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대정명기감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7 - 총설7

同黎 2021. 8. 5. 18:33

명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정책에서 완전히 노부나가를 답습하였는데, 명기 이용책에서는 이를 더더욱 확장하여 다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히데요시가 다사(茶事)를 좋아하고 명기를 애용한 것은 노부나가 이상으로, 텐쇼(天正) 10년(1582) 노부나가 사후에 이미 노부나가가 데리고 있던 츠다 소큐, 센노 리큐 등을 임용하여 이들 사카이 출신 종장을 통해 재빨리 사카이슈(堺衆)의 관심을 샀다.

 

노부나가를 대신한 지 얼마 되지 않고, 풍운망창(風雲莽蒼)으로서 천하가 어느 쪽으로 정해졌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 초암(草庵)에서 차 끓는 소리를 들었으며, 황금다실(金屋)에서 다이스(台子) 다회를 열면서 큐슈 정벌에서도 리큐 등을 대동하고 다다르는 곳마다 풍류아회(風流雅会)를 열었다.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조씨(北条氏)도 아직 멸하지 못하고 동북의 형세도 아직 정해지지 않을 때에도, 키타노 다회(北野茶湯)를 개최하면서 킨키(近畿)의 다인(数寄者)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의 명기를 진열하여 서로 좋아하고 즐겼다. 그 쾌활하고 호방한 행동이 그 방면의 많은 취미가 되었고 이들 사카이슈 등을 틀림없이 기쁘게 했을지는 물론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히데요시가 다사(茶事)를 좋아하고 명기를 애용한 것이 단순히 정책적으로 나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 시절부터 가장 열심히 다례(茶礼)를 익혀, 당시 같은 무리 중에서는 어쩌면 가장 숙달된 1인이 되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그는 가장 능숙히 사세를 풀어내 당시 교토(京師)의 인심을 거둬들인 것에는 그들의 기호와 일치하는 풍아한 소양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을 알 수 있다. 키소 요시나카(木曽義仲)가 교토에 입성한 후 지나치게 거칠고 예의와 우아한 면모를 가지지 못해, 금세 목후이관(沐猴而冠)이라는 비웃음을 샀던 예가 미천한 신분에서 벼락출세한 히데요시가 크게 경계할만한 바였을 것이다.

 

그는 교토 내로 입성해서는 교토에서 전해지는 비결을 익히고 고위 고관들에게 헌상하여 공경(公卿衆)과 교류하였고 서투르나마 와카(和歌)를 읆으면서 또한 붙임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긴키 지방에 있어 풍아함의 제일이라고 꼽히던 다사를 배우면서, 그 취미를 공유한다는 점에 의거하여 사카이슈, 교토슈(京都衆) 또는 하카타슈(博多衆) 등의 관심을 샀던 것은 다도가 그의 천하 경략에서 천하의 부호계급을 잘 구슬리는 방법이 가장 영리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솔선하여 다사(茶事)를 즐기고 명기를 중요시한 것 때문에, 명기의 가격은 더욱더 더해졌다. 사람들의 유행에 따라 무인들이 군공에 대해서 포상(秩禄)을 물질로 받는 것보다도 오히려 명기를 은상으로 하사받는 것을 기뻐했으며, 반슈(播州: 지금의 효고현 동부) 한 개 쿠니의 영지를 대신하여 가마(釜) 하나를 얻어서 그것을 파지부(播地釜)라고 명명하게 되었다는 등의 일화조차 전해지기에 이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이 명기 이용책에 성공했다는 일단을 증명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