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정석종, 「숙종조의 사회동향과 미륵신앙」,『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1984, 일조각.

同黎 2012. 9. 3. 22:47

鄭奭鍾, 「肅宗朝의 社會動向과 彌勒信仰」,『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1984, 일조각.

 

 

숙종연간의 釼契·殺主契사건이나 미륵신앙사건은 그간 학계에 잘 보고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후기 사상사의 변화를 유학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며 불교, 도교와 민간신앙의 변화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조선후기 정치사를 당쟁사로만 파악하고 당쟁의 이해도 사건 전말의 기술에 그쳐 당쟁의 사회사적 성격은 규명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관찬사료에만 집중하여 민간에 대한 사료 발굴에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상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서술되었다.

 

인계와 살주계는 대만의 정씨정권이 조선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이른바 왜서사건으로 시국이 혼란한 틈을 타 주인을 죽이거나 양반 여성을 겁탈하는 사건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종 10년 여러 명의 인계와 살주계원을 잡아들이지만 이들은 연루자를 고발치 않고 완강하게 버텼다. 인계, 살주계의 표면적 근간은 향도계로 추정된다. 노비들의 비밀결사가 표면적으로는 향도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인은 정권을 잡자마자 이들 향도계를 탄압한다.

 

그렇다면 향도계란 무엇인가? 조선후기 향도계는 상여를 메어주고 그 품을 받는 무리를 일컬었다. 그러나 그 연원을 따져 올라가보면 향도란 미륵신앙 및 용신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용화향도가 그러했고, 후삼국시기의 궁예가 그러했듯이 미륵신앙 및 그와 연결된 용신앙은 혼란한 시기에 해방을 염원하는 하층민들의 염원이 표출된 것이다. 조선 초기로 오면서 여전히 향도 기록이 보이는데, 시대를 넘어 혼란한 시기에 항상 존재했던 미륵신앙의 특성을 보아 조선의 향도 역시 미륵신앙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임진, 병자의 양란을 격은 후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에 역시 미륵신앙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에서 이어져온 미륵신앙은 숙종 14년 미륵신앙사건으로 또 한 번 표출된다. 미륵신앙사건의 사회적 배경에는 당시 조선을 휩쓸었던 기근과 역질이 존재하였다. 숙종 12년의 기근은 최악의 흉년이었던 경신대기근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흉년으로 유걸하는 자가 급증하였다. 또한 역질이 번져 많은 이가 죽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사회가 불안정하게 되어 도적이 급증하고 노비가 도망하면서 이를 추쇄하려는 주인에게 항거하는 사건이 늘어났다. 또한 지방 서리들이 수령에 대하여 지방 유생들 역시 과거에 대한 불만으로 박변하는 등 당시 사회형편은 심각한 양상으로 변전되었다.

 

불안전 대외관계 역시 영향을 주었다. 현종 14년부터 시작된 삼번의 난은 조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은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 측 사정을 탐문하였다. 윤휴와 같은 이들은 기회를 이용해 북벌을 주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삼번의 난 진압 소식이 알려지면서 북벌을 주장했던 남인은 제거되었다. 청은 조선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감시를 강화하였고, 越境採蔘事件을 기화를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잘 파악되지 않는 대만의 정씨 정권 역시 불안의 요소였다. 출몰하는 황당선은 청의 의심을 살 수 있었으며, 남인들이 이들과 연계해 정변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있었다. 특히 숙종 9년 대마도주가 정금이 조선을 침략할 수도 있다는 내용으로 보내온 왜서는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대외관계 역시 사회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륵신앙사건을 검토해보자. 『실록』에 따르면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승려 呂還이 곧 미륵이 하생한다는 설을 퍼트리고 서울로 올라와 서울이 뒤집어지길 기다리며 한 편으로는 군사를 동원해 양주관아로 진격하려 한 사건이 바로 미륵신앙사건이다. 미륵(下生)신앙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세계가 변혁되어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기를 원하는 혁명주의적 성격, 이상세계를 현실에 구현시킨다는 메시아니즘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사회를 실현시키는 수단이 모호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민중을 집합시키고 메시아와 예언자의 말에 집중하여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다.

 

『推案及鞫案』에는 이 사건이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사건의 중심지는 경기도 양주이지만, 활동지역은 황해도와 강원도에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려인 여환은 미륵삼존으로부터 종교적 영감을 받아 곧 석가의 세가 지나고 미륵의 세가 오니 미륵이 오기까지 그가 용녀부인과 결합해 용의 자손을 낳아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무녀 계화 등 무속신앙인들과 결합하여 세력을 넓혀갔다. 이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불교의 미륵신앙뿐 아니라 무속의 용신앙, 도교까지 폭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무속신앙자들은 미륵신앙자들에 비하여 세력적으로 밀리지 않고 동등하게 결합했다.

 

그러나 내부에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아전 정원태 등은 무장하여 궁궐을 습격하거나 양주를 손에 넣는 것을 주장하는 등 군사적, 정치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신앙적, 종교적 성격이 강한 이들은 군사적 행동을 꺼리게 되고 결국 정치적 성격이 강한 이들을 양주에 남겨둔 체 상경하여 비가 오면 나라가 기울 것이라는 종교적 신념에만 의지하였다.

 

사건에 관련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큰 관계가 승려 여환과 풍수사 황희를 主로 하여 여러 무속인들이 從으로 모이는 결집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하게 군사적 행동을 주장했던 정원태는 천인이고, 그 밖에 다른 관련자들도 대부분 하층민임이 드러난다. 반면 미륵신앙의 무리가 차츰 과격해지면서 이탈하거나 소극적 태도를 보인 이들은 면주인, 접주인 등 행정의 말단 소임을 맡고 있었다. 이들이 상경할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 노비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동시대 노비들의 비밀 결사체인 인계, 살주계와의 관련성 그리고 장길산 사건과의 관련성 또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비록 한 번의 상경이 실패하고 이들은 붙잡혔지만 제2, 3의 거사를 계속 계획했다는 점을 보면 미륵신앙자들의 움직임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살주계와 미륵신앙 사건은 모두 동양적 메시아니즘에 바탕하여 평등사회로의 변혁을 소망하던 용신앙과 미륵신앙이 기저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전자가 평등사회 실현의 방법이 뚜렷하지만 후자의 경우 방법이 모호하며 그를 둘러싼 알력과 모순이 존재했다. 그러나 용신앙은 조선후기 많은 변란에 영향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미륵신앙사건이 정권 교체에도 영향하였음이 분명하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여기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자작소농이나 작인들이라 생각되며 그들의 이상사회도 그들의 생활상을 타개하려는 노력이라고 보이기 때문에 중소농민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생각되는 남인의 정치적 등장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