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대정명기감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6 - 총설6

同黎 2021. 7. 4. 03:05

명기와 사카이슈(堺衆)

 

무로마치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즈미(泉州) 사카이(堺)는 간사이에서 유일한 항구로써, 국내외의 물화가 폭주하는 번화한 도시였다. 당시 아시카가씨(足利氏)와 기타 상류층 계급이 대륙 및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명기와 진귀한 물산을 수입하는 관문으로써, 나야(納屋), 아부라야(油屋), 텐노지야(天王寺屋), 타이시야(太子屋) 등으로 일컬어지는 대상인(豪家軒)들이 즐비하여으며 이들 사카이 상인들은 사카이슈(堺衆)라고 불렸다. 천하를 거머쥔 명장(名將)들은 군사적 목적으로 부호들과 경제적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결코 이들은 사카이슈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 사카이슈는 외국과 일본 간 통교의 요로(要路)에 있어, 가장 먼저 최신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집마다 스스로 명기들을 저장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다사(茶事)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대의 종장(宗匠)인 타케노 조오(武野紹鴎), 센노 리큐(千利休), 츠다 소규(津田相及), 이마이 소큐(今井相久) 등이 모두 이 땅에서 나왔던 것을 보아도, 당시 사카이가 부유한 항구이자 풍류의 고장이면서 명기의 소굴임을 알 수 있다.

 

노부나가는 이미 이러한 형세를 간파하고 경사(京師, 교토)를 얻자마자 바로 사카이슈와 관계를 맺었지만 아직 깊숙한 관계까지는 맺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를 대신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방침을 답습하여 사카이슈와 크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써 한층 더 깊이 명기 이용책을 사용했던 것은 과연 그의 혜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