건축에 지나치게 많은 경제적 소모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③나말여초와 고려의 불교

신라와 고려의 왕조교체기는 한반도의 불교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 교리의 해석보다 실천과 수행의 기풍을 강조하는 선종(禪宗)이 유입되면서 기존의 불교종파는 교종(敎宗)이라는 이름으로 재정립되었습니다. 선종은 그동안 경주와 왕과 귀족의 이해만을 대변했던 교종을 대체할 종파로 지방호족세력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 이후, 불교는 왕과 귀족에게 익숙한 교종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빈번해졌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왕족 출신인 대각국사 의천은 천태종을 도입하여 교종중심의 불교 통합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무신정권의 후원을 받은 보조국사 지눌은 타락한 불교계를 쇄신하기 위한 결사운동을 진행하고, 조계종을 세워 선종 중심의 불교 통합을 꾀하였습니다. 원간섭기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티베트불교가 들어오기도 하였는데, 이 결과로 불교에 대한 사대부계층의 부정적인 인식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④조선시대 이후의 불교

숭유억불의 기치로 일어난 조선에서 불교는 당연히 쇄락할 수밖에 없습습니다. 그러나 태조부터 세조에 이르는 기간까지는 왕실의 후원으로 급격한 쇄락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성종대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유가의 탄압이 본격화되고, 가속화되면서 전국의 수많은 사찰이 파괴되거나 기울어지고, 승려들은 성역(城役)과 잡역(雜役)에 시달렸습니다. 이 시기에 특별히 불교 탄압이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양란을 거치면서 승병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또 승려들의 공이 일부 인정되면서 불교는 과거와 같은 탄압을 받지는 않게 됩니다. 승려들이 각종 역(役)에 동원되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많은 승려들은 승직(僧職)을 받기도 하였고, 전쟁으로 파괴된 사찰을 복원하는 불사(佛事)도 활발해졌습니다. 이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불교 문화재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승려와 유학자들의 교류도 활발해졌는데. 학승(學僧)들은 이 시기 주로 성리학과 불교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경전연구보다는 철학연구에 전념하였고, 그 결과 불교 교리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불교계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서산-사명 계열로 정리되면서 선종과 교종이 선종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교종과 밀교의 특징까지 고루 갖추게 되는, 한국 특유의 통불교가 형성됩니다.

이후 일제시기 불교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등을 통하여 일본 불교에 종속되어 결혼을 하는 대처승(帶妻僧)들이 늘어났습니다. 해방 후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큰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결국 지금은 비구승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불교 조계종과 대처승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불교 태고종으로 정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