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김용흠,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의 형성과 정치운영

同黎 2012. 12. 16. 21:20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의 형성과 정치운영 (김용흠,한국사연구132, 19) 토론문

 

김용흠의 본고는 19세기 세도정치의 원류를 찾고, 그로부터 세도정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변동으로 성장한 신분, 혹은 도태된 신분들의 불만이 나타나는 가운데, 변통론과 의리론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대립하였고, 변통론에 영향을 받은 왕은 국왕 중심의 탕평정치를 시도하였으나 궁극적으로 주자학적 의리론을 부정하지 않아서 정조 사후 대반격으로 실학파를 비롯한 개혁파들이 제거당함으로써 결국 탕평정치의 부정적 유산이 세도정치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논문의 대략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변통론·탕평론의 계보 (진보)

조광조 - 이이 - 이귀·최명길 - 박세당·박세채·최석정 - 소론탕평

영향

존왕론, 군사론 ………………………………… 영조

수정

군주도통론 ………………………………… 정조

 

의리론의 계보 (보수)

조광조 - 이이 - 김장생 - 송시열 - 한원진

 

본고의 가장 큰 문제는 소위 변통론과 의리론을 개혁과 보수, 더 나아가서는 마치 선악의 구도와 같이 대립구조로 놓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주자학적 의리를 따르고 있던 노론을 반동으로, 정조를 개혁군주로 보는 것인데, 이러한 시각은 결국 노론망국론, 성리학망국론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소론, 남인은 개혁파 앞장섰고, 노론은 지방 지주로써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여기에 반동으로 나왔던가? 잘 알려져있듯이 대동법 등의 변통에 있어서 단순히 일관적인 당론에 따라서 어느 당은 변통에 찬성하고 어느 당은 반대한다고 파악하는 것은 조선 관료들의 정책결정 과정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노론은 반동이라는 선험적 전제가 깔려있고, 한 사람의 학문이 경세론과 의리론으로 나뉘어 전해진다는 이상한 전개를 바탕에 깔아놓아 이귀·최명길 같은 공신세력과 박세채 같은 산림세력이 연결되는 기이한 족보가 완성되었다. 이는 실증적 노력 보다는 정치사를 지나치게 사상사적으로 해석하면서 생긴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탕평정치의 부정적 유산의 핵심을 주자학적 의리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는 정조에게 당시로써는 불가능한 사상적 혁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조선의 국시이고, 그 안에서 의리론만 따로 띄어서 전한다는 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김용흠의 정조의 서학 수용 등을 사상적 변혁을 예고하는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하고 있지만 정조는 서학을 명확히 邪學으로 규정하는 등 자신의 주자학적 의식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 하다. 더군다나 정조를 봉건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근대적 군주로까지 보는 것은 필자의 바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실학파를 주자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혁파로 보거나 민의 움직임을 과대평가 하는 등의 지점도 본 논문에서 평가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김용흠은 32절에 걸쳐 순조 ~ 철종대 이루어진 각종 전통 주자학적 이벤트를 강조하여 서술하여 세도정치의 세력이 경세론에 무능했음을 밝히고 여기에 대한 민의 반발이라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정치적 중요성은 조선후기 전체를 통틀어 강조되던 것이다. 더군다나 시호를 추상하거나 경연을 강조하는 것은 그다지 별다를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김용흠의 논지가 독자에게 이해되려면 왜 유독 그것이 19세기에 문제가 되는지 설명해야 한다. 또한 영정조가 사상사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19세기에 주자학을 끌어안고 있던 세도정치 세력이 낡은 세력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김용흠이 논리 전개에 사용하고 있는 이분법적 구도는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