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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8 - 총설8

도쿠가와(徳川)와 명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마냥 연기를 하면서까지 명기를 다루지는 못했다. 그가 군정(軍政) 상 사려있고 주도면밀해야 하는 대장이기에 물론 명기의 가치는 알았지만, 실가(實價) 이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철저함을 처음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마츠다이라 넨세이(松平念誓)에게서 하츠하나 카타츠키 차이레(初花肩衝茶入)를 얻고 그 대신 영지 500석을 주라고 말했던 것처럼 명기에 대한 관념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곧바로 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격퇴를 축하하는 물품으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떻게 명기이용 방법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 케이초(慶長) 5년(1600)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카케카..

雜/대정명기감 2021.08.05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7 - 총설7

명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정책에서 완전히 노부나가를 답습하였는데, 명기 이용책에서는 이를 더더욱 확장하여 다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히데요시가 다사(茶事)를 좋아하고 명기를 애용한 것은 노부나가 이상으로, 텐쇼(天正) 10년(1582) 노부나가 사후에 이미 노부나가가 데리고 있던 츠다 소큐, 센노 리큐 등을 임용하여 이들 사카이 출신 종장을 통해 재빨리 사카이슈(堺衆)의 관심을 샀다. 노부나가를 대신한 지 얼마 되지 않고, 풍운망창(風雲莽蒼)으로서 천하가 어느 쪽으로 정해졌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 초암(草庵)에서 차 끓는 소리를 들었으며, 황금다실(金屋)에서 다이스(台子) 다회를 열면서 큐슈 정벌에서도 리큐 등을 대동하고 다다르는 곳마다 풍류아회(風流雅会)를 열었다. 오다와라..

雜/대정명기감 2021.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