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움직인다
안 그래도 시마네가 벽지인데, 거기서 더 벽지인 이와미 은광으로 가는 길
새벽에 마츠에에서 이즈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움직인다.
새벽 5시 반 이즈모시역 도착
역에 불도 꺼져있다.
입장
이나바의 토끼
여기서 첫 차를 타고 오다시역으로 간다.
첫 차
특급열차로 야마구치까지 간다.
꽤나 멀다
30분 정도 가면 오다시역 도착
오다시
오 이게 그 침대차??
일본에서 유일하게 남았다는
역 밖으로 나간다.
역시 이와미은광 안내판
한쪽에 이렇게 홍보부스가 있지만 아직 열지 않았다.
관광안내센터도 무소용
역 밖으로 나가본다.
이와미 은광 유적이라는 명패
한쪽에는 오다시의 상징인 라토짱이 있다.
이와미 은광에서 좁은 굴 사이로 소라껍질로 만든 등잔을 들고 들어간 것에서 유래된 캐릭터
왠지 짠하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버스 시간표
라토짱의 유래 안내판
아직 좀 시간이 남았다.
추워서 역에서 기다리는 중
버스 도착
세계유산센터까지 가는 버스
출발한다
히로시마에서 온 새벽버스인데 이렇게 중간에 타도 된다.
저 자전거 창고도 뭔가 유래가 있던데
지나쳤다
고등학교차 도착
신나게 내륙으로 들어간다.
올라가는 요금표
오모리 대관소터에서 내려도 되지만 아직 문 연 곳이 없으므로 지나친다.
더 달려 들어간다.
삼병산
계속 안으로 들어간다.
세계유산센터까지 가는 길
마을
지나치는 중
오
뭔가 입구가 나온다.
여기가 은광 마을
이따 올 곳이다
일단 지나친다
마을을 지나처
더 안쪽으로 가서
고개를 넘어가면
이와미은산 세계유산센터에 도착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마을로 들어간다.
세계유산센터
꼭 안 들려도 되지만 이와미은광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와 전시시설은 여기에 있으므로
왠만하면 들리는 것이 좋다. 시간이 없다면 패스해도 무방하긴 하다.
8시 30분부터 운영하는데
얼쩡거리는 중
은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조형물이 있다
저 위로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는데
입구만 살짝 봐도
이어지는 계단에 공포를 느끼고
후퇴
사진만 찍어 둔다.
세계유산센터
개관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밖에서 얼쩡대니 열어주신다.
내부 안내소
모형이 있다
이것이 이와미 은광의 목책 범위
에도막부에서 정한 목책으로 저 범위 안팎을 마음대로 오갈 수 없었고
저 밖으로 은을 빼내면 극형에 처했다.
현재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분은 목책 내 뿐만 아니라
동해와 세토 내해로 통하는 길도 포함된다.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은 일본 최대의 은광이었다. 현재의 오모리 지역을 중심으로 처음 은광은 노천에서
은을 캐는 것으로 14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후 오우치씨가 이 지역을 차지하여 하카타의 상인들에
의해 은광이 개발된다. 결정적으로 조선에서 개발된 연은분리법 혹은 회취법이 이때 하카타 상인들에 의해
이곳에 전승되면서 광석에서 은을 더욱 효율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게 되자 이와미 은광은 말 그대로
노다지가 된다. 16~17세기 일본의 전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생산했고, 그 중 이와미 은광에서
20%가 채굴되었다고 생각된다. 덕분에 일본은 은을 통화를 채택하게 되고 무역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당시 이와미 은광의 가치는 고쿠다카로 치면 100만석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오우치씨와 그 옆의 아마고씨가 은광을 가지고 쟁탈전을 벌였다가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며
모리씨가 오우치씨를 대체해 아마고씨와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승리한다. 모리 테루모토는 이를 바탕으로
주코쿠의 강자로 군림했고 오다 노부나가와 대결한다. 그러나 모리씨가 도요토미에게 복속하며 은은
모리씨와 히데요시가 절반씩 나누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비용도 여기서 충당되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가와 모리가가 은을 나누게 되었고 에도막부가 성립하면서 아예 이를 빼앗는다.
에도막부는 오모리를 중심으로 은광 일대를 막부의 직할지인 천령으로 선포하고 막부의 대리인인 봉행을
파견한다. 초대 봉행으로 이에야스의 심복인 오쿠보 나가야스가 파견되어 은광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생산량을 더욱 늘렸다. 다만 17세기 초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생산량이 감소하여 이후 대관으로 강등된다.
생산된 은은 북쪽으로는 동해와 면한 오타시의 포구로, 남쪽으로는 세토내해와 면한 오노미치로 운송되어
후시미로 선운을 통해 옮겨저 은화로 주조되었다. 이 운송에 대한 부담이 엄청났다고 한다. 또 은을
밀반출한 사람에게는 잔인한 형벌도 있어 생매장, 몸을 세로로 가르는 것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형장소는 복원도, 안내도 되어있지 않다. 또 당시 탄광에 물이 새어 죽거나 납 중독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어린아이들도 일을 해야해서 평균수명이 30세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에도시대 후기에 되어 은광은 점차 채굴량이 낮아졌고 너무 깊은 갱도를 파야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한편 조슈와 막부의 전쟁으로 2차 조슈전쟁이 터져 이곳을 관리하던 하마다번이 떨어지자 이곳은 조슈번
지배하에 놓였다가 메이지정부에 의해 오모리현으로 승격된다. 신정부는 이 광산은 민간에 불하해 기업이
운영하지만 지진에 의한 피해, 채굴량의 감소에 의해 구리광산으로 바뀌었다가 1923년 폐광된다.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다시 광산을 열지만 1943년 갱도의 매몰로 완전 폐광되고 2006년 시마네현으로 소유권이
옮겨진다. 이후 오모리정은 오타시에 합병되지만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2007년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은화 확대 모형
이렇게 가공되어 도장이 찍힌 것이 유효한 은화이다.
우리가 아는 지명 긴자가 은화의 제조에서 비롯된 것
이와미 은광에서 채굴한 은광석
복석이라고 부른다고
오모리 소학교에서 보관하다가 센터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이 그려진 게다.
과거 은광 마을에서 발견된 것
이와미의 은
은화
빛난다
이렇게 막부기관에서 무게와 순도를 보증해 화폐로 쓰이는 것을 정은이라고 한다.
사실 정은은 매번 무게를 재야겠기 때문에 이보다는 정은이나 이보다 작은 두판은을
일정한 무게를 재서 종이로 싸서 포장하고 인증한 포은을 더 많이 썼다고 한다.
역대 은광의 지배자
은광마을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현재 모습
은을 제련하는 과정
은광석을 부숴서 물에 채친다.
납과 은광석을 섞어 재를 둘러 납이 먼저 녹아 떨어지고 은만 위로 뜨게 하는 회취법
납증기가 나오니 건강은 당연히..
갱도의 모습
갱도를 마부(間歩)라고 한다.
사진은 옷을 입었지만 실제로는 더워서 홀딱 벗고 아주 작은 틈을 따라 들어가는 식이다.
이런 갱도가 700개가 넘는다고
광부의 기본 모습
손에 유채기름을 소라껍데기에 넣은 등잔을 들고 간다.
광부들이 쓰던 담뱃대
갱도 굴착 모습
회취법 설명
도가니
완성된 정은
작은 것이 두판은
근대 은화
갱도 모형이다
이렇게 땅 깊은 곳까지 개미굴처럼 뚫려있다.
으악
미쳤다
당시 광산 지도
죽은 광부들의 묘비
광산의 지층을 떠왔다.
은괴도 있다
이게 얼마냐
역시 은광석이다
옆에는 토산품 매점인데 살 건 없다.
마을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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