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正祖의 龍珠寺 창건과 운영

同黎 2013. 10. 26. 00:40

正祖의 龍珠寺 창건과 운영

한국사학과 석사수료

박세연

머리말

正祖는 아버지인 思悼世子를 伸寃하면서 동시에 永祐園을 수원으로 옮기고 園號를 顯隆園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현륭원에 필요한 祭需를 공급하고 무덤을 수직할 造泡寺를 건립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용주사이다.1) 조선왕조는 새로운 사찰의 창건을 금했기 때문에 정조는 현륭원 근처의 갈양사라는 절의 터를 찾아내어 이를 중건한다는 명목으로 용주사를 사실상 창건하였다.

이후 용주사는 왕실의 지극한 비호를 받으며 크게 성장하였고, 불교계 내부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일제시대 불교계의 실력자로 30본산 연합사무소의 위원장을 지내고 불교중앙학림을 세움 姜大蓮(1875~1942)이 바로 용주사 주지였다는 사실은 용주사의 높은 위상이 20세기까지 이어졌음을 반증한다. 여기서는 짧게나마 정조의 용주사 창건과 운영을 중심으로 중앙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된 용주사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정조의 화성 정비 계획과 용주사 창건

재위 10년 이후 정조는 자신의 탕평론을 밀어붙이며 정치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추진한다. 정조는 우선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개건하고 영우원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수원 화산 인근으로 옮기도록 결정한다. 그리하여 정조 13년(1789)부터 현륭원 공역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정조 14년(1790) 2월에 용주사 건립 공사가 시작되어, 그해 10월에 완성된다. 정조는 직접 사찰 건립을 독려하며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偈頌을 지었으며2), 李德懋(1741~1793)에게는 勸善文을, 좌의정 蔡濟恭(1720~1799)에게는 上樑文을 짓도록 하였다.

용주사의 건축은 훈련도감군 등 군사를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건축에 드는 비용은 주로 시주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이 때 시주 내역을 적은 정조 13년(1789) 작성된 「龍珠寺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의 내용이 전해지는데, 그 내역 중 일부를 정리한 것이 아래의 표이다.


施主者

錢(兩)

施主者

錢(兩)

경기도관찰사

500

수진궁

300

수원부사

300

육상궁

300

선혜청

1000

선희궁

300

호조

500

안현궁

100

병조

500

경수궁

200

장용사

500

가순궁

200

훈련대장

500

청연군주방

100

금위대장

500

청선군주방

100

어영대장

500

京各廛

2991

수어사

300

各貢物房

921

총융사

300

경기각읍

2108

사복시

300

개성부영읍

455

장흥고

1000

강화영읍

300

제용감

100

황해도영읍

7272

내옹원

100

강원도영읍

2159

내수사

1000

경상도영읍

13385

내탕고

500

평안도영읍

13692

어의궁

300

함경도영읍

444

용동궁

300

전라도영읍

8245

명례궁

500

總計

87505


위의 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용주사의 시주액은 87505냥이 넘는 거액이었다. 이를 쌀로 계산하면 17501石·26만여斗에 달한다. 시주자도 호조·선혜청과 병조를 비롯하여 각 군영과 궁방 그리고 팔도의 各營邑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용주사에 전해지는 『大施主縉紳案』에는 팔도의 관찰사와 統制使 및 86명의 수령이 大施主를 한 것이 기록되어 있어 용주사 건립이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특이한 점은 서울의 시전상인과 공인 등 상인계층이 시주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시주한 금액은 대략 4000냥 정도로 선혜청이나 내수사보다 많은 금액이다. 왜 이렇게 상인들의 시주가 많았을까? 그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시전상인과 공인은 모두 국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인으로 국가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의 시전 상인들은 궁방과 아문들의 고질적인 외상문제를 호소하고 있었고, 정조는 이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순막을 통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용주사의 시주 기록은 18세기 후반 시전 상인과 국가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될 것이다.3) 

건립 이후에도 정조의 용주사에 대한 비호는 계속되었다. 정조는 용주사에 전답을 하사했으며, 華城(水原)留守府에서 매년 쌀 20석, 돈 100냥, 포목 20필을 지급해주도록 하였다. 또한 용주사의 운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용주사의 환곡 운영을 허락해주고 만약 이 중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는 경우 留守府에서 급대를 해주도록 하였다. 또한 장흥의 寶林寺, 곤양의 多率寺 등 3개의 사찰을 속사로 지급해 주어 제수 마련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현재 순조 32년(1832) 작성된 용주사 양안인 『龍珠寺位畓班戶舍音作人等厘正冊』이 전해지고 있어 대략적인 용주사의 경제 규모를 알 수 있다. 용주사 소유의 전답은 畓이 78石 3斗 4升落地이고 田이 68石 16斗 4升 5合落地이다. 주로 용주사 주변의 수원부와 振威縣에 토지가 집중되어 있다. 이는 가장 보수적으로 계산해보아도 30만평(100만m2, 100ha)에 이르는 광대한 표지였다. 용주사는 이 토지에서 매년 400석에 이르는 쌀을 賭租와 稅租로 거두고 있었다.

이처럼 막강한 재정원을 바탕으로 용주사는 18세기 이후 가장 대표적인 사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오도규정소 설치와 용주사의 장용영 승군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조는 장용영에 엄청난 재정을 확보해 주었다. 창건 당시의 시주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세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조가 용주사에 이렇게 많은 재정을 확보해 준 것은 용주사가 단지 현륭원의 조포사였기 때문일까? 창건 이후 정조가 용주사에 취한 조치를 살펴보면 용주사는 단순한 조포사 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용주사 건립 이후 수원의 용주사와 광주의 奉恩寺, 양주의 奉先寺, 남한산성의 開元寺, 북한산성의 重興寺에 승려들을 관리하는 僧風糾正所를 세워 각각 팔도의 사찰을 관리하게 하는데 이를 五都糾正所라고 한다.4) 이들 사찰 중 용주사가 가장 격이 높은 사찰로 八路都僧院이 설치되었다.5) 용주사가 이렇게 전국의 사찰을 통솔하는 사찰로 격상된 것은 정조의 화성 경영 구상 및 장용영 설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고 여기에서 上王이 되어 정국을 운영하려 했는지, 아니면 아예 천도를 결심했는지 여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원이 兩京의 하나에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원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며 동시에 수원을 대도시로 유지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설치된 것이 바로 壯勇營이었다.

장용영의 外營은 수원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정조는 용주사에 승군을 모집하게 하고 이들을 장용외영에 소속시켰다. 장용영에 소속된 승군들은 화성 수비에 동원되는 동시에 어가 행행시에는 어가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수원에 소속되어 있던 禿山城(현재 오산시 소재)을 방어를 용주사 승군들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용주사 승군의 정확한 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처음 창건 시에는 200명 정도였으나 점차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용주사에 승직 중 최고직인 都摠攝을 설치하여 승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있던 義僧의 제도에 준하여 용주사 승군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는 대규모 승군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는 용주사 승군을 유지·확대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취했다. 앞서 언급한 용주사의 환곡은 바로 승군의 급료를 주기 위해 허락한 것이었다. 환곡의 부족분은 유수부에서 급대해 승군 급료 지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또한 남·북한산성의 의승은 30년을 수직할 경우 통정대부·가선대부의 帖을 내려주었는데, 용주사의 경우는 그 절반인 15년만 수직하여도 첩을 내려주도록 하여 승군의 모집을 격려하였다.

이처럼 용주사는 군사적 역할도 담당하는 사찰로 18세기 후반 승군의 중심적 사찰로 부상하였다.


4. 용주사의 가람배치와 유물

용주사는 현륭원 후에는 융건릉의 조포사였을 뿐만 아니라 정조의 현륭원 行幸 시에는 임시 행궁의 역할도 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사찰에 비하여 조금 독특한 가람배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정조와 관련된 유물도 여럿 전해진다. 용주사의 건축과 유물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홍살문삼문(三門)은 용주사의 입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찰이 山門으로 일주문을 세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용주사 삼문은 좌우로 행랑이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홍살문과 삼문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齋를 올리는 용주사의 능찰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독특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용주사의 중심 건물로 정조 13년 창건 당시의 것이다. 전반적으로 섬세하고 화려한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 안에 봉안된 삼세불과 후불탱화·삼장탱화·감로탱화, 닷집 역시 모두 창건 당시의 것으로 전해진다. 특기할만한 것은 후불탱화를 비롯한 불화들인데, 용주사에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金弘道(1745 ~ 1806?)가 그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미술사학계에서는 김홍도 제작설을 부정하는 흐름도 있다. 하지만 한국미술사에서 최초로 서양의 음영을 이용한 원근법을 표현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후불탱화 아래에는 銀子로 국왕과 혜경궁(慈宮)·중궁·세자의 장수를 비는 글씨가 보인다.

천보루(天保樓)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역시 창건 당시의 건물인데 1층 기둥에는 왕실에서만 사용하였던 熟石(사면을 모두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왕실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천부루 좌우로는 각각 7칸의 회랑이 달려 있고 회랑은 동쪽의 나유타실(那由陀寮)과 서쪽의 만수리실(曼殊利室)로 연결된다. 이 두 건물은 역시 상당한 큰 규모의 건물로 현재는 요사채와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세 건물은 바로 국왕 행행시 임시 행궁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역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건물들이다.

호성전(護聖殿)은 창건 당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일년에 6번의 재를 모시던 건물이다. 그후 차례로 혜경궁 홍씨와 정조,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한일병합 당시 제사가 강제로 중단되었고 현재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이 밖에 지장전(地藏殿)·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천불전(千佛殿) 등의 불전이 있다.

용주사 범종은 국보 120호 고려 초의 범종이다. 종의 몸통에 새겨진 명문에는 문성왕 16년(854)에 조성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종의 형태와 문양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신라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종으로 보고 있다.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음통이 있으며 비천상 역시 신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좌가 네 개로 늘어나고 비천상과 함께 삼존불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석가여래의 설법 중 부모가 자식에게 베푼 은덕과 자식이 부모에게 보답해야 할 효행에 관한 내용을 모아 만든 한문본 불경으로 엄격히 말하면 중국에서 창작된 僞經에 속하지만 위경을 인정하는 불교의 특징 상 경전으로서의 성격을 잃지 않았다. 정조는 정조 20년(1796) 용주사에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한문본과 언해본을 목판으로 간행하여 인쇄하였다. 그 후 경전의 내용을 각각 석판과 동판에 새겨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는데 목판과 함께 모두 보물 1754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용주사에는 정조가 하사하고 호성전에 놓였다고 생각되는 청동향로 두 점과 4폭 병풍이 전해지고 있으며 갈양사터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오층석탑과 순조 2년(1702)에 세운 오층석탑 역시 전해진다.


맺음말

용주사는 18세기 이후 조선 불교계의 가장 중요한 사찰로 급부상하였다. 그 배경에는 정조의 화성 경영 구상과 장용영 설치 등이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정조는 대규모 비용을 투입하여 용주사를 건립하고 승군을 모집하였다. 용주사는 화성유수부의 운영·재정과 함께 앞으로도 많은 정치·경제사적 연구 가치를 지닌 사찰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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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본래 조선 왕실 인물의 능원 근처에는 능원을 관리하고 제수를 공급하며 망자의 명복을 비는 각종 齋를 담당하는 陵寢寺·陵刹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健元陵의 開慶寺, 貞陵의 興天寺, 英陵의 神勒寺, 光陵의 奉先寺, 宣陵의 奉恩寺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능원 인근의 능찰 조성을 금지하였고 이는 『大典通編』에 수록되었다. ( 『大典通編』 卷3, 禮典 寺社 “陵寢至近之地創寺刹者嚴禁 陵官不禁者重勘【英宗庚寅下敎】”) 그러나 여전히 각 능·원·묘를 관리하는 사찰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후로는 이를 조포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설치하였다.

주4) 용주사는 전라도를, 개원사는 충정도·경상도를 중흥사는 평안도·황해도를 봉선사는 함경도를, 봉은사는 강원도를 담당하였고, 경기도는 5개 사찰이 나누어 관할하였다. 이 밖에 양주의 흥국사와 서대문 밖의 봉원사에는 公員所를 두어 규정소의 서무를 돕게 하였다. 후술하겠으나 용주사와 중흥사, 개원사는 모두 군사적 성격이 강한 곳이기 때문에 많은 사찰이 소재한 도를 우선적으로 분배하였고, 봉은사와 봉선사는 각각 선릉과 광릉의 능침사로 세종대부터 각각 선·교종의 도회소로 불교계의 중심적 사찰이었기 때문에 규정소에 들어갔으나 국가의 활용도는 낮은 사찰이었기 때문에 각각 상대적으로 사찰 수가 적은 함경도와 강원도를 배정했다고 보인다. 또한 흥국사가 덕흥대원군의 묘를 수직하는 원찰이었고, 봉원사는 태조와 육상궁의 원당으로 격이 높은 사찰이었기 때문에 공원소로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주5) 八路都僧院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아직 연구된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