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대정명기감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2 - 총설2

同黎 2021. 6. 17. 16:57

명기(名器)와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히가시야마시대(東山時代)에 다회(茶會)가 행해지면서 이에 다기(茶器)의 필요성이 생겼는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이래 역대 쇼군(將軍)의 선례와 달리 다수의 서화·집기를 수장한 것은 필경 이러한 필요에 기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이것이 우연하게도 명나라 전성기에 해당하고 명나라에서 송나라·원나라의 서화·기구가 대단히 윤택할 때에 적극적으로 명품을 일본으로 수입할 수 있던 것은 실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행운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다례(茶禮)에 사용하는 차이레(茶入), 다완(茶碗), 하나이레(花入), 향합(香合)류는 적어도 가마쿠라시대부터 수입되어 이후 필요에 따라 점차 증가되었다. 모두 히가시야마 시대에 수입한 것은 아닐지라도 요시마사를 시작으로 당시 일본의 고위 무사들은 대개 중국 숭배자만 되면 다기 같은 것도 오로지 한작(漢作) 및 당물(唐物)을 존숭하여, 중국의 문물이 아직 오지 않던 사이에 저 나라의 보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명품을 끊임없이 점점 수입했는데 우연의 결과이면서도 이를 세계적 대공훈이라고 말하여도 무방하리라.

 

만약 당시에 요시마사 등이 중국의 명품을 아국에 수입하지 않아 그대로 그것을 중국에 남겨두었다면, 청조(淸朝)의 허다한 변란을 거치면서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을 것이라고 알 만하다. 후대의 일을 이해하지 못할 이는 함부로 요시마사의 사치스러움과 문약함을 운운하지만, 오늘날 동양의 문화를 연구하는 이들은 요시마사와 기타 히가시야마시대의 풍류인들에 의해 수입된 아국의 현존 명물에 의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도 깊이 뜻을 새겨 해외 명기들을 국내로 전래할 수 있는 경로를 깊이 생각하고, 요시마사를 필두로 하는 히가시야마시대의 풍류인(数寄者, 스키샤)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