須川英德, 「제5장 朝鮮 - 經濟史」,
『朝鮮史硏究入門』 , 2011, 名古屋大學出版會
(1) 경제사학의 과제
경제사라는 학문영역은 역사적인 과거에 있어 경제, 즉 물질의 생산·분배·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농업·공업·상업·화폐·재정 등 개별적인 분야와 그것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경제시스템, 이 두 가지 측면을 해명하고자 하는 학문영역이다. 다루는 대상이 관계되어 있어 경제학 안에 籍을 두고 있는데, 실제 연구 작업은 과거 史實을 재구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문헌사료를 다룰 필요가 있고 그 점에 있어서 역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물가와 통계 등에 관하여 신뢰할 수 있는 숫자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있어서는 다양한 경제학의 분석수법을 이용한 수학적 처리도 가능해진다. 논증 수단으로서 주로 수학을 이용하여 논의를 진전시키는 경제학 분야는 수량경제사라 불리는데, 조선시대에 있어서 물가 등에 관한 통계적 처리가 가능한 정도의 많은 정보를 일기사료로부터 얻는 것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가능하다. 또 전근대 왕조국가에 있어서는 사회전체의 동향을 수량적으로 파악하여 정책입안에 참고하려는 발상이 희박하기 때문에, 인구와 경지면적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公的 통계수치가 꼭 정확히 파악되지는 못했던 점을 지적해둔다.
문헌사료를 이용하는 연구지만, 경제사연구도 또 다른 분야의 역사연구처럼 관청 등의 공적인 기록류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 각 국왕의 『實錄』과 『備邊司謄錄』은 말할 것도 없고, 『賦役實摠』, 『度支志』, 『萬機要覽』, 『六典條例』 등 재정에 관련된 각종 법령·규칙·선례 등을 집성한 편찬사료도 18세기 후반이후에는 다수 편집되어있어 기본사료로 잡아두고 싶다. 稅制와 재정분야의 연구는 이러한 관청사료에 의거할 수 없는데, 80년대 이후 邑事例와 邑志, 宮房文書등이 이용하기 쉬워졌다. 또 정책론 등에 관해서는 문집류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상공업이 末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상공업에 관하여 충분한 관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상공업에 관한 관의 기록은 사건과 소송이 발생하면 새로운 규칙을 정한 시점에 기록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상공업의 일상적인 경영실태에 관한 기술이라기보다도 특별한 사례가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는 것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실제로 상업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이 객주처럼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로 영업하고 상품·자금의 계속적인 대차관계와 고객관계를 가지고 있던 상황 및 업무수행을 위해 이런저런 목적에 응하여 장부류를 작성하고 있었던 일은 식민지시기의 조사에 의하여 밝혀져 있다. 이 장부류는 양반가문에 있어서의 관직임명교지와 분재기와는 그 위상이 달랐고, 상인이 천시 받은 사회에서 그것들은 적극적으로 보존·계승되는 대상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영업권을 가진 名義人과 실제로 종사한 사람들이 달랐던 것에 기인하여 경영 그자체가 지속적이지 못했던 까닭에(스가와 히데노리 須川英德[2003a]) 개별경영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이 흩어져 없어지고 소멸되어버렸다. 이것은 광산업과 수공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또 市廛과 貢人契 등의 조직이 작성하고 있던 장부류 또한 조직의 해산과 더불어 대부분이 흩어지고 없어져 버렸다. 즉, 당사자의 손에 의해 일차사료가 부족해져버렸다는 장벽이 존재한다.
상공업에 관한 이러한 사정과 대조적으로 농업경영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 80년대 이후로 문중이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이 많이 발굴되어 공개되었고, 그 가운데 포함되어있던 秋收記(소작료수납기록), 토지매매문기, 분재기 등이 이용 가능해졌기 때문에 양반사족들의 농업경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또, 사족들이 남긴 일기류 안에도 농업경영뿐만 아니라 물가와 상공업에 관한 기술이 남겨져 있고 그것들을 세밀히 추려내는 것도 중요하다.
한편, 조선시대에 관한 경제사연구는 1960년대 이후 북한 학계에서 제창된 자본주의맹아론을 따라서, 조선후기사회 안에 자생적인 자본주의로 이행할 싹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자본주의맹아론에 의하면 조선사회는 양반지주-전호 관계를 규정적인 계급관계로 하여 구성된 봉건사회이고, 신분제도가 동요하고 민란이 빈발했던 19세기 조선은 봉건말기에 해당되며 상공업부문에 있어서도 자본주의적 요소가 봉건사회의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개항으로 인한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자생적으로 근대자본주의로 이행했을 것이라 한다. 다만 그 자본주의맹아라고 하는 것, 예를 들면 공장제 수공업과 임노동자의 발생, 농업에 있어서 농민층의 양극분해, 그리고 토지소유와 경영의 분리 등은 서유럽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또 맑스주의 발전단계론과의 정합성 및 서유럽과의 동일성을 논증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 주의해야 마땅하다. 이에 대하여 일찍부터 안병태[1975]에 의해 ‘浮彫的 방법’ 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자본주의의 지표라 보이는 것을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고 골라낸 감도 없지 않다. 또 충분한 실증연구의 말미에 일어난 이론이라기보다는 북한에서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역사적으로 정통화하기 위한 이론이었다는 정치적 성격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후기사회가 내적인 힘에 의한 변화가 결핍된 정체적 사회라는 식민지기 이래의 정체성론이 우선 실증의 측면에서 부정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자본주의맹아론의 입장에서 저술된 저작으로 농업사의 김용섭[1970-71] [1984], 상업사의 강만길 [1973] [1984], 화폐사의 원유한[1975], 수공업의 송찬식[1973], 광산업의 유승주[1993]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성과를 간략히 정리한 것으로 조기준·유원동·유승주·원유한·한영국[1991]이 있다.
또, 맹아론을 따랐다 하여 그 결과 밝혀진 상공업분야에 있어서의 풍부한 사실까지 무시해도 좋은 것은 아니며, 역사적 문맥을 전혀 새롭게 구성하여 그것들의 史實을 위치시켜가는 작업이 요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작업의 전제로서 파악해 둬야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농업, 광공업, 상업에 관한 사실소개를 중심으로 균형 잡힌 정리를 하고 있는 이헌창[1999]이다. 조선시대 경제사를 배우고자 한다면 개별논문과 모노그래프로 들어가기 전에 꼭 눈여겨 봐야할 좋은 저작이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 한국의 연구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맹아론에 대한 비판 혹은 맹아론과는 다른 사실의 발굴이 진행되었다. 근대사연구회 편[1987]에 수록된 각 분야의 연구동향에서는 맹아론 비판과 극복을 위한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의 문제제기를 볼 수 있다. 또, 다양한 지방문서·관청문서를 이용한 새로운 연구, 그 중에서도 사회사적 분야의 연구가 진전되고 있으며, 조선과 서유럽의 동일성 증명에 역점을 두고 있던 맹아론은 과거의 것이 된 것 같으나 반드시 이론적으로 충분히 청산되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이하 맹아론 이후의 새로운 연구동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2) 농업과 토지소유
우선, 조선시대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는데, 농업과 그것에 연관된 토지소유·토지제도부터 살펴보자. 농업사의 입장에서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1984]는 양반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봉건적 생산관계라 보는 봉건제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영훈[1988]도 또한 봉건적 생산관계의 존재를 부정함과 더불어 양안의 분석을 통해, 소규모 집약화의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던 점을 제시했다. 다른 한편,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1991] [2001] [2005] [2007],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1994]는 동아시아 농업사회의 특질은 논벼 경작에 기인하여 토지생산성이 매우 높았던 소농사회에 있고 그것이 기술개선과 집약화의 진행과 더불어 안정화되어 있었다고 논했다. 여기에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2001] [2005]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서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만 소농사회가 출현한 점에 주목하고, 농업사회가 최종적으로 발달한 형태가 소농사회이며 그것이 자본주의를 낳는 모체였다고 논한다. 또,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2007]의 주장은 17~19세기에 있어서 일본·중국·조선의 사회적 발전 위상에 대해 대략적으로 비교하여 고찰한 것이지만, 그 결론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비교사적 관점은 경제사연구에 있어 작업가설로서 앞으로도 필요하다.
한편, 이전에 논의되었던, 대규모 借地에 의한 粗放的 廣作과 경영형 부농을 조선후기 농업발전의 주된 방향이라 보는 견해는 거의 부정되고, 이앙법의 도입과 다각화·집약화에 의함 소규모 경영의 안정화가 농업발전의 주된 방향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거의 자리잡았다. 연구입문서로서 최근 한국에서 간행된 김용섭[2008]의 조선시대 농업경영에 관한 개설도, 조선전기에는 노비에게 분정된 作介地를 경작시키는 作介制와 노비를 감독하고 家作地를 경작시키는 家作이었다가 점차 지주와 작인이 수확물을 분할하는 병작제로 이행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조선후기 농업경영은 인구증가와 분할상속의 결과, 제사계승과 더불어 상속분이 커진 ‘종가형 지주’는 비교적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소규모 영세화의 방향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또 김건태[2004]는 分財記와 族契文書, 秋收記 등을 이용해 양반지주와 작인 관계의 변화를 상세히 짚어가고 있다. 근년에는 구체적인 지주경영의 성쇠를 추적할 수 있는 사료가 발굴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안병직·이영훈[2001]은 경상북도 예천군의 박씨 가문에서 100년에 걸쳐 쓰인 일기류를 분석하여 지주경영의 변동 및 지방장시와 촌락 안에서의 물품 매매, 촌락 내 질서의 변동 등을 다각적으로 밝혔다. 한편, 한국농업사학회 편[2003]은 농업기술과 기후변동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을 가하고 있다. 이태진[1989]은 조선후기에 토지개간과 신농법의 정착을 재지양반지주들이 주도한 점을 지적했고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1995]도 15~16세기는 재지지주들에 의해 토지개발이 진전되었다는 점을 논했다. 최윤오[2006]는 지주제의 성장과 농장의 입지조건, 不在地主인가 在地地主인가, 지대수취방식에 있어 打租(打作, 수확 후에 정해진 비율로 곡물을 지주와 작인이 분배하는 방식)와 賭租(賭只, 미리 정해둔 地代量을 수확 후에 징수하는 방식)에 의한 경영이 서로 다른 점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이태진[2002]은 의학지식의 보급에 의한 인구증가와 灌漑가 용이한 하천중류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점차 경지가 확대되고 곡물시장이 발생한 점을 논했다.
토지제도에 대하여 60년대까지는 토지가 국유인가 사유인가 하는 양자택일을 둘러싸고 논의가 되고 있었으나 80년대 이후에는 국가에 의한 토지지배 그 자체보다 구체적인 지배양상이 논의의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우선, 고려 최말기에 시행되었고 조선왕조에 계승된 과전법에 의한 토지지배와 그 변천을 논한 것으로 김태영[1983], 이경식[1986]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16세기 중반 직전제 폐지를 가지고, 국가로부터 수조권을 나눠받은 것에 근거를 가진 양반관료들의 토지지배(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소멸하고 이후로는 사적 지주제가 발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과는 반대로, 이영훈[1988]은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강하게 잔존했음을 지적했다.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1991]도 왕족·궁방 및 관아에게 나눠준 토지지배권인 折受가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부활이나 다름없으며, 광무양전에 이르기까지 結負制로 표현된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계속되고 있었다고 논했다. 이 논의는 아직 결론을 보지 못했다. 한편, 17세기이후 軍門·衙門의 경비조달을 위해 설정된 屯田의 운영실태에 대해서는 송양섭[2006]이 있다.
그러나 지주와 더불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자작농민의 구체적인 존재양태 및 발전의 방향을 둘러싼 이해는 아직 일치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영훈[1999]의 정리에 의하면 지주제에 대해서는 병작제 지주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존재했고, 그 주체만이 농장주→양반관료지주→서민지주로 변화했다고 보는 입장(허종호[1965]), 자작농 중심이었던 것이 점차 병작지주 우위로 변화했다고 보는 입장(이호철[1986]), 병작지주제 내에서 점차 자작의 범주를 확대하는 지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입장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개별농민경영 안에 존재했고 호적에도 기재된 예속적 노동력과 挾戶1)의 형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의 차이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진다. 즉 더욱 더 자립적인 자작농민이 양극분해되어 광작과 경영형 부농 등 새로운 농업경영을 낳았다는 것이라거나(맹아론적 이해), 아니면 고려이래의 복합가족적 농민경영이 점차 단혼소가족으로 해체되면서 소농민 경영으로서 자립화되어 가면서도 생산력의 취약성에 기인하여 항상 하층 분해를 동반하고,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종속적 노동과 경영이 병존하고 있었다던가 하는 이해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것에 관하여 이영훈[1995]은 세조7년(1461)의 호구제 개혁에 의해, 그 때까지는 복합적 세대공동체를 1호로 파악하고 있었다가 생활을 함께하는 개별가족을 1호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주제에 대해서는 추수기·분재기등 그것의 경영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는데, 소규모 자작농과 소작농의 경영실태 혹은 예속적 농민들의 생활에 관해서는 그들 자신이 남긴 것이 없기 때문에 단서가 되는 사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또 전답매매의 실제에 대해서는 다수의 매매문기를 소개한 이재수[2003]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 18세기의 인구증가와 생활수준의 향상이 지나친 경지개발을 초래해 그 결과 18세기말부터 홍수의 빈발과 수리시설의 기능부전을 불러일으켰고 점차 토지생산성이 저하되어 식량생산도 침체되고, 인구 감소와 쌀값 상승, 시장망의 쇠퇴 등 개항이전에 경제적 위기상황이 진행되어 있었다는 연구가 제시되었다.(이영훈 편[2004]) 19세기의 인구감소는 이미 알려진 바였는데, 19세기 조선이 개항이전에 경제적 위기상태가 되어있었다는 결론에 대한 贊否는 별개로 하더라도, 19세기 사회를 실증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또 산림의 관리에 대해 촌락민과 공권력이 얽힌 양상을 비롯해 환곡이 하고 있던 경제적 기능 등 조선후기사회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해야하는 많은 과제를 밝혔다. 정승진[2003]은 19세기 전라도 영광군 지역에서 발생했던 陳田2)증가와 지대수취액 저하의 제문제를 밝히고 진전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출세총결수는 불변하면서 토지등급이 올라가 농민의 부담은 증대되었던 것에 커다란 모순이 있었다고 한다. 상술한 김건태[2004]도 재촌지주의 지대수취량 저하를 확인했는데 부재지주의 수취량은 반대로 증가했던 사례도 밝히고 있다. 또 배항섭[2008]은 1862년 임술민란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연구가 계급대립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을 비판하고 민중의 일상적 생활의식부터 재구성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3) 재정제도와 경제시스템
ⓐ 수취체제와 재정제도
조선왕조의 수취체제는 크게 田稅·賦役·貢納으로 구별되며 그 외에 잡다한 부가세도 존재했다. 그 여러 가지가 독립된 연구과제임과 동시에 그 성과를 총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재정제도에 관해서는 수취제도와 表裏관계에 있는데 중앙재정에 관해서는 각 중앙관청의 재원으로서 지출되어 호조가 관할한 분야와, 호조로부터의 지출뿐만 아니라 진상공물과 궁방전 등 별도의 재원도 확보하여 운용된 왕실·궁방재정이 있고, 지방관청은 각각의 운영을 위해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행정의 집권성과는 달리 재정운용은 지출항목과 담당관청별로 설정되어 있어 분산적이고 경직적이었다. 수취체제의 변화로서 부역의 布納化 진행과 균역법의 실시, 대동법에 의한 현물공납의 지세화가 진행된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재정제도에 대해서는 그 분산성과 다양한 물품의 수취·분배라 하는 복잡함 때문에 일원적인 수량적 파악은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말부터는 세입과 세출의 실태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종종 실시되어 『度支志』, 『度支田賦考』, 『萬機要覽 財用編』, 『六典條例』 등이 편찬되고 뒤의 두 개는 인쇄·반포되어 있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열거한 선례집이고 일정하지 않은 팽창에는 일정한 제동장치로서 기능했지만 거기에 기반을 두어 통일적인 예산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호조의 기능은 예산책정은 아니었고, 상납된 물품을 보관하고 선례와 지시에 따르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관아에 공급하는 것에 있었다. 대동법, 균역법이라 하는 커다란 재정개혁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지출의 팽창에 의해 잡다한 세금의 濫設 및 중앙에서의 폐지 명령 반복과 화폐주조차익의 재원화, 賑恤을 위해 비축된 還穀의 재원화 등 다양한 모순이 생겨났다.
이러한 재정·수취제도에 대해서는 김옥근[1984][1987][1988][1992]이 조선왕조의 재정과 수취제도에 관한 방대한 연구인데 Ⅰ권이 전세제도 및 세입·세출구조, Ⅱ권이 役制와 收布, 균역법, Ⅲ권이 대동법을 다루고 있다. Ⅳ권은 근대를 다루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재정관청과 각각의 관할영역을 정리한 내용이 1장에 들어가 있다. 조선왕조의 재정·수취체제의 전체와 제도적 변천을 파악하기에는 적당하다. 세제전체를 간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는 송양섭[2008]이 있다. 최근 간행된 손병규[2008]는 상술한 것과 같이 복잡하게 얽힌 조선왕조의 수취·재정시스템에 대하여 이론적인 파악을 시도하고, 조선후기재정의 추이 및 방향을 다양한 과세의 地稅化와 정액화, 다양하게 분산되어있던 재정의 일원적 파악에 있었다고 보고, 갑오개혁에서의 재정제도개혁과 貨幣納化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논했다. 조선전기의 공납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타가와 코우조(田川孝三)[1964]를 뛰어 넘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조선전기의 왕실재정에 대해서는 송수환[2008]이 상세하다. 지방재정에 관해서는 김덕진[1999]과 장동표[1999] 가 있는데, 전자는 지방관청의 운영에 있어서 필요한 잡다한 현물수요(雜役稅)를 地稅化한 과정을 그리고, 후자는 지출팽창을 동반한 수입 결손의 발생을 어떻게 메웠는가를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읍지 등을 널리 찾아 사례연구를 누적시킨 김덕진[2002]이 있다.
또, 중국과 접하여 외교·통상의 중요한 교통로이기도 했던 평안도에 대해, 외교관계의 변화에 동반한 道財政의 변화를 분석한 권내현[2004]과 함경도의 상업을 다룬 고승희[2003] 등은 새로운 연구분야이다.
ⓑ 경제시스템
최근 급속도로 다양한 연구가 진전되어있는데, 조선시대 경제의 양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18세기 서울의 인구는 20만명을 넘었는데 지방에서는 도시가 거의 성장하지 못하고, 농촌의 상품유통이 장시에 의해 묶여있던 경제가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 서울로 재화가 모이는 수취제도 아래서의 상업이란 어떠한 것이 이해해야할 것인가 등, 종래에는 살피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경제구조라는 커다란 문제가 근년의 연구대상으로서 부상하고 있다.
우선. 조선전기의 상업이 고려시대와 비교하여 부진했던 이유에 관해 지금까지는 유교적 抑末論으로 설명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가와 히데노리(須川英德)[2000][2003b]는 利權在上, 즉 국가가 모든 경제활동을 장악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간섭기 이래로 자유로웠던 대 중국교역과 국내상업활동을 엄히 통제하도록 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유교를 존숭했던 까닭에 抑商政策을 취했던 것이 아니고 고려후기의 경험때문에 국가권력이 통제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부가 축적되어 상업종사자와 상업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일을 기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며, 이권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구축된 현물공납제가 이후에도 규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박평식[1999][2009]은 시전정비와 행상인의 성장뿐만아니라 지방에서 납입된 곡물과 같은 양의 것을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수취하여 가격차를 통해 이익을 얻는 回換 등 특권적 교역의 존재를 밝히고 또 조선초기의 이권재상론3)과 대조적으로 16세기에는 훈구세력가 내부에서부터 상업의 일정한 역할을 인정하는 以末補本論4)을 불러일으켰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조선전기에 대해서는 사료 자체의 부족이 큰 장해가 되어 연구 그 자체가 적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의존을 최소한으로 하는 공권력에 의해 재화와 노동력이 재분배 되는 경제시스템이 조선초기에 성립되고 그 후에도 규정적이었던 것에 대해서는 거의 공통적인 이해에 도달하고 있다.
조선시대후기의 상업에 대해서는 이미 요시다 미츠오(吉田光男)[1988]가 1970년대까지의 연구는 18~19세기의 조선사회를 자본주의 성립기의 서유럽사회에 투영하고 거기에서 서유럽과 공통된 ‘근대’의 내재를 발견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고 총괄하고, 서유럽 역사에 환원시키지 않은 조선사회 고유성에 입각한 역사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 과제가 8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 달성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시전에 대해 개별 시전의 발생에 관하여 주요 시전은 15세기에 존재했다고 하는 공통된 견해가 존재하는데, 六矣廛을 중심으로 하는 국역부담과 금난전권의 부여라는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17세기 전반에 歲幣조달과의 관계로 육의전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변광석[2001])와 17세기 말 금난전권의 부여와 더불어 육의전도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고동환[2000])로 나뉘어 있다. 또 각 시전의 내부구조와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서 미해명된 부분이 많고, 개별시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요시다 미츠오(吉田光男)[1985]의 米廛, 스가와 히데노리(須川英德)[2003a]의 綿紬廛이 있다. 특수한 시장으로서는 대구의 약령시가 잘 알려진 곳인데, 권병탁[1986]은 약령시의 연원이 대동법 이후 왕실진상에 쓰일 약재조달과 일본 수출용 약재의 조달에 있다고 보았다.
한편,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어 특권적이라 여겨진 시전상인에 대하여,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비특권적 私商이 시전의 규제를 무시하고 난전을 반복하여 설치하고 결국에는 시전을 압도하여 1791년 신해통공에 의해 자유매매가 허용되고, 이후에는 재력을 배경으로 사상들이 사재기인 都買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도식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스가와 히데노리(須川英德)[1994]는 난전의 주체는 그 나름의 권력과 결탁한 자들이었으며 1830년대 이후에는 납세 등으로 궁방 및 군문 등과 결탁하여 지방에도 독점적 상업활동을 확산시키고 오히려 상품유통은 저해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상업종사자를 新特權商人이라 하였다. 고동환[1997]은 지방포구와 경강에서 활동했던 船商과 旅客主人의 성장을 다루고, 산지와 소비지인 서울을 묶는 새로운 유통로가 私商에 의해서 개척되었고 동시에 궁방·사대부가의 개입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19세기 시전에 관해서 고석규[2000]는 통공정책에는 반독점 발상이 보였으나, 세도정치기에 불간섭원칙 아래서 공적기구와 결탁한 사적 권력행사에 의해 독점이 만연한 가운데 국역부담을 면제받지 못한 시전은 쇠퇴했다고 주장했다.
김동철[1993]은 조선후기 공인과 京主人·營主人5)이라 하는, 관에 물품과 노역을 제공하는 것을 업무로 삼았던 사람들에 관하여, 종래의 ‘특권상인 대 사상’이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 다양한 실태를 밝혔다. 특히 貢人權과 主人權이 고액으로 매매된 18세기 후반에는 다양한 공인권·주인권과 宮房田土 관리권이었던 導掌權을 집적하여 특권적 상업활동과 고리대를 행하고, 1791년 신해통공(육의전이 취급하는 품목을 제외하고 모든 물품의 자유매매를 허용했다) 이후 都賈활동를 전개했던 것은 그들이었다고 했다. 또 각지의 선착장(포구) 등에서 여객주인(객주)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 이병천[1983]이 17세기 한강에서는 개별 船商과의 계약으로 객주가 발생했고, 그것이 점차 선상의 지역별 취급독점으로 성장했던 것을 밝히고 있고, 이영호[1986]는 19세기 지방포구에 궁방과 지방관청과의 관계에서 收稅를 담보물로 하여 독점적 상품인수권을 얻은 객주가 발생했던 것을 밝히고 있다. 오미일[1986]은 공인권 매매, 공인권 소유 및 경영권 분리를 밝히고 있고, 객주권 또한 같은 양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백승철[2000]은 17·18세기 상업정책에 대하여 이권재상론에 기초를 둔 농업중심의 務本補末論6)이라고 정리하고 국가가 상품유통을 장악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국가 혹은 공적기관과 상업이 재정을 매개로 깊이 결합된 것이 조선시대 상업의 특질 중 하나라는 공통적 이해에는 도달했는데, 그 시점에서 실증적·이론적으로 전체상을 해명하려 했 던 연구로 이헌창[2010]이 있다. 또 이영훈·박이택[2007]은 18세기 재정의 일부가 화폐화하면서도 재정 중에서 현물 징수와 상납이 계속 되고 환곡이 증대되었던 이유에 관하여, 인민의 생활안정을 중시했던 道學君主들의 도덕경제를 지적한다. 이 도덕경제를 국가에 의한 재분배를 중시함과 동시에 시장에 의한 물류보다도 재정수요와 기근에 대비한 저장을 선호했던 경제였다고 특징짓고, 그러한 18세기적 경제구조가 붕괴한 것에서 19세기의 위기가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환곡에 대해서는 문용식[2000]이 18세기 환곡운영의 실태와 재정보전수단으로의 변화, 19세기 전반 환곡을 위한 저장곡물의 감소를 상세히 논하고 있고, 1862년 임술민란 당시의 환곡운영에 대해서는 송양섭[2002]이 있다.
물류조직에 관한 연구로서 관에 의해 조직되어진 물류인 조운에 관해서, 조선후기는 요시다 미츠오(吉田光男)[1984] [1986]가, 조선전기는 로쿠탄다 유타카(六反田豊)[1994][1997][1999][2000][2005]가, 운영의 실태에 관하여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또, 최원기[1989]는 조선후기의 경제발전이 경강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船商들의 곡물수송과 상업활동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해상교통로에 대해서는 나가모리 미츠노부(長森美信)[1998][2003][2006]가 있다. 또 관영 통신·여행수단이었단 驛에 대해서는 조병로[2005]가 인적구성과 경제기반 등을 망라한 방대한 연구이다. 그건 그렇고 조선후기 船商은 자기소유의 배로 각지로 운송한 지역산물과 계절에 맞는 다양한 물품을 스스로 매매했는가? 혹은 船商들의 경우 荷主에게 고용되어 하주와 더불어 화물을 운송했으나 위탁화물을 운송하는 업자는 출현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화폐에 관해서 80년대 이후에는 그 이전에 행해진 사실관계에 대한 연대적 정리를 넘는 수준의 연구가 그다지 나오지 않았다. 스가와 히데노리(須川英德)[2001]가 조선초기 화폐발행의 정책적 의도를 다루고, 17세기의 은 유통을 한명기[1992]가 소개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정수·김희호[2006]는 다양한 화폐의 유통실태를 알기에 편리하다. 화폐사연구의 부진은 사료부족이라기 보다는, 물품화폐가 장기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경제적 후진성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조선사회의 특성에 기반을 두고 이론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즉 화폐의 기능을 시장에서의 유통수단으로 받아들이고, 금속화폐가 물품화폐보다도 발달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국가에 의한 재분배를 제1의 원칙으로 하고 시장에 의한 미세한 조정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고 하는 조선왕조의 기본적 경제구상 위에 서서 조선의 화폐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는 80년대 들어서 맹아론이 비판받음과 동시에 사료상황이 크게 호전되고 다양한 분야에서 실증적 연구의 정치함이 높아졌는데, 그것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틀이 아직 충분히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 있다.(須川 英德)
주(註)
주1)
주인집에서 따로 떨어진 집을 의미하며, 보통 양인이 투속하여 주인집의 땅을 소작하고 집을 제공받는 대신 소작료와 노동력을 지불했고 집주인과는 예속적인 관계였다.
주2)
양안에는 등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경작되지 않는 토지이다.
주3)
조선초기 신분관에 따르면 士‧農과 工‧商은 각기 ‘本末’ 또는 ‘貴賤’의 관계로 설정되고, 나아가 사회관계상에서는 ‘上下’로 위치하고 있었다. 이 관념은 經濟運營의 주체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즉 경제적 이권을 둘러싸고 士大夫‧地主의 工‧商지배를 합리화하고, 그 최상위에 국가와 군주가 위치하기 때문에 상품유통과 관련하여 생기는 利權을 국가‧군주가 장악‧관리함으로써 상업을 비롯한 경제운영에 국가 혹은 군주가 적극 간여해야한다는 사상이 ‘利權在上論’이다.(朴平植, 1999, 「朝鮮初期의 商業認識과 抑末策」, 『東方學志』 104)
주4)
以末補本論은 末業 즉 상업을 통해 재정을 보충하자는 주장이다. 이말보본론이 대두된 때는 16세기 중종대였는데, 이 시기에 앞서 연산군의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재정상황이 악화되었고 당시 발달하던 상업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으로 재정을 확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말보본론자들은 財利의 추구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국가운영의 중요한 측면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행위를 백성과 이익을 다툰다고 여겨 반대하는 신료들도 있었으나 국왕에 의해 조정되는 선에서 이후 큰 변동 없이 지속되었다.(구도영, 2013, 『朝鮮 中宗朝 對明貿易 硏究』,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주5)
京主人이란 도성에서 공물의 방납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조선 전기에는 지방향리가 상경하여 경주인으로서 활동하였으나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서울에 거주하는 자를 경주인으로 差定했다. 대동법 실시 이후 경주인은 선혜청에서 役價를 지급받으며 공인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營主人은 각 읍의 아전 출신으로 감영에 파견되어 감영과 군현의 연락사무를 주로 담당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군현 단위로 현물을 바치던 外方貢物이 점차 감영에서 전문상납인을 두어 공물을 바치는 營作貢으로 전환되었고 이러한 추세 속에서 영주인은 영작공의 담당자로 편입되어 갔다.(金東哲, 1993, 『朝鮮後期 貢人硏究』, 韓國硏究院)
주6)
務本補末論이란 농업발전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임진왜란이후 국가경제정책을 수행하는 관료들의 이론적 근거로 정착되어갔다. 務本補末論者들은 公共을 위한 이익의 추구는 당연한 행위라 보았으며 상업을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확보라는 2중의 과제를 동시해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통경제의 발전을 추구했는데 이는 여기서 발생하는 이익을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자원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국가가 상품유통경제의 발전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장악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는데 17‧18세기의 상업정책은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白承哲, 2000, 『朝鮮後期 商業史硏究』,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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