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명기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尾張)에서 굴기하여 천하통일의 업을 창출하였고, 이마가와(今川),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고 아자이(浅井), 아사쿠라(朝倉)를 섬멸하여 먼저 교토를 세력권에 집어넣었다. 공격 방향이 더욱더 퍼질수록 용맹한 장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점점 급해졌지만, 당시 조정의 지위와 명작에 맡겨서는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하였고, 그들에게 있어 사력을 다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토지와 금은재보 등 물질적 상여(賞與) 뿐이었으나. 충분히 주기에 토지는 이미 부족하였고 금은도 역시 한계이 있었다.
시무(時務)에 민첩하고 능통한 노부나가는 빠르게도 근방의 소식을 알아차리고 히가시야마어물(東山御物)을 시작으로 하여 킨키(近畿) 지방에 산재한 천하명기를 자기 손에 넣은 뒤, 이것을 써서 군공(軍功) 장려의 용도로 제공하였다. 에이로쿠(永禄) 12년(1569)에 상락하고 곧 다이몬지야(大文字屋)의 하츠하나 카타츠키차이레(初花肩衝茶入), 유죠보(祐乗坊)의 후지 나스차이레(富士茄子茶入) 등을 몰수하였고, 미요시(三好), 마츠나가(松永) 등 노부나가 이전 교토에 있으면서 히가시야마어물을 소유한 자들로부터도 다수의 명품을 헌납하도록 하였으며, 교토·사카이의 상공인(町人) 등으로부터도 역시 소장한 명기를 헌납토록 하였다.
다만 노부나가는 풍류를 모르는 사람(没風流漢)은 아니었는데, 다도가 취미여서 명기를 좋아해 전란중에 있던 오와리 세토(瀬戸)의 도요(陶窯)를 부흥시키는 등 풍류적 측면이 낮지 않았다. 그렇지만 목전에 놓인 천하통일의 대사업이 급하다면, 상락(上洛)하여 손에 넣은 명기를 스스로 애용하기보다도 먼저 이것들을 장수들에게 하사하여 그 군공을 장려하는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위와 같이 그는 아즈치(安土)에서 히데요시에게 여러 종류의 다기를 주어 그 군공을 상찬한 것을 시작으로, 텐쇼(天正) 5년(1577)에는 아들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토벌을 상찬하면서 하츠하나 카타츠키차이레(初花肩衝茶入) 이하 여러 점의 명기를 주니 노부타다가 크게 기뻐하면서 그 명기를 가지고 다회를 개최해 부하 장수들에게 향응을 제공하였다. 또한 13년간 전쟁을 벌였던 혼간지(本願寺)와 화친을 맺게 되자, 상호 간 인사로서 노부나가가 증여한 이치몬지 고키다완(一文字呉器茶碗)은 현재도 유일한 보물(什宝)로서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 전해진다.
이들 명기가 당시 그 용도에 어떠한 효과를 가져왔는지는 지금 구태여 여러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노부나가가 이것을 일종의 금치훈장(金鵄勲章, 당시 가장 높은 등급의 무공훈장)처럼 활용했던 것은 그 명기에 한 단계 명예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더욱 역사적 색채를 농후하게 만들어 확실하게 명기의 권위를 더하는 데 이르렀음은 물론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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