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0차

간사이대원정 8일 - 쿠라시키2 (오하라미술관大原美術館1)

同黎 2016. 7. 23. 04:10



마치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신전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우뚝 서 있다. 1930년 개관한 오하라 미술관이다.


이 지역의 신흥 상인세력의 후손으로 대지주이자 쿠라시키 방적, 방직, 주코쿠은행, 주코쿠전력,

쿠라보병원 등을 소유했던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지은 것이다. 이런 지역에 초대형 서양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이는 당시 1살 차이의 서양화가인 코지마 토라지로를 후원하고 있었는데 

과정에서 유럽에 유학하고 있던 그를 통해 생존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모네나

마티스의 것. 또한 엘 그레코나 고갱, 툴루즈 로트렉 등의 명품과 오리엔트 지방의 문화재도 그를 통해

수집했다. 또한 위작 논란이 있긴 하지만 고흐의 작품도 소장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루트를 통해

르누아르, 피카소 등의 작품을 수집했는데, 몇몇 작품은 이런 작품이 일본에 있는 것은 기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고 한다. 실제 몇몇 서양화는 이례적으로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국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다.

오하라의 수집품은 1920년대 일반에 공개되었고, 큰 관심을 받았다. 이에 서양미술의 수집이 큰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한 그는 계속 컬렉션을 확장하는데, 여기에는 개신교도이자 자선사업가인 이시이 주로의

영향도 컸다. 이후 친구였던 코지마 토라지로가 1929년 사망하자 이에 큰 슬픔을 느낀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당시 경영 악화의 상태에서도 1930년 미술관을 개관했고 처음 개관했을 때는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인근에 미츠비시 공장이 있었고, 히로시마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음에도 쿠라시키에는 기적적으로 폭격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대로 소장품을 지킬 수 있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장남 오하라 소이치로가 관장을 이어받아 20세기 초 서양, 특히 프랑스 회화를

대거 구입했고 또한 고대 중국미술과, 동시에 서양 및 일본 미술 수집품을 대거 늘리고 분관을 세웠다.

또한 일본 민예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전시품의 종류를 크게 늘렸다. 실제 내가 가보니 정말 하루종일

봐도 될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굳이 한국과 비교하자면 리움 정도일 것이나... 리움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후기 인상파 이후의 작품들이 화려하게 구비되어 있다.


정면이 본관인데 저게 결코 끝이 아니다.

입장료는 1300엔, 대학생은 800엔이다. IC카드 결제도 가능해서 나는 IC카드를 이용했다.


들어가면 본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건축적으로 의미가 깊은 분관과

에도시대 건물을 개조한 공예관과 동양관도 있다. 봐도봐도 끝이 없다.


전체 지도

파란색이 본관, 주황색이 동양관과 공예관, 초록색이 분관이다.


모두 2층 구조로 어마어마하게 길다.


들어가자마자 좌우로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과


역시 로댕의 <세례자 요한>이 서 있다.

이 두 작품은 원본은 아니고 1922년 로댕미술관과 협상해 주조한 것인데 2차 대전 당시

금속 공출령에 따라 녹아 사라질 뻔 하다가 기적적으로 심의회를 거쳐 살아남았다고 한다.


내부 분위기는 대략 이렇다.

아래에는 대표 작품을 소개하지만 이 밖에도 좋은 작품이 많다.


엘 그레코 <수태고지>

이 박물관의 대표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를 잉태할 것을

알림받는 장면이다. 세계적으로 드문 엘 그레코의 작품은 코지마 토라지로가 경매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하며 당시에도 너무 고가여서 수차례 사진을 보고 겨우 구입했다고 한다.


조반니 세간티니 <알프스의 한 낮>

코지마 토라지로가 11년간 벼르다가 결국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고갱 <향기로운 대기>

역시 대표적인 명작이다.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리느의 초상>


피사로 <사과 수확>

이 작품은 피사로의 대표작이며 인상파 그룹전의 마지막이었던 제8회 전시에 출품되어서

미술사적 가치가 큰 것이다. 1941년 전쟁의 상황에서 유럽에서도 판매를 꺼렸고

고가를 제시했으며 회사 경영도 어려웠지만 작품 12점과 교환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피사로 <퐁투 아즈의 론테스토 집 마당>


모네 <수련>

이 작품은 코지마 토라지로가 모네를 직접 찾아가 직접 부탁해

받아온 그림이며 답례로 일본의 수련 묘목도 건넸다고 한다.


에드몽 프랑스아 아만 장 <머리카락>

오하라 컬렉션의 1호 작품으로 코지마가 아만 장과 매우 친근했고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

처음으로 오하라에게 편지를 해 작품 구입을 의뢰했다고 한다.


에드몽 프랑스아 아만 장 <베니스의 축제>

흔치 않은 벽화 작품으로 오사카의 오하라 가문 별장 장식을 위해 그려졌다고 한다. 


에두아르 뷔야르 <감자를 벗기는 뷔야르 부인>


모로 <아가雅歌>

대단히 유미주의 적이었던 구스타프 모로의 작품이다. 성서 중 사랑노래인 아가서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앙리 르 시다네르 <황혼의 작은 탁자>


툴루즈 로트렉 <말토 X부인의 초상-보르도>

백작가의 후손이었지만 하체의 장애로 인해 귀족인 아버지에게 외면받고

파리의 서민과 뒷골목에 관심을 가졌던 그의 작품이다.


H. 오토만 <옷 벗은 소녀>


밀레 <그레이유 절벽>


장 마르샹 <이주자>


후안 그리스 <컵과 병>


뭉크 <마돈나>

한때 도난당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그림이다.


오딜롱 르동 <종탑 수리>


세잔 <목욕>

당시 유럽 유학 중이던 화가가 구입한 것을 후에 미술관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세잔 <풍경>

이 작품은 야나기 무네요시 등 비교적 자유주의를 추구했던 미술계 동인들이 추진했던

서양미술관인 백화미술관(白樺美術館)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수집했던 작품 중 하나로

관동대지진 등 미술관 설립이 좌절되자 오하라 미술관에 영구 기탁한 작품이라고 한다.


폴 시냐크 <오벨루시 운하>


P. A. 베나르 <비너스>


피에르 퓌뷔 드 샤반 <환상>


르누아르 <샘 위의 소녀>

역시 코지마 도라지로를 통해 직접 화가에게 의뢰하여 받아온 작품이라고 한다.


샤갈 <연인>


루오 <어릿광대>

역시 도난당했다가 되찾아온 작품이다.


레온 프레드릭 <모든 것들은 죽지만 그러나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를 통해 소생할 것이다>


이 초대형 작품은 본관 2층 상단에 붙어 있다. 벨기에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화가의 딸을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한데, 1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딸은 전쟁으로 인해 죽었는데,

딸을 추모하여 그린 작품이기에 팔지 않을려고 하는 것을 코지마가 억지로 사왔다고 한다.

전쟁의 어리석음과 죽은 딸이 천상에서 다시 태어날 것을 그리는 작품으로

오하라미술관의 폭 자체가 이 작품의 길이를 생각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구원을 청하는 사람들


예수의 구원

유럽 전통 종교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들어가면 압도되는 분위기가 있다.


샤를 겔랑 <탬버린을 가진 이탈리아 여자>


쿠스타프 쿠르베 <가을 바다>


샤를 코테 <황무지의 늙은 말>


카미유 코로 <미론의 풍경>


드가 <붉은 복장을 한 세 명의 무희>


모리스 드니 <파도>

역시 코지로가 드니에게 직접 받아온 그림이라고 한다. 현 일본 황태자가 매우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페르디난드 호들러 <나무를 베는 사람>

스위스 국립은행에서 지폐 디자인을 의뢰할 때 그린 그림 중 하나로 실제 화폐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에두아르 마네 <얇은 모자를 쓴 여자>


모네 <쌓은 짚단>

이 작품은 원래 가와사키 조선소를 소유한 재벌이었던 마츠카타 고지로의 소장품으로,

당시 그는 유럽 화랑에 가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전부 다 줘를 시전하는 엄청난 수집가였다고 한다.

애초에 일본의 국립서양미술관이 그의 컬렉션을 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라니 말 다했다.


앙리 루소 <파리 근교의 전망, 바뉴 마을>


브로델 <베토벤>

오하라미술관 개관 30주년 당시 처음으로 갤러리 콘서트를 열 때 관장이었던

오하라 소이치로가 첫 연주작을 베토벤의 곡으로 했는데 베토벤을 모실 수 없으니

브로델의 베토벤 상을 샀다고 말했다고 한다. 연주회를 위해 무려 브로델의 작품을 산 것


외젠 라루만스 <작은 길>

이 작품을 살 때 코지마에게 오하라는 돈 좀 그만 쓰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코지마는 이 작품의 라루만스의

대표작이 될 것이라며 굳이 샀다고 한다. 실제 이 작품을 사고 2년 뒤에 라루만스는 시력을 잃게 되었단다.


후지시마 타게지 <경도천耕到天>

이제부터는 일본 미술이다. 일본 서양화가의 조상 중 한 명으로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사에키 유조 <광고"베르됭">


아오키 시게루 <남자의 얼굴>


미츠타니 쿠니시로 <주홍 양탄자>

화가가 오하라 가문의 후원을 받은 사람으로 2대 관장인 소이치로의

적극적 구매 의사로 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코이데 나라시게 <N의 가족> 중요문화재

코이테 나라시게는 처음에 일본화로 시작하지만 후에 서양화로 전향, 1919년 이 작품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주목받고 이후 서양화의 일본화를 추진하였으나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중요문화재 지정의 폭이 커졌다는 일본에서도

근현대 회화의 중요문화재 지정은 드물다. 그만큼 큰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코지마 토라지로 <오하라 마고사부로>

오하라미술관 자체가 코지마 토라지로의 영향 아래 세워졌던 만큼 여기엔 그저 그린 작품이 많다.

바로 1대 관장이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초상이다.

 

코지마 토라지로 <자화상>

또 그의 자화상도 있다.


코지마 토라지로 <알함브라>


코지마 토라지로 <잠을 자는 어린 모델>


코지마 토라지로 <마을의 수차>


코지마 토라지로 <우활>


마츠모토 슌스케 <도회>

조르주 루오의 영향의 깊은 감화를 받았으며 전시체제로 인해 많은 억압을 받았던 화가이다.


오카다 사부로스케 <이탈리아의 소녀>


세키네 쇼지 <신앙의 슬픔> 중요문화재

세키네 쇼지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쿄의 인쇄공으로 일하다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을 읽고

혼자 서양 사상에 눈을 떴다. 또한 16세에 그림을 독학하여 19세에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술전인

이과전에 이 신앙의 슬픔을 출품해서 최고상을 받았으나 다음 해에 결핵으로 요절하였다.

이 작품은 일본 근대 서양화의 대표작으로 화가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쉬고 있을 때

본 환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당시 가난했던 그가 비싼 물감 등을 들여

경제적으로 그릴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키시다 류세이 <동녀의 춤추는 모습>


키시다 류세이 <화가의 아내>

쿠마가이 모리카즈 <태양이 죽은 날>


아오키 시케루 <향락>


마에다 간지 <두 명의 노동자>

대표적인 일본의 좌익 화가의 작품으로 작품 상단에는 노동계급은 생존에 더 불합리한 사회가

강요되고 있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불어 문장이 써 있었으나 귀국 당시에는

검열 때문에 덧칠되었다가 오하라 미술관 소장 후 복구되었다고 한다.


요루즈 데츠고로 <구름이 있는 자화상>

입체파에 속하는 화가로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다.


오기와라 모리에 <갱부>


이처럼 미술관의 규모가 대단하다.

본관 뒤편


2층으로 올라가는 길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길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서 있다. 이제 동양관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