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국내 답사

2013 근현반 역사기행2 - 러시아공사관, 중명전, 정동교회

同黎 2013. 3. 31. 23:37



경교장을 나와 길을 건너 정동으로 향한다


채홍병의 카메라에 익숙치 않은 아이들은 포즈를 취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신경쓰면 안돼


귀척하는 이가은과 쿨한 꽈장님


지나가다가 발견한 관립법어학교 터

정동은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구의 외교기구가 모여있으면서 서양과 조선(대한제국)이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정동구락부를 드나들던 정동파들은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동길 풍경

이화여고 근처


캐나다 대사관


이화여고 앞


캐나다 대사관을 끼고 돌아 언덕을 조금 오르면 구 러시아공사관이 나온다


언덕위에 보이는 러시아공사관의 종탑

바로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궁궐과도 같았다는 과거의 위용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지고 이제는 종탑만 남았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바로 옆의 미국공사관쪽 뒷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덕수궁과 러시아공사관 사이에 비밀 땅굴이 있다는 이야기는 억측이 된다. 


러시아공사관 앞 자리는 이후 프랑스에서 매입하여 한국 최초의 수녀원인 정동수녀원이 자리잡기도 하였다.

참 여러 나라가 거쳐간 동네가 정동이다.



잠시 설명 중


종탑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는 중

김동영이 포즈를 취했다.




아주 귀찮지만 러시아공사관은 계단 위를 올라와봐야 그 위치의 오묘함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경청하는 새내기들


공사관 아래 빈터는 한,러 우호의 공원이 되었다. 소련과 한국이 1990년 재수교한 후에 러시아는 과거의 공사관 자리였던 여기에 대사관을 지을 것을 주장했는데,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사진 왼쪽의 나무가 무성한 곳이 바로 미국대사관저이기 때문이다. 미국대사관은 광화문에 있지만 미국 대사는 과거 미국의 공사관이었던 그 자리에 살고 있다. 미국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는 1970년대 지어진 한옥이지만 그 옆에는 과거의 미국 공사관이 복원을 거쳐 아직까지 존치해있다. 소련이 미국 대사를 내려다보는 자리를 미국은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탑 측면


출석사진


찍사 채홍병이 나온 유일한 사진



다시 러시아 공사관을 나오면 이화여구의 과거 정문이었던 사주문이 나오고 뒤에 백주년기념관이 보인다


이화여고의 심슨기념관. 1915년의 건물이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화여고 안에는 유관순 우물도 있는데 패스


역시 등록문화재인 신아일보 별관의 측면

내부가 공사중이라서 폐벽돌이 밖으로 나와 있다.


건물은 1930년대의 것이다. 신아일보는 1965년 창간되었다가 1980년 전두환의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비운의 신문이다


본관 파사드


정동극장 바로 전 골목에서 좌회전하면 중명전이 나온다


몇년 전 복원된 중명전. 

본래 이름은 돈덕전으로 고종의 서양식 서재였다. 고종이 덕수궁(경운궁)을 증축할 때 여러 서구식 건물을 지었는데 남은 것은 중명전과 석조전 두 개 뿐이다. 경운궁을 증축하면서 이미 부지에 들어와있는 여러 공사관 사이로 궁궐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궁궐 부지가 축소되면서 이리저리 잘려나가 이제는 덕수궁 담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입장


중명전을 을사조약이 체결된 아주 역사적인 장소기도 하다.

최근 을사조약의 국제법상 불법성을 들어 원천 무효라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뭐 마음을 이해하지만 무의미한 주장이 아닐까? 헤이그 특사 파견에서 이미 국제법이 당시 열강들에게 소용 없었다는 걸 알면서 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사실 을사조약을 불법성을 따지는 이야기는 역으로 일제가 합법적 절차를 갖추었으면 조약이 정당한 것이 되냐는 질문에는 침묵한다.


관람 후잠시 쉬는 사람들


생일을 맞는 학회장님

브이질을 하신다. 이가은도 귀척 중이다.


예전에는 2층에도 전시장이 있엇는데, 어느새 거기까지 문화유산국민신탁의 사무실이 들어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더라


이제 정동교회로 간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이다.

첫번째 교회는 승동교회라는 주장도 있어서 확단하기 어렵다. 다만 교회 건물 자체는 1895~1898년의 것으로 현존하는 개신교회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의 모습

부활이 코 앞이라 교회 앞에서 찬양을 하고 달걀을 나누어주고 잇었다.


한국 감리교회의 초대 회장이자 정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인 아펜젤러

이화학당과 배재학당도 감리교회에서 세운 것이다.


아펜젤러의 뒤를 이은 2대 다임목사 최병헌


정동교회는 1926년의 증축 외에는 대한제국 시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행사가 진행되어 사진을 찍지는 못햇지만 안에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도 있다.




1926년 증축 때 넣은 정초석


정동교회의 100주년 기념탑


멀리 일제시대 대법원이었던 서울시립미술관이 보인다. 지금은 정면 외관을 제외한 전체가 개축되어 원형을 거의 잃었다. 해방 후에는 가정법원으로 쓰였는데 때문에 덕수궁 돌담길에 커플이 오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속설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독일공사관이 저기에 있었다.


벨기에공사관과 프랑스공사관, 이탈리아 공사관도 정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