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의 토지제도개혁론

同黎 2014. 10. 24. 03:36

磻溪 柳馨遠과 茶山 丁若鏞의 토지제도개혁론

 

조선후기 박사2

박세연

 

머리말

 

1. 반계 유형원의 公田制

 1) 토지 사유의 폐지

 2) 結負法의 폐기와 頃畝法의 사용

 3) 職役에 따른 토지 분급과 兵農一致

 4) 1/10 稅制의 실현

 

2. 다산 정약용의 井田制

 1) 閭田制

 2) 이상적 정전제 구상

 3) 公田 설치와 1/9세제 시행 방안

 

 

    3. 유형원과 정약용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ⅰ. 토지 사유에 대한 부정적 태도

      ⅱ. 세제의 개혁

      ⅲ. 병농일치

     2) 차이점

      ⅰ. 不農者에 대한 토지 분급

      ⅱ. 지주-전호제에 대한 태도

      ⅲ. 상공인에 대한 태도

 

   맺음말

 

 

머리말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은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이어진 경세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유형원은 비록 남인이었지만 그가 저술한 『반계수록』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조선의 관료와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정약용은 비록 진산사건 이후 정계에서 밀려났지만 유배기의 공부를 거쳐 해배기에 1표2서로 대표되는 방대한 양의 경세서를 남겼다. 이들이 살았던 기간이 비록 150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이상국가를 설계하였고, 그 기저에는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론이 있었다는 점이다.

 농업사회였던 조선에서 토지는 생산력의 근간이 되는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었다. 때문에 토지의 분배와 토지에서 생산된 재화의 수취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국가와 지역공동체 모두를 가로지르는 경세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형원과 정약용 역시 전제에 대해서 꼼꼼하고 방대한 저술을 남겨 토지제도 개혁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토지제도개혁론은 조선후기 경세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만큼 이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선행되었다. 특히 반계 유형원의 공전제1)와 다산 정약용의 여전제‧정전제는 토지의 사유화를 반대하고 이를 재분배하여 국가의 근본적인 시스템을 바꾸려고 했던 설계계획이었다는 점에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대부분 토지개혁론 안에서 근대국가로의 발전 가능성을 찾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양극단의 편향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①반계와 다산의 토지개혁론 안에 있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성격과 ②이들이 꿈꿨던 국가의 발전방향성에 그 자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다루어지지 않는 바가 많았다.  

 이 글에서는 선행 연구의 성과에 기대어 유형원의 공전제와 정약용의 여전제‧정전제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첫째 조선의 지식인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공통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둘째 반계와 다산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 150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선이 변화한 모습이 무엇이며 그에 따라 왜 다산의 개혁론이 변화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반계 유형원의 公田制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사적인 모리의 수단으로 전락한 토지를 공유로 전환하여 그 공공재적 성격을 환기하여 이를 회복하기 위한 제도를 강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전제의 틀 위에 국가의 호혜적 재분배 기능을 복원하는 자신의 이상국가론을 완성하였다.2) 지금부터 반계 경세론의 핵심이 되는 공전제의 특징과 내용, 그리고 이와 연관되는 세제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토지 사유의 폐지


유형원 토지제도 개혁론의 핵심은 바로 토지 사유의 폐지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는 토지의 國有라던가 王土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유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유형원의 이러한 구상은 오래전부터 고대 국가의 가장 이상적 토지제도로 평가되던 정전제를 조선에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상·주와는 달리 조선은 봉건제가 아닌 군현제 국가였고 따라서 반계의 정전에 역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주나라의 정전법은 사방 1리를 한 개의 정전으로 하고, 그 정전은 900묘였다. 900묘의 토지는 9개로 갈리어 여덟 집의 농가(夫)에 각각 100묘씩 분급되었고, 각가의 농가에서는 분급된 토지 외에 공전을 공동으로 경작하며, 공전에서 나온 소출을 세금으로 국가에 납부하였다. 다소 복잡한 계산을 거쳐야 하긴 하지만 정전법은 대략 소출의 1/10을 국가에 납부하는 것이었다.

 정전의 시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중국과 조선에서 모두 의견이 갈렸다. 程顥·程頤 형제와 장횡거는 모든 토지를 井字로 구획하는 것이 아니고 지형상 힘든 곳을 계산상으로 100묘를 모아 1夫를 만들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정전을 복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朱熹는 정전은 지형상의 문제로 사실상 복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흐름은 송시열·한원진에게로 이어졌다.

 유형원은 정전이 시행되기 어렵다는 설을 부정하고 정전을 복구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고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무감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17세기 확대되던 토지겸병 즉 지주-전호제의 확대가 토지소유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이에 따라 사회적 빈부격차가 더 커졌던 당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유형원은 병작제가  농민의 몰락을 빠르게 할뿐만 아니라 경작자인 전호의 노동의욕을 저하시켜 토지생산성을 떨어트리고 토지소유와 군역을 괴리시키는 ‘병농분리’의 원인이 되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유형원은 병작제·지주-전호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개혁, 즉 정전제를 구상하였던 것이다.3)

 유형원의 공전제는 토지의 사유를 금지하고 전체를 공유하여 이를 직역에 따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농민을 토지에 긴박시켜 병농일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국역체제를 복원하고 1/10세제를 복원해 立國과 安民을 동시에 달성으로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다만 주나라의 정전제를 그대로 준용하여 8夫를 1井으로 하고 그들이 국가에 소출을 납부하는 公田을 경영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직역자나 농민이 국가로부터 토지를 수급받되 이 토지는 경작할 수만 있고 매각하거나 매입할 수 없으며 정해진 면적 이상의 토지를 경작할 수도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여기서의 公田은 공공재로써의 토지의 성격을 극대화한 것이었다.

 

 2) 結負法의 폐기와 頃畝法의 사용


 직역에 따른 토지를 분급하기 앞서 해결해야 될 문제는 바로 결부법의 폐기였다. 세종 이래 수세의 기본 단위로 만들어진 결부는 등급에 따라 면적을 달리하여 양전의 과정에서 농간이 극에 달해있었다. 유형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바로 이 결부법을 폐지하고 실제 면적을 기준으로 하는 경묘법을 통해 동일면적 동일과세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형원이 설정한 1경은 농민 1가구의 최소한의 상계 기반이다. 1경은 곧 100묘에 해당된다. 그리고 1夫가 부괄하는 家는 5~8인 가족을 표준으로 하였다. 즉 결혼한 부부와 자녀 및 일부 예속인으로 구성된 5인 가족에 조부모 등을 포함한 것이 8인 가족이었다. 반계는 이 정도 인구가 흉년이나 자연재해에도 견딜 수 있으려면 적어도 40두락 즉 1경의 토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농민 1夫가 받는 1경은 40두락의 실제 면적은 경묘법에 의한 토지 면적을 측정하는 기본 단위인 周尺의 길이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반계수록』의 주척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의 기준으로 대략 5000평이 조금 안되는 크기라고 보인다.4)

 특이한 점은 유형원이 『주례』에 규정된 내용 일부를 고쳤다는 점이다. 『주례』에는 휴경이 필요한 토지일 경우 토지를 더 지급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유형원은 땅의 비척에 따라 분급지를 늘려준다면 민이 협호를 받아 들여 경영할 것이기 때문에 지주-전호제가 부활한 것을 우려하며, 1경의 땅은 이미 넉넉하기 때문에 더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주제의 부활에 대한 염려와 더불어 어느 정도 토지 생산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1경의 땅이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을 하는 추측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3) 職役에 따른 토지 분급과 兵農一致


 경무법에 의해 조정된 토지는 직역에 따라 각각 직역에 따라 분급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직역

분급받은 공전

賜稅地

전세

군역

왕족

10~12경

100~500石洛地

사세지는 면세

사세지의 경작자가 부담

관직자

6~12경

-

부담

면제

2~4경

-

부담

면제

농민

1경

-

부담

부담

商‧工人

0.5경

-

부담

부담

이서·복예

서울 : 녹봉

-

-

면제

지방 : 녹봉+0.5경

-

부담

 

 농민(夫)는 기본적으로 1경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리고 토지에 대한 세금과 군역을 부담하게 하였다. 이는 농민은 국가로부터 공전을 받고, 그 대가로 국역을 납부하는 호혜적 관계의 복원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여 士 이상은 농민보다 많은 토지를 배정받고 있는데 이는 군자와 야인을 분리하는 신분질서에 입각하여 공전제를 설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농민 4夫는 하나의 그룹이 되어 그중 1부는 정군, 나머지 3부는 보인이 되어 국역을 부담한다. 가장 장성한 1명 정병이 되어 입역하고 나머지 3부는 보인이 되어 1년에 미 12두 혹은 조포 2필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정병과 수군은 보인을 3명 설정하였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절의 경우는 3경을 단위로 하여 정군 1명에 보인 2부로, 속오군은 정군 1명에 보인 1부를 배치했고, 봉수군·능로군·사후·기고수·각릉수호군 등은 보인이 없이 1경에서 1명을 내었다. 유형원은 공전제를 통해 완전한 병농일치를 계획했던 것이다.

 병농일치에 대한 반계의 치밀한 설계는 田籍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반계가 제시한 전적은 기존의 양안과 큰 틀에서 비슷하지만 한 字號를 16경의 토지를 기준으로 묶고, 1자호에서 3명의 병사를 내도록 기제되었으며, 기주나 작인의 성명 대신 수전자의 직역이 들어가고, 부담해야 할 세액이 들어갔다. 조선시대 양안이 5결을 한 자호로 하고 있어 8결을 단위로 하는 작부제의 기준과 맞지 않아 수취장부로써 치명적 약점이 있는데 비하여, 유형원이 제시한 전적은 그 하나면 보면 실제 수전자와 그 지역, 그리고 납부하는 세까지 알 수 있도 수취장부로써의 역할을 훌륭이 해낸다. 전적이 호적·군적의 기초 자료가 된다는 점도 기존의 양안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편 士는 국가의 기반으로 높이 평가되면 농민보다 2~4배의 토지를 더 분급받았다. 관직자 역시 마찬가지로 품계에 따라 최대 12경의 토지를 분급받았다. 그런데 왕족의 경우에는 조금 특이한 부분이 보인다. 바로 수조권을 받는 사세지를 분급받았다는 것이다. 제임스 팔레는 이 부분이 반계 공전제의 모순된 부분이며, 일반적인 그의 원칙과는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5) 그러나 이는 모순되었다기 보다는 당시 조선의 현실에 적절히 맞춘 것으로 보인다.

 종친에게 지급되는 토지는 관직자에 비하여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유교이념상 국왕은 親親을 다하기 위하여 이들을 우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반계는 이들에게 공전을 더 지급하는 대신 공전 위에 설정된 사세지를 설정해 궁방이 토지를 더 많이 점유할 근거를 없애면서도 이들을 예우하였다. 또 한가지 생각해야 될 점은 이들 왕족(종친과 외척을 포함하여)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는 지공을 받고, 죽어서는 제사를 받는다. 비록 유형원이 내수사의 혁파를 주장하기는 했지만,6) 죽어서 왕실 인물들의 제사를 지내주는 궁방까지는 다루지 못한 것 같다. 이들 왕족은 하나의 개개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관에 가깝다. 『반계수록』에서 사세지가 내려지는 곳이 학교·군문·역 등 국가기관을 제외하면 왕족이 유일한데, 이는 왕족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제는 士 이상은 모두 실제 농사를 짓는 이들이 아닌데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내용은 있지만 지급한 토지를 누가 경작하는지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반계가 사실상 지주-전호제의 현실을 인정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으며, 그가 노비제에 대해서 비교적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7)

 상공인의 경우 0.5경을 주어 생업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으며 그 외의 각종 직역자는 모두 1경을 지급했다. 이서와 복예의 경우 녹봉을 주도 서울의 관청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공전을 주지 않고, 지방 관청에 속한 이들은 0.5경을 주되 모두 군역에서 면제해 주었다.  그 밖에 성읍경·여리경·참점경·포자경 등 택지와 공용두지 및 역참과 포자에 대한 운영비용도 공전으로 지급했으며 군영과 수영 및 학교·역·진포에는 사세지를 지급하여 운영비용으로 삼도록 하였다.

 

 4) 1/10 稅制의 실현


 유형원은 비록 정전제를 그대로 시행하지는 않더라도 1/10세를 구현할 수 있다면 정전제의 취지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8) 최윤오는 반계 공전법의 핵심이 바로 이 1/10세의 복원에 있으며 반계는 세종대 만들어졌으나 원칙이 무너진 공법을 수정·보완하며 국초의 이상인 전세에 의한 국가 재정 운용을 현실화시키려 노력했다고 평가한다.9) 반계의 공전제는 주대에 행해졌던 1/10세를 회복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반계는 공법을 수정하여 1/10의 세제를 제시하였다. 전분 6등은 너무 소략하니 9등제로 교체하였다. 이는 1등과 6등 사이 동일면적당 소출을 4배로 보았던 공법을 수정해 1등과 9등 사이를 5배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반명 연분은 축소하여 기존의 9등에서 3등으로 수정하였다. 상·중·하년의 아래는 급재의 대상이 되었다. 반계는 공법 시행 당시에는 있지 않았던 급재를 연부에 포함시켜 일률적으로 운영하고 급재 대상에서 빠졌던 한전(밭)도 대상에 포함시켜 전세제도를 보다 합리적으로 조절하려 하였다.

 이렇게 조절했을 때 예컨대 1등전이 상년에 생산한 皮穀이 400곡(두)면 내야할 세미는 10두였다. 피곡을 미로 탈곡했을 때 2:1이 되어 피곡 400곡은 미 200곡이 되므로 1/20세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피곡 400곡을 탈곡했을 때 손실분이 커 세율이 1/15까지 상승하고 운송비를 제하면 1/10의 세율이 맞추어진다고 보았다.

 유형원은 이런 방식의 재정 확보책이 결코 비현실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병농일치의 상황에서 전국에서 공전제로 동원 가능한 군사는 93만명으로 당시 정군이 6만명에 미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전세수입도 마찬가지로 반계는 공전제를 통해 303만 석 이상을 기대했는데 이는 당시 19만 여 석의 전세의 15배 이상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는 損上益下라는 당시의 재정원리를 뛰어넘어 益上益下가 가능했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2. 다산 정약용의 井田制

 

 

 다산 정약용은 젊은 시절 향촌 공동체를 곧 생산의 공동체로 하는 여전제를 주장하며 정전제의 시행 가능성을 부정한 바 있다. 그러나 유배기 이후 그의 경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지면서 다시 정전제의 시행을 주장하게 되었다. 여전론과 정전론의 모순되는 내용 때문에 다산의 사상이 젊은 시절 급진적이었다가 나이를 들면서 점차 타협적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전제야말로 다산이 오랜 연구 끝에 치밀하게 완성한 토지개혁안이며 그 안에는 여전제와 똑같은 정신이 들어있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는 먼저 여전제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 그후 구상된 다산 정전제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閭田制


 여전제는 정약용이 38세에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일종의 공동체에 의한 토지 공동 소유・경작에 대한 구상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전지를 얻도록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지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면, 閭田의 法을 시행하여야만이 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閭田이라 하는가. 산골짜기와 川原의 형세를 가지고 경계를 그어 만들고는, 그 경계의 안을 閭라 이름하고 [주나라 제도에 25가를 1閭라 하는데, 이제 그 이름을 빌려 대략 30에서 약간 나가고 들어감이 있게 하고, 또한 반드시 그 율을 일정하게 하지는 않는다. 閭 셋을 里라 하며, 『風俗通』에 의하면, 50家를 1里라 하는데, 이제 그 이름을 빌렸으나, 반드시 50家로만 하지는 않는다.] 里 다섯을 坊 [坊은 邑里의 이름으로, 한나라 때에 九子坊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나라 풍속에도 또한 이것이 있다.]이라 하고, 방 다섯을 邑[주나라 제도에 4井을 邑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군ㆍ현의 소재지를 읍이라 한다.]이라고 한다. 閭에는 閭長을 두고 무릇 1閭의 전지는 1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다 함께 그 전지의 일을 다스리되, 彼此의 疆界가 없이 하고 오직 閭長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한다.

매양 하루하루 역사할 때마다 閭長은 그 일수를 장부에 기록하여 둔다. 그래서 추수 때에는 그 五穀을 모두 여장의 堂 [閭 안의 都堂이다.]에 운반하여 그 粮穀을 나누는데, 먼저 公家의 세를 바치고, 그 다음은 閭長의 祿을 바치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날마다 役事한 내용대로 장부에 의해 분배한다. 가령 곡식을 수확한 것이 千斛 [10斗를 1斛으로 한다.] 일 경우, 그 장부에 기록된 역사한 日數가 2만 일이면 매양 하루당 양곡 5升을 분배하게 된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 부부와 아들과 며느리의 장부에 기록된 역사 일수가 모두 8백 일이면 그 분배된 양곡은 40斛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의 경우, 그 장부에 기록된 역사 일수가 10일면 그 분배된 양곡은 4斗뿐인 것이다.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은 양곡을 많이 얻게 되고 노력이 많지 않은 사람은 양곡을 적게 얻게 되니, 그 힘을 다하여 많은 양곡을 타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그 힘을 다함으로써 토지에서도 그 이익을 다 얻게 될 것이다. 토지의 이익이 일어나면 백성의 재산이 풍부해지고, 백성의 재산이 풍부해지면 풍속이 순후해지고 효ㆍ제가 행해지게 될 것이니, 이것이 田地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10)

 

 다산의 여전제는 閭라는 향촌 공동체를 기본으로 한다. 1려는 대략 30가구를 묶은 것으로 지형을 참작해 구획을 정해 그 안의 모든 토지를 여를 조직해 공동경작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여를 확대헤 里 -坊-邑의 지방행정조직을 편제할 것을 구상하였다. 여의 토지는 사유가 아닌 공동의 소유로 30가구가 힘을 합쳐서 공동 경작한다. 이 여는 행정촌이 아닌 자연촌란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11)

 여 안에는 1명의 여장을 두어 작업을 분배·지시하며, 각각의 노동량을 일역부라고 하는 장부에 기록한다. 그리고 국가에 세금을 바친 후에 나머지를 일역부를 참고하여 작업에 참여한 일수에 따라 분배하도록 한다. 조세는 1/10세였으며 여 안에서의 토지의 사유는 불허되었고 자연히 지주-전후 관계도 성립할 수 없었다. 이로써 농민들의 노동을 유도하여 토지생산성을 확대시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여전제였다.

 여전제에서 특이한 점은 바로 다산이 농민들의 이동은 한시적으로나마 허용했다는 것이다. 즉 각 여마다 땅을 비척 등에 따라 넉넉하고 부족한 곳이 있을터인데 8~9년 동안 농민의 이동을 허가해준다며 이들이 알아서 이동하여 곧 전국의 노동생산성과 빈부가 균등해질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여전론과 정전론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김용섭은 이 여전제는 완전한 토지 국유·공유의 안으로 이후 다산이 토지의 국유가 불가능 한 것을 인정하고 일정 기간 사유를 인정하는 정전제를 주장하여 점차 독립자영농이 늘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때문에 그 경영규모와 양식이 모두 경영형부농의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12) 즉 다산의 여전제는 사적 소유의 확대에 따라서 좌초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정성철은 여전제의 구상이 農者得田이라는 원칙에 따라 사적 지주제를 철폐하고 토지의 공유제를 지향했으나 이는 봉건제 안에서 최고의 지주로서의 봉건국가에 토지를 위임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다고 평가하였다.13) 박찬승 역시 여전론과 정전론은 토지의 국유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여기서 독립경영농을 추출하기는 어렵다고 보아 김용섭의 의견에 반대하였다.14) 이영훈 역시 정전법의 기본 취지가 합리적 부세수취제도를 마련하는 균세적 개혁론이라고 평가하고 정전제론 안에서의 왕토주의에 주목하였다.15) 정태섭은 정약용의 정전론이 明 왕원의 강전법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여전론의 ‘지주제 부정’이라는 이상이 정전론에 현실적으로 반영되어있다고 보았다.16)

 

 2) 이상적 정전제 구상


 그렇다면 다산이 만년에 쓴 정전제의 이상과 실제는 무엇인가? 다산의 정전제는 『經世遺表』 地官修制의 「田制」에 기초하고 있다. 약간의 논란은 있으나 정약용이 여전론을 수정하여 『여유당집』에 포함시킨 것을 보아 여전론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유배기 이후로는 정전제로 더 기울어졌다고 보이고 있다.17) 그러나 앞서 살펴본 연구사에서도 보이듯이 토지의 국유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 논의를 일정부분 공통점을 지닌다고 하겠다.

 정약용은 정전제가 대단히 시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다른 전제를 검토하면서 정전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예컨대 口를 계산해 토지를 나누어주는 균전제는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고 따라서 지주-전호제를 되풀이하며 이는 농업생산성을 저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오늘날에는 온 백성이 전주가 되었으니 정전제를 도모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수백년을 두고 차츰 회수하여 차례대로 시행하면 선왕의 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니 한전·명전·균전 같은 법으로 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태아의 자루를 돌려잡으면 될 것이다18)라고 하여 현실적으로 한계적인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이 점이 다음 절에서 논의할 공전 설치와 그를 통하 1/9 세제 시행 방안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되리라 생각한다. 요컨대 토지국유화라는 이상을 지니되, 현실에서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다산의 토지개혁안인 것이다.

 다산이 구상한 정전제는 주대의 정전제를 계승하는 것으로 정이·정호 형제와 장횡거의 논의와 비슷한 점을 보인다. 먼저 평평한 땅은 井字로, 그렇지 않은 땅을 면적을 합쳐 100묘를 1夫로 만들고, 9夫를 1井로 한다. 이렇게 100井이 1成, 100成이 1終, 100終이 1同을 만든다. 그러나 평지가 아닌 이상 바둑판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못한다. 이렇게 구획된 정전은 8인 가족을 묶어 1夫를 만들어 1부에 100묘씩 분급한다. 1부에는 5~6인의 장정이 있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 餘夫라고 하여 250묘만 지급하였다. 이는 노동력의 다과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다산 정전제의 중요한 원칙은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자에게만 토지를 분급해준다는 것이다. 상·공 등에 종사하는 이들은 그 일에 열심히 종사할 뿐이고 토지는 지급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농사에 종사하며 동시에 힘이 있는, 즉 군사로써 가용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토지를 분급한도록 정하였다. 정약용은 『주례』의 구직론을 들어 計口分田의 균전법을 비판하고 농부에게만 토지를 지급할 것 강조하였으며 이를 통해 人多地小라는 비판을 피하여 정전제를 시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사회분업론적 시각은 다산의 雇工論에도 나타나는데 다산한 閒民 억제를 비판하고 이들이 있어야 농사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3) 公田 설치와 그를 통한 1/9세제 시행 방안

 앞서 살펴보았듯이 다산은 정전제를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바로 시행되기는 어렵다는 것 또한 인정하였다. 그래서 『경세유표』에는 현실적으로 1/9세법만이라도 시행하자는 주장을 하기 되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땅을 정전으로 구획하고 또 세율을 정전제와 같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전제의 원칙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세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경계사업과 공전설치가 핵심적이다. 여기서의 공전은 유형권의 공전과는 달리 국유지로, 곧 전국토의 1/9를 국가에서 매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토지 매입을 위한 비용을 조달하고, 경계작업을 담당한 관청인 經田司를 설치한다. 그리고 논배미를 정리하여 가능한 반듯하게 만든다. 그럴 수 없는 곳은 면적을 계산한다.  그리하여 100묘를 1夫로 하고 9夫를 1井으로 한다. 9부 중에 1부는 공전으로 하고, 남는 餘畝 역시 1/9는 공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자전을 구획할 때 가능한 정방형을 만들기 위해 상입된 땅을 서로 조절하여 완벽한 1區를 만들도록 하고 있다. 4井을 1촌으로 하고, 4촌을 1리로, 1리를 1방으로, 1방을 1부로 하고 각각 관리자를 두어 공·사전의 경작을 감독하게 한다. 사전 1부 안에는 여러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1부 안에서 1명을 뽑아 佃首라고 하고 역에 응하게 한다. 공전의 경작은 사전보다 우선하며 1부 안에 여러 사람이 있다면 소유 토지의 면적에 비례하여 맡도록 하였다.

 주목할만한 점은 다산이 여기서 지주-전호제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자.

 

 현재 국내의 밭으로 私田이 아닌 것이 없으니 장차 어찌할 터인가? 장차 큰 사업을 하려면 어찌 소소한 일에 구애되겠는가? 무릇 정전을 만들 만한 땅은 밭 임자의 승인 불승인을 불문하고 분할하여 정전을 만든 다음에 그 값을 물어서 그 중 공전 1區에 대하여는 관청에서 그 값을 치르되 대개 후하게 줄 것이고 기타 사전 8구는 그 時占에게 물어서[무릇 田은 王田이니 사사 주인을 田主라고 할 수 없다. 때문에 시점이라고 칭한다. 아래에도 다 그렇게 쓰니 독자는 이것을 자세히 살필 것이다.] 만약 그 8구가 다 한 집에 매인 토지라면 그전대로 두어 분할하지 말게 하고 다만 時占으로 하여금 8부를 엄선하여 八區를 나누어 주게 할 것이며 1부가 2구를 다루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전은 성립될 것이다. 그리고는 이 8부로 하여금 함께 공전을 다루어 전부 옛법대로 하여 나가며 가을에 공전의 소출을 거두어 기관에 바치고 다시는 이 8부에게 조세를 더 받거나 잡역을 더 시키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곧 9분의 1제이다. … 8부는 그 집에 반드시 壯男 3인이 있어야 전지를 받는다.19)

 

 위에서 보이듯이 사전 8구가 모두 한 명의 소유일 경우에는 주인(時占)이 8부를 선정해 그들에게 나누어 주며 공전까지 경작하게 하되 다만 1부가 2구를 얻지 못하게 하라고 하고 있다. 즉 소작을 허용하되 한 집안의 소작농가가 너무 많은 토지를 부쳐먹지는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토지는 모두 왕토이니 사사로운 주인을 전주라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며 時占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여 일견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지주-전호제를 인정하면서 왕토의 이상을 지키는 것이 다산 토지개혁론의 성격인 것이다.

 다산의 정전제에서의 수세는 사전에서 수세를 하지 않고 공전의 소출을 국가에 바친다는 점에서 주대의 공전제와 같다. 때문에 국가에서 파악하는 토지의 등급과 풍흉도 주로 공전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다산은 공전을 9등급으로 나누어서 수전과 한전 모두 租 100두에서 15두를 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남는 것은 1/9은 경작을 감독하는 村監에게 주고, 나머지는 8부의 농민들이 나누어 먹도록 하였다. 또한 풍흉을 살펴 급재를 주되 한전에는 재감하지 않도록 하였다.

 궁방전의 경우 유토·무토면세전은 각읍에 윤회하여 획급하고 영작궁둔은 민전과 같은 방식으로 공전을 만들어 수세하되 이것은 궁방에서 가져오도록 하였다. 둔전의 경우 5군영의 외방둔전응 혁파하여 각 읍에 소속시키고, 관둔전은 조예에서 주어 경작케 하며, 공수전·아록전은 혁파헤 군전으로 만들고 공수와 아록은 정전의 수세에서 가져와 쓰게 하였다. 역전·목전·도전·참전 등도 모두 정전법에 따라 운영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다면 이서배의 중간수탈이 줄어들어 국가의 수입이 늘고 민의 부담도 줄어들 것으로 보았다.

 경계작업이 끝난 뒤에는 농부를 군사의 대오로 편성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농부를 군사를 편성하는 병농일치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1촌의 128부에서 한명씩 군사를 내어 이를 10隊로 편성한다. 1夫 안에 여러 농민이 있을 경우에는 가장 건장한 자를 내보내고, 한 명의 농민이 2개 이상의 부에서 농사를 지을 때에는 가장 많은 토지가 있는 쪽에서 농부를 군사로 내도록 하였다.

 다산은 정전제의 실행이 당장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전의 물리적 구획과 1/9세제의 시행, 그리고 병농일치라는 정전제의 기본적 원칙을 현실에 시행하려고 한 것이다.

 

 

3. 유형원과 정약용의 공통점과 차이점

 

 

 반계와 다산의 토지개혁론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조선이 17세기 이후 지주-전호제의 생산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농업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다산이 반계를 참조하여 그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15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둘 사이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의 차이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제 이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조선 사회가 어떻게 지속되고 변화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공통점

 

  ⅰ. 토지 사유에 대한 부정적 태도

 유형원과 정약용은 모두 토지 사유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들은 생활에 필요한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이를 소작에 부쳐 일하지 않고 절반의 소출을 먹는 병작제·지주제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근본적으로 제시한 해결방안은 바로 토지의 국유·공유화이다.

 이들은 모두 왕토사상에 기반하여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은 단지 이를 경작할 권리만을 가질 뿐 처분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기초적 공동체를 국가 구성의 기초 단위로 하였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 유형원의 개혁안은 농민을 토지게 강력하게 긴박시키는 것이었으며 정약용의 여전제는 자연촌락을 기반으로 공동생산을 하며 토지의 사유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왕토사상, 혹은 토지의 국유화가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에서 주장하는 봉건제 부재의 근거로서의 토지국유화 혹은 맑스가 주장하는 아시아적 생산관계에서 이야기하는 최고의 봉건지주로써의 국가의 토지 소유와 같은 결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오히려 전체적인 국가의 호혜적 재분배체제를 복원하는 방법으로서의 국유화일 것이다.20)

 

  ⅱ. 세제의 개혁

  두 사람의 개혁안에서 모두 보이는 또 다른 내용은 모두 1/10 혹은 1/9의 세제개혁안이다. 이는 모두 『주례』와 『맹자』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소출의 1/10 ~ 1/9 정도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백성이 항산을 마련할 수 있으나, 지금은 부세가 부겁고 중간수탈이 심하며 지주-전호제의 영향으로 소출의 1/2를 또 다시 지주에게 빼앗겨야 하는 상황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들은 백성의 口를 계산하여 일정 양의 토지를 내누어주는 균전제를 큰 효과가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문제는 減稅와 均稅 였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제시한 정전제에서 먼저 1/9의 세제를 시행하고자 한 것은 바로 문제가 부세제도에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유형원이 결부제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경무법을 채택해 동일면적 동일과제의 원칙을 관철시키려 한 것 역시 균세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법의 전세 규정을 수정하였다. 연분과 전분을 재조정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전쟁 이후 형해화된 공법의 규정을 더욱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바꿈으로써 전세 자체의 수입을 늘려 국가재정의 전세 비중도를 높이고, 국가 재정을 확보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부세 부담을 줄여주려고 하는 것이 반계와 다산에게서 공통적으로 목격된다.

 

  ⅲ. 병농일치

 마지막으로 이들에게서 목적되는 공통점은 바로 농민의 토지긴박을 바탕으로 하는 병농일치체제였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대안이었지만 실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채택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늘어난 군영은 들어가는 군비가 엄청났으며 이를 마련하기 위한 재화투입과 둔전 설치로 인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군액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오군 역시 점차 천예화되고 실질적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토지 지급 - 역 부담이라는 국가와 농민의 상호 호혜관계를 복원하고 토지 지급이라는 역 부담의 반대급부를 실제화시킴으로써 국민개병을 이루려고 하였다.

 국민개병은 근대국가에서도 시행되는 궁극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군액 확보책이다. 비록 오래된 제도였지만 조선이라는 농업사회에서 병농일치에 기반한 국민개병제는 어쩌면 달성해야 할 ‘오래된 미래’ 였을지도 모른다.

 

 2) 차이점

 

  ⅰ. 不農者에 대한 토지 분급

 반계와 다산 토지개혁안에서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토지 분급의 대상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반계는 농민들은 물론이고 士 이상의 지배층에게도 토지를 분급하였다. 심지어 그 양이 일반 농민의 그것보다 월등이 많아 군자-야인이라는 신분질서에 매우 충실하게 토지에 분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다산은 신분을 막론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자만 토지 분급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에 대해서 강만길은 정약용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극복하고 직업전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양반과 농민 계급이 그 자체 분화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 바가 있다. 즉 士가 국가의 기틀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군으로써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토지를 분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1)

 그러나 이러한 계급론적인 결론을 내리기에는 우리는 아직 검토해야 할 것들이 많다. 즉 『경세유표』의 다른 부분에서 정약용은 지배층을 어떻게 부양하고 있는가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녹봉과 채지 즉 수조지에 대한 정약용의 아이디어를 보았을 때 이것이 정말로 직업분화의식에 의한 士의식의 변화 때문인지, 혹은 입국안민을 위한 지배층 부양 방식의 변화인지를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ⅱ. 상공인에 대한 태도

 위의 내용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내용으로서 상공인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점도 주목된다. 즉 반계는 서울의 상공인은 괜찮을 수 있으나 지방의 상공인은 토지가 없으면 생계가 불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다산은 상공인에게는 하나의 토지도 분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농사에 메어두기 보다는 각자의 할 일을 잘 하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강만길은 상공업의 발전을 통해 상인들이 실제로 재부를 축적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상공업자에게도 전지를 지급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22) 이들이 과연 자본을 축적할 정도로 성장하였는가는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 이후 조선전기에 비하여 각종 상인들이 중앙관청은 물론이고 지방관청의 조달을 담당하며 훨씬 더 늘어난 것을 사실이다. 이들은 재정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관의 조달을 담당하며 국가의 재분배 과정 중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자본주의 맹아론에서와 같은 자본 축적의 대상인은 없었을 지라도 상업을 통해 유통되는 재화의 양과 질이 17세기와 19세기에 현격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지방의 장시 또한 지방 관청 및 鎭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하 창고와 함께 발달한 바 있다. 이들이 자기 경리를 안정되게 운영할만큼 성숙하였다고 다산의 지적이 일리가 있을 것이다.

 

  ⅲ. 지주-전호제에 대한 태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반계와 다산은 모두 토지의 사유화 특히 지주-전호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토지의 국유·공유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는 사실은 이미 주지되고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과연 지주-전호제를 완전히 부정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다산이 지주-전호제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을 분명하다. 그러나 박찬승과 강만길이 토지국유제 내지 공유제를 고수한 다산 토지개혁론의 뿌리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23) 신용하와 이정철은 정약용이 결국 지주-전호제를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신용하와 이정철은 모두 다산이 지주-전호제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고 파악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신용하가 여전론과 정전론을 대립시키며 정전론을 다산의 봉건적 한계로 보는 반면,24) 이정철은 19세기 지주-전후제가 압도적인 생산양식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가운데 이를 무작정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개혁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다산의 개혁론의 현실성을 평가하였다.25)

 필자는 지주-전호제를 부정하는 개혁안은 이미 개혁안으로 기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약용이 현실적으로 지주-전호제를 인정했다는 이정철의 평가가 현재로서는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는 개혁안은 분명 개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산이 현실에 마냥 적응하려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경세유표』의 내용은 그러한 현실과 이상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일견 모순적으로도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산의 현실관에 주목하는 만큼 그의 이상향과 그리고 ‘大亂’의 시대를 맞이 할 때에 다산이 준비해야 할 내용들을 밝히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맺음말

 

 

 지금까지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의 토지제도개혁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의 요약을 대신하여 정리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점 하나를 던지며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반계와 다산을 비롯하여 대부분 ‘실학자’의 토지개혁론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바로 이들이 안정된 小農의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반계와 다산이 토지의 균분보다 백성의 균세에 더 방점을 찍고 있지만, 어쨌든 균세의 방식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기 생활을 안정되기 할 수 있는 - 그렇다고 그것을 너무 초과하지도 않는 균질적인 소농들의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조선후기 농촌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중 경영형부농론을 대체하고 있는 소농사회론과의 모순이 발생한다. 적어도 18세기에 조선은 소농사회로 정착하였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조선은 꽤 성공적으로 안정된 사회구조를 완성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실학자들은 계속하여 소농의 탄생을 바라고 있었을까? 조선이 소농사회가 아니었던 것일까? 혹은 소농사회 자체가 불안정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내는 것이 조선후기 사회를 이해하는 큰 방향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맺는다.


1) 유형원의 토지개혁론에 대하여 천관우는 균전제, 제임스 팔레는 타협적 정전제, 최윤오와 송양섭은 공전제라고 표현하였다. 유형원은 실제로는 균전제를 비판하였고, 토지를 공전으로 만들어 농민과 직역담당자들에게 이를 지급하는 것을 토지개혁의 골자로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응 공전제라고 표현하도록 하겠다.

2) 송양섭, 2013a, 「반계 유형원의 ‘공’ 이념과 이상국가론」, 『조선시대사학보』64.

3) 천관우는 그의 논문(천관우, 1952·1953, 『반계 유형원 연구』(상)·(하), 『역사학보』2·3)에서 유형원의 토지제도 개혁론은 균전제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유형원은 균전제가 결국 토지의 사유를 허용하는 것이고 따라서 결국 토지의 겸병을 초래할 것이라 비판하였다. 유형원의 토지제도는 일견 균전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처럼 토지의 공유와 사유라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의 토지개혁론을 균전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반계의 본 뜻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4) 송양섭, 2013b, 「반계 유형원의 공전제론과 그 이념적 지향」, 『민족문화연구』58, 473~474쪽.

5) 제임스 B. 팔레, 2007, 「제3부 전제개혁」,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후기』, 산처럼, 483~493쪽.

6) 송양섭, 2012, 「반계 유형원의 왕실재정 개혁구상」, 『역사와 담론』65.

7) 제임스 B. 팔레, 2007, 앞의 논문.

8) 송양섭, 2013b, 앞의 논문, 455~456쪽.

9) 최윤오, 2001, 「반계 유형원의 정전법과 공전제」, 『역사와 현실』42.

10) 『與猶堂全書』, 「文集」 권11 田論 三

11) 신용하, 1983, 「다산 정양용의 여전제 토지개혁사상」, 『규장각』7.

12) 김용섭, 2004, 「18, 19세기의 농업실정과 새로운 농업경영론」,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신정증보판)』1, 지식산업사.

13) 정성철, 1989,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한마당.

14) 박찬승, 1986, 「정약용의 정전제론 고찰」, 『역사학보』10, 103쪽.

15) 이영훈, 1996, 「다산의 정전제 개혁론과 왕토주의」, 『민족문화』19.

16) 정태섭, 2004, 「다산 정전제론의 동아시아적 관점」, 『동국사학』40.

17) 강만길, 1990, 「다산의 토지소유관」, 『다산의 정치경제사상』, 창작과 비평사.

18) 『經世遺表』 권5, 地官修制 전제1 전론3

19) 『經世遺表』 권7, 地官修制 전제9 전정의1

20) 최윤오는 유형원의 ‘공전적 소유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최윤오, 2013, 「반계 유형원의 공전·사전론과 공전제 계보」, 『이화사학연구』46) 필자가 주장하는데로 유형원의 개혁안에서 근대적 소유권을 대신할 대안으로까지 보기에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으나 토지 국유·공유의 계보와 세세한 내용들을 분류할 필요성은 경청할만 하다.

21) 강만길, 1990, 앞의 논문, 164~172쪽.

22) 강만길, 1990, 앞의 논문, 167~169쪽.

23) 박찬승, 앞의 논문; 강만길, 1990, 앞의 논문.

24) 신용하, 1983, 앞의 논문.

25) 이정철, 2012, 「정약용의 전제개혁론의 역사적 맥락」, 『한국사학보』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