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채웅석, <고려전기 사회구조와 본관제>

同黎 2012. 12. 21. 03:40

1. 들어가며

 

채웅석의 <고려전기 사회구조와 본관제>를 중심으로 나말여초 지역사회의 변동과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국가의 지방통치정책인 본관(本貫)제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고려전기 국가가 지방을 어떻게 장악해갔는지를 추론하고 있다. 채웅석은 타 시대와 비교되는 고려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지방제도, 특히 지역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호족(豪族)-호부층(豪富層)의 근원과 통일 이후 고려 중앙정부의 이들에 대한 대응과 지방통치전략을 사회사적 연구 방법에서 접근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 내부의 변화 모습도 추론해 볼 수 있다.

 

2. 지역 자위공동체의 성립

 

후기 통일신라 사회는 더이상 이전에 간직하고 있었던 지역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지역공동체는 이전에는 농업 생산에 있어서 공동경작을 근간으로 하는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차즘 토지의 사유화가 강화되면서 그 내부의 분화가 심화되었다. 공동체 구성원의 경영의 자립화와 그에 따른 분화가 진행되면서 농민계층의 내부 분화, 즉 몰락농민과 부농으로의 분화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것이 우리가 보통 호족(豪族), 혹은 호부층(豪富層)이라고 부르는 세력이다. 호부층은 몰락농민들의 토지를 흡수하고 이들을 용인(庸人)으로 삼아 자신의 경영을 확대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호부층과 농민층은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경주 귀족들은 소비는 더욱 심화되었고 따라서 국가의 지역 수취는 더욱 강화되는 반면, 수취된 조와 역이 농민의 재생산을 위해 투하되는 정도는 점점 더 줄어들었으므로, 지역 내부의 갈등, 즉 호부층과 농민층의 갈등보다는 지역 외부적 갈등, 즉 중앙과 지역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호부층은 차츰 변혁세력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인지해나가고 농민층을 조직하여 자신들을 중심으로 지역공동체를 재편하였다. 호부층은 신라 중앙정부의 수취에 저항하고 시대가 어지러워짐에 따라 사방에서 나타나는 초적(草賊)이나 타 지역의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군사적 자위공동체를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조세와 부역을 수취하면서 권농과 구휼, 교화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공동체 내의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재편과정에는 지역의 공동제사도 중시되었다. 공동제사를 통해 호부층은 계층 갈등을 해소하고 제사 주도층을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3.본관제의 성립과 특징

 

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호부층에서부터 나온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바로 예성강 인근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호부층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는 지역의 여러 공동체가 국가의 질서 내로 편제되어야 했다. 하지만 한꺼번에 여러 지역을 국가의 완전한 통제하에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는 공동체의 자율성과 공동체내의 계층,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고려하면서 점차적으로 지역에 중앙의 장악력을 높였다.

본관제의 성립은 호구와 양전을 파악하는 적()의 작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는 지역 공동체를 국가의 시각에서 재편하는 치읍(置邑)을 진행하여 신라의 행정구역을 해체하고 재편하였다. 치읍을 통해 일반 군현이나 향(), (), 부곡(部曲), (), () 등의 특수구역으로 행정구역이 정리되었으며, 치읍을 통해 파악된 공동체의 내용들은 지역의 호구(戶口)와 양전(量田)을 기록한 적()의 작성을 통해 체계화되었다. 이를 통해 고려전기에는 양인(良人)이면 누구나 본관을 지님과 동시에, 본관으로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서 살지도 못했고, 본관이 아닌 지역에 토지를 소유할 수도 없었다. ()의 작성과 토성의 분정을 통해 고려 중앙정부는 지역 간의 계서(階序)와 지역 내부 계층간의 질서를 더욱 명확히 함으로써, 더 이상 군사적 자위권을 가지지 못한 과거 호부층의 권위를 인정해줌과 동시에 그 영역을 한정지음으로써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고려의 중앙정부는 이렇게 지역을 일정한 통제권 아래에 둠과 동시에 더 이상 민의 누출을 막는 안정화, 규제화 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채웅석은 이러한 본관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대체적으로 성종 14년에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을 통해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성종 14년은 대체적인 지역에 대한 파악이 끝나고 당제(唐制)에 기반한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전국을 주()와 현()으로 개편하는 주현제가 이 해에 실시되었으며, 전국에 12 절도사를 파견하였다. 12 절도사를 파견한 것은 군사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특별히 지방의 분권세력에 대한 군사적 통제의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려고 고안한 장치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호부층의 자제들을 불러들여 개성에서 숙위를 하게 하여 지방세력을 억제함과 동시에 지방의 사정에 대하여 중앙에 조언케 하였고, 호부층 출신의 중앙관원을 사심으로 삼아 지방관과 향리 사이에 생기는 모순과 괴리를 보완하였다. 주요 행정구역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피혐(避嫌)하도록 하고 임기를 설정해 지방세력과의 결탁을 방지하고 중앙의 의사결정을 쉽게 따를 수 있도록 하였다..

4. 본관제에서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사회구조

 

본관제의 특징은 본관제를 통하여 사회 전반에 계서적 질서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계서제적 질서는 지역 외적 질서와 지역 내적 질서로 나뉘어진다. 지역 내적질서를 먼저 살펴보자. 고려는 적()의 작성을 통해 지역의 현황을 파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저 양인에게는 모두 본관을 내려주고, 천인에게는 본관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본관의 소유자와 비소유자간의 질서를 명확히 했다. 양인에 대해서도 그 직역을 다르게 함으로써 공동체 내의 계층질서를 구체화시켰다. 크게 나누면 정호(丁戶)와 백정(白丁)으로 나누어지는데, 정호는 전시과 체제 내에 들어가며 외역전이나 군인전 등의 지급대상이며, 정치적으로는 지배계급의 하위계층, 혹은 중간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다음에도 이야기하겠지만 같은 정호계층이라도 주군현에 편적(編籍)된 정호와 향, , 부곡에 편적된 정호는 차별을 받았다. 이 정호계층은 대부분 지방체제의 재편 때 호부층을 편성한 것으로 그 내에도 많은 계층이 편재되어 있으나 우리가 흔히 향리라고 부르며 지역사회 통치의 일익을 담당했던 계층이다. 이들은 지방관의 일을 돕거나 속현의 경우 왠만한 지방의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고려 지방사회의 계서제는 지역 외적 질서에도 적용되었다. 군현제와 부곡제, 주현과 속현의 구별 등이 그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같은 정호층이라고 해도 군현에 속하냐, 부곡에 속하냐에 따라 차별이 있었다. 그리고 주현과 속현에 따라서도 차별이 존재했다. 정호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법적 지위에 대한 다양한 구별이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포상과 처벌의 수단으로 해당 읍격(邑格)을 격상시키거나 격하시키기도 하였다. 채웅석은 이를 영역간의 계서적 지배구조라고 표현하였다. 즉 영역내의 계서적 지배구조가 영역간에도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고려 초기에 시행된 토성(土姓)의 분정(分定) 역시 계서제적 지배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불안정한 농업 생산력을 안정되게 하기 위하여 지방에 대한 일원적인 지배를 도모하기 위하여 지역의 유력한 세력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구축하게 하는데, 이 때 지역의 유력한 세력에게 토성을 분정하고 그 지역을 마치 봉읍(封邑)처럼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렇듯 각 촌락에 가장 우세한 호부층을 중심으로 토성을 분정하면서 지역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결국 위에서 이야기한 공동체 내의 계층질서를 이용하는 계서적 지배구조와 다름아니다.

특이한 것은 채웅석은 토성이 혈연적 모체로부터 분화한 동족집단이라는 의식보다는 왕에 의하여 성씨가 인정받았다는 인식을 강조함으로써 토성분정이 고려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정책의 일환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즉 나말여초의 어지러운 시기에 각자 할거하여 성씨를 자칭하던 이들에게 성을 하사함으로써 국왕의 통제권 아래에 이들을 포섭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태조 때의 사성(賜姓)이 대부분 대토호에게 이루어지는 것에 비하여 왕권을 신장하게 되는 광종 때에 사료로써 확인되는 바가 실제 출신지와 토성이 일치하는 것이며, 토성이 자연촌락 단위로 있는 것은 광종 때 비로소 의미 있는 토성의 분정이 이루어지며 이는 대토호를 경계하고 군소 토호를 포섭하려했던 광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았다.

 

5. 고려 지방향촌사회의 일면 - 향도(香徒)

 

채웅석은 고려시대 공동체적 유대관계에 대하여 <예천 개심사 석탑기> 등에 등장하는 향도(香徒) 조직을 그 표현형태로서 살펴보았다. <예천 개심사 석탑기>에 나타난 향도는 예천군 영역내의 유력층인 향리와 지방군 즉 광군의 지도부가 대거 참석하였다. 향도에는 예천군의 향리 뿐만 아니라 예천군의 속현인 다인현의 향리 역시 속해있었다. 향도의 구성원들은 석탑을 짓기 위하여 연인원 1만명을 동원하였다. 이 때 동원된 이들은 백성(百姓)이었다. 다른 금석문이나 고려사 등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고려 전기에 각 지역에서 향도를 조직하여 불사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동원되는 민()의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향도를 비롯한 불사 조직에서 본관의 영역을 바탕으로 하고, 주군현의 불사에 속현의 향리들 역시 참여하며, 참여층이 향도와 일반 백성(百姓)의 이중으로 구성된 것은 고려전기 재편된 공동체의 계서적 사회구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6. 결론

 

이상으로 살펴본 고려시대 지방통치의 특징은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기존에 지방공동체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부층을 포섭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듯 채웅석이 생각하는 고려전기의 지방사회 통치구조는 기존에 존재했던 호부층의 세력과 위상을 어느 정도 인정함과 동시에 이들을 중앙에 포섭함으로써 중앙에 대한 지역의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모든 지역을 국왕이 파견한 지방관을 통해 직접 다스리려했던 조선과는 반대로 고려는 각 지역의 자위공동체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내적 구성뿐만 아니라 지역 사이에 계서를 둠으로써 모든 지역을 직접 통치할 수 없는 공백을 보안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본관제를 통한 고려의 지방제도이다.

채웅석의 <고려전기 사회구조와 본관제>는 고려시대를 사회사적 방법으로 바라보면서도 사회사와 연결된 정치사, 경제사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고려의 개국이 호족층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만큼, 필연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던 지역사회 통치에 대한 고려의 해법을 계서적 질서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많은 부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부분이 있다. 첫 번째, 채웅석 본인도 논문에서 밝혀내지 못했다고 이야기했지만, 많은 속현이나 부곡 등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의 지역민들의 많은 반발을 가져올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지역간의 계서적 질서를 설정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둘째, 본관제에 의한 간접 통치는 향리에게 지나치게 많은 관한을 주고, 결국 민()에게는 이중의 수취구조를 부담지울 수 있다. 이는 곧 중앙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으다. 고려는 과연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대비를 해두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