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전근대 친족 집단의 경제적 부조

同黎 2015. 1. 20. 04:17

전근대 친족 집단의 경제적 부조

- 조선의 族契와 스페인의 마요라즈고(Mayorazgo) 비교를 중심으로 -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사전공

박사2 박세연

 

머리말

1. 조선 족계의 성격

2. 카르티야 마요르고(Mayorgo)의 성격

3. 족계와 마요르고의 공통점과 차이점

맺음말

 

머리말

 

 어느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한 개인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또 밀접하게 기댈 수 있는 집단은 혈연을 공유하는 친족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그 중요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집단은 역시 자신과 혈연을 공유하며 또 비슷한 시간적 공간적 환경에서 살았던 친족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친족집단이 중요한 이유는 감정적 유대감이나 서로에 대한 의지의 측면도 있을 테지만, 경제적 이유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사망하면 그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는 일차적으로 친족집단에게 있었고, 또한 누군가가 경제적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기댈 수 있는 집단 역시 친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친족집단 안에서의 경제적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기울어져왔다.

 그런데 전근대사회에서는 경제적 위기가 비교적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주로 농업이 산업 기반인 사회에서 예상치 못한 그리고 잦은 자연재해는 농민과 지주 모두에게 경제적 위기를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재산의 증식 가능성이 비교적 제한된 상태에서 친족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상속의 몫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때문에 장자 등 특정 자녀에게 상속 상의 특혜를 주거나, 혹은 서자녀를 차별하거나, 아들과 딸 사이에 상속률의 차이를 두는 등 가능한 재산의 분산을 막기 위한 방식이 고안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친족 집단 자체를 보존하는 것 또한 중요했기 때문에 상속에서 불이익을 받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되어야만 했다.

 조선의 족계와 스페인 카르티야 지방의 마요라즈고(Mayorazgo)는 모두 이를 위한 장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은 모두 친족집단을 부양하기 위한 공통의 (주로 토지로 이루어진) 재산을 마련했고, 그 지대 수익을 기본으로 운영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대부분 성립되고 운영되었다는 시기적 공통점 역시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의 운영을 위해서 각 친족집단에서 가장 높은 위계의 인물들에게 어느 정도의 양보가 요구되었다는 점에서 부조의 성격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성립되었던 조선의 족계와 스페인의 마요라즈고를 비교해 봄으로써 그 공통점을 살펴보고, 더불어 그 운영상의 차이점을 통해 동아시아와 서유럽 사회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조선 족계의 성격

 

 족계는 종계, 문중계, 문계, 성계 등으로도 불리는데 현재 가장 오래된 족계는 14세기 전반 우봉 이씨 집안에서 시작되었다.1) 이곡과 이양보가 주도가 되어 같은 항렬의 親·遠兄弟 20여명이 돈을 보아 義財라고 하여 매월 그 이식을 취하여 구휼의 밑천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이는 범중엄의 義田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2) 다만 이때는 형제는 동성뿐만 아니라 이성의 친족 형제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족계는 아직 고려 친목계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으로 보이며 아직 ‘契’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구체적으로 契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기록이 운영기록이 내려오는 사례는 1583년에 작성된 안동 주촌의 진성 이씨의 족계기록이다.3) 진성 이씨의 족계는 이미 그 이전인 16세기 중반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족계는 혈연적 의미뿐만 아니라 공간적 의미도 강하게 지니고 있었는데, 진성 이씨가 주촌에 정착한지 5~6대가 지나서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족당끼리 길흉화복을 함께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족계는 진성 이씨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같은 마을에 살고 있으면서 외가 봉사를 하던 사위나 외손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적으로 부계 직계 자손들보다는 계 안에서의 역할이 부차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져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족계로는 영암 남평 문씨의 족계가 있다. 남평 문씨의 족계는 1667년에 만들어졌으며 1741년부터 1928년까지 작성된 族契用下記가 남아있다. 남평 문씨의 족계가 처음 생기기 된 이유는 입향한지 6대가 지난 후 4조 제사를 공동으로 지내기 위해서였다.5) 이상에서 살펴본 우봉 이씨나 진성 이씨의 사례와는 달리 남평 문씨의 족계에는 영암지방에 사는 남평 문씨만이 참여했다.6)

 족계의 운영은 掌議와 門長, 有司가 있었다. 그 외에 재산이 많아 별도 투자가 필요할 경우 別有司를 두었다. 장의는 계원 중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들을 계원들의 추천을 통해 회의에서 결정하였다. 문장은 문장의 장손으로 생각된다. 문장과 장의가 지출과 회계에서 최종적인 결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즉 가문의 장손인 문장에게 많은 권위를 주면서도 동시에 계원들간의 합의를 중시여겼던 것이다.

 남평 문씨 족계의 재정적 기반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논 155.2두락과 대지였다. 여기서 얻은 소작료를 기반으로 하여 계를 운영하였는데 주요한 지출 내역은 제사와 각종 경조사였다. 그 내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손닙 접대, 길흉사의 부조, 건물의 보수, 세금, 족계 회의비용 및 족계의 재원을 마련하거나 확대하기 위한 투자비용 및 족계원 내외부 인원에 대한 대부 비용이 그것이다. 즉 친족 집단 내부의 의례와 상호부조를 위한 비용이 족계의 주요 지출 내역이었던 것이다.7)

 남평 문씨 족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특히 재정 수입의 부분이다. 족계를 운영을 위한 수읍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초기에는 계원들의 정규적인 회비가 있었고, 또한 앞서 언급하였던 조상이 남긴 토지가 있었다. 족계에서는 계속하여 투자를 통해 족계 소유의 토지를 늘려서 토지에서 얻는 소작료를 늘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는 米·租보다 錢의 필요성이 급증하게 되는데 錢의 확보를 위해 토지를 대규모 방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방매한 토지의 값으로 받은 錢이나 가지고 있었던 米·租·錢을 대부하였는데, 이를 통한 이자 수익을 통한 수입 역시 족계의 중요한 수입 중의 하나였다.

 대부와 소작의 경우 주목되는 것은 대상자의 상당수가 바로 족계원이었다는 점이다. 대부의 경우 대부분의 채무자는 족계원이었다. 이들은 당시 일반적인 이자율보다 훨씬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렸다. 즉 대부는 족계원 재원을 확보하고 증식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친족집단의 경제적 곤궁함을 구해주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8)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소작인에 관한 내용이다. 남평 문씨 족계의 소작인은 19세기로 갈 수록 대부분 남평 문씨로 바뀌어가고 있어. 즉 소작을 남평 문씨 족계 (소종계를 포함한) 내부 인원들에게 주고 있었던 것이다.9)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주로 경제적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즉 양반층이 증가하면서 그 재산 또한 분할되고 그에 따라 양반층이라도 일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를 족계라는 조직을 통해 이를 보존해 주었던 것이다. 19세기 이래 족계의 경제적 상황도 나빠졌는데,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그 수혜를 최대한 친족 집단 내부에 주려는 의도도 반영되어 있다고 보인다.

 요컨대 족계는 주로 16세기 이래로 친족 집단의 우호를 공고히 하고 또 제사 등 친족 의례를 책임질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또한 족계는 경조사 등 개인에게 갑자기 닥칠 수 있는 경제적 부담을 친족 집단이 공동으로 책임지기 위한 상호부조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족계는 시대가 갈수록 부계 친족 집단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계원들의 합의를 통해 운영되었다. 또한 양반층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계 내부 인원들에게 수혜를 주는 것에 더 집중하였다.

 

2. 카르티야 마요라즈고(Mayorazgo)의 성격

 

 카스티야의 상속제도인 마요라즈고(mayorazgo)은 14세기와 15세기의 카스티야 왕정의 약화를 통해 발달하였다. 마요라즈고는 일반적으로 장자 상속권 혹은 장자가 상속하는 재산의 집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오히려 장자 아닌 자녀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마요라즈고는 봉토에 관한 것이었으며 14세기 후반 귀족들에 의해 만들어진 추가적인 자산들을 다시 한 데 뭉치는 방편이었다. 이것들은 옛 귀족들의 방계 혈통과 서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귀족들에게 주어졌고, 약소한 귀족 가문으로부터 부흥한 이들에게 주어졌다.

 마요라즈고에는 개인이 새로 형성했거나 이미 가지고 있던 재산들을 다시 결속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새로 형성한 재산을 장자 이외 아들들에 대한 상속권으로써 마요라즈고를 주었으며, 대가 끊기면 딸들에게 이어지고, 그마저 없으면 왕정에 반환되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관습이나 법적 권한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설립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었다. 카스티야인들은 유언과 상속의 자유를 왕정의 직접적 양보로부터 얻어냈던 것이다. 심지어 서자에 대한 상속마저도 공식적인 법률로는 금지되었지만, 왕정의 약화를 통해 개개인이 이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이러한 자유로운 마요라즈고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마요라즈고는 그것이 생겼을 때 합의된 본질상 영속적이고 처분 불가분하며, 양도되거나 저당 잡힐 수 없다. 그것은 친족집단의 유지와 부조라는 공적 선을 위하여 존재하고, 개인적인 경제적 필요보다 더 중요했다. 절대왕정의 영향으로 왕실의 권위는  마요라즈고의 상속 문제를 판단하는 데에는 필수적이었다.

 16세기 마요라즈고의 설립문를 살펴보면 설립 목적은 친족과 미망인을 부양할 법적 책임을 지기 위함임을 강조하였다. 15세기 귀족의 수가 늘어났고 이것이 16세기 일부 귀족이 가난해 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 가정이나 형제들 간의 공동 소유와 파트너십이 발달하였고, 혈통의 결속을 강조하면서 가난한 가문들은 대가문의 힘과 특권에 기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킬 수 있었다. 마요라즈고는 가족의 자산과 특권을 지키는 것으로 천명되었고, 마요라즈고의 소유자로 하여금 가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직접적인 법적 권리를 희생한, 장자가 아닌 자녀들을 부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마요라즈고의 설립이 반드시 장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마요라즈고는 장자 아닌 아들들을 위해 기독교적 후원으로 설립되었으며 만약 방계 혈통이 끊겨 직계 혈통으로 반환되면 다시 다른 방계 혈통으로 넘어가야 했다. 장자를 위한 마요라즈고도 많았는데 이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장자 아닌 자녀들은 어머니나 조부모, 또는 영속되지 않는 재산에 의해 부양되는 상태여야만 했다.

 마요라즈고의 설립자는 계승의 형식을 선택할 수 있었으며, 17세기에는 상속을 위한 정교한 분류체계가 발달되었다. 하지만 계승의 일반적인 체계는 대표성을 가진 직계 장자에 의한 상속이었다. 설립자들은 조건들을 바꿀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먼 방계 친족 남성들보다 직계의 여성들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립자가 여성의 배제를 특정하지 않는 한 여성 상속의 가능성은 영국보다 카스티야에서 더 컸다. 이는 방계 친족 남성들에 의해서 마요라즈고가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기 위해서였다. 마요라즈고의 소유자가 범죄나 반역으로 재산을 압류당할 때도 이는 다음 계승 순위자에게 넘어갔다.

 장자가 그의 여자 형제들을 돕는 방법 중 하나는 그의 아내의 지참금을 그녀들의 지참금으로 전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한 위험요소를 떠안은 절차였다. 만약 아내가 아이 없이 죽었을 경우,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지참금을 증가분과 함께 그녀의 가족에게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내가 아이를 가지면 보통 지참금을 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유언자들이 장자에게 장자가 아닌 아들에게도 관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영구 상속되는 토지와 동산이 더욱 늘어났고 상속자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적어졌기 때문에 차자 이하의 아들들에 대한 상속분은 계속 줄어들었다.

 귀족들은 마요라즈고를 통해 일종의 농지임대업인 센소스(censos)을 운영해서 그 지대 수익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를 지탱했다. 임대의 특권은 왕정에 의해서만 허가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증가하는 이자는 농업임대인들의 부담을 증가시켰다. 왕정은 부채와 임대료를 중간 중간 감면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귀족들 간의 마요라즈고를 두고 일어난 분쟁도 늘어났다. 지참금을 마요라즈고의 불안정한 지대로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17세기에는 마요라즈고에 대한 분쟁 처리 절차를 분명히 할 것과 난립을 막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요라즈고가 귀족제를 지탱하는 축이었기 때문에 옹호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귀족들과 전제군주 사이의 의존 관계는 15세기로부터 역전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호의존관계는 어느 때보다 강했으며 이는 여전히 확고한 소유권을 무시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의 발동으로 상징되었다. 15세기에 이것은 마요라즈고를 도입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17세기에는 마요라즈고의 소유자들에 대한 채권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데 사용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거대 가문들을 지키려는 왕정의 결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민간의 부채에 대해 귀족들이 오래도록 향유하였던 전통적인 권리의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

 카스티야 귀족들의 행동은 가부장 권력 증대에 대한 일반적 강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상속분이 어린 자녀, 특히 딸들에게 충분히 주어질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가장의 권위를 높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때 상속권이 박탈될 수 있었다. 아버지들은 먼 친척 남성보다 직계 후손을 더욱 강조하였고, 그랬을 때 발생할 소송을 피하기 위해 딸과 먼 친척 남성을 결혼시켰다.  

 

3. 족계와 마요라즈고의 공통점과 차이점

 

 족계와 마요라즈고는 모두 친족집단의 유지를 위해 운영하는 토지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족계는 집단으로 모여 사는 친족 집단이 공동의 지출 자금을 마련하고 또 친족 간의 상호부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친족이 확대되는 가운데 외부 인사의 참여와 수혜를 줄이고 친족 내부의 역할을 강화한다. 마요라즈고는 족계와 같이 공간적 배경을 공유하는 친족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확대되는 친족 집단을 부양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역시 부조적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친족 집단의 유지와 탈락 방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족계와 마요라즈고 모두 장자의 권한이 일부 제한되고 있었다. 족계의 경우 그것은 계의 규정을 통해 체계화된 합의와 역할분담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중의 종손에게 문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우위를 인정하되(그겻은 장손이 가장 중요한 지출항목인 제사의 주제자 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장의와 유사를 회의에서 추천과 합의를 통해 정함으로써 장손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족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종법 질서 전체에 적용되는 원칙으로도 확장되리라고 보인다.

 마요라즈고의 경우에도 설립자에 의해 주로 그 관리가 장자에게 맡겨지거나, 장자가 설립자가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을 주로 장자로써 권리를 상속받지 못한 자녀들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마요라즈고의 성격은 분명한 것이어서 방계 혈통이 종가가 될 경우 그 마요라즈고는 즉각 다른 방계 혈통으로 넘어갔으며, 설령 마요라즈고의 소유주가 반역죄로 처발받게 되어도 마요라즈고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는 왕권으로도 인정된 귀족들의 세습을 위한 특권이었다. 그것은 가부장에 의한 방계에 대한 일방적인 자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족계와 마요라즈고 사이에는 차이점도 적지 않게 눈에 띤다. 첫째, 마요라즈고의 경우 가부장권이 더 강하게 적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요라즈고가 장자 상속제라고 번역되어 왔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정적으로 마요라즈고를 누가에게 줄 것인가의 처분은 아버지와 장자에게 달려있었다. 마요라즈고가 결과적으로는 딸과 차자 이하의 아들들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장자에 의해서 차자에게의 상속이 제한되는 경우도 많았다. 합의에 의해서 정해진 곳에만 쓸 수 있었고, 운영의 과정에서 대부나 소작의 방식으로 부조를 하는 족계보다는 권력이 지주귀족 개인에게 집중되는 서유럽 봉건제의 특징이 더 많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족계의 경우 중앙정치권력과 별다른 연관이 없었던 반면, 마요라즈고는 왕정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마요라즈고의 설립 및 분쟁에 관해서는 왕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16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의 절대왕정이 시작되면서 귀족들은 마요라즈고의 설립과 유지에 왕의 권위를 더욱 더 빌어야했다. 반면 족계는 설립에 국가의 개입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각 지방의 족계는 동계와 마찬가지로 관의 협조와 이해를 받는 것이었다. 남평 문씨 집안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족계는 정치적 권력 변동과 비교적 관계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는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지만 일반적인 전제정치의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조선이 사유재산에 대하여 더 관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족계의 경우 부계 혈통에 대한 강조가 더 강하다. 마요라즈고를 포함한 서유럽의 상속제도는 대부분 장자-직계의 딸-방계의 남성 친족의 순으로 중요도를 설정하고 있었다. 부계 혈통의 방계 남성 친족보다는 직계의 여성이 더 중요했다. 반면 족계의 경우 처음에는 사위나 외손의 참여를 허락했지만 점차 소작인조차 부계친족으로 제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부계혈통에 대한 강조는 조선사회에서 훨씬 더 심했음을 알 수 있다.

 

맺음말

 

이상의 내용을 통해 동아시아와 서유럽에서 각자 친족집단의 유지를 위해 상호부조적인 장치들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회 모두 이를 위해 부계 중심의 상속을 인정하였고, 가부장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이는 두 사회 모두 친족 집단의 유지를 위해서는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것이 유리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의 경우 부계친에 대한 강조가 더욱 심했는데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조선사회에 대한 고정관념들 일부가 서유럽 사회에서 역시 존재하고 어떠한 부분은 오히려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사유재산에 대한 국왕의 전제적 권력이라는 부분이나, 가부장성에 대해서는 서유럽 사회가 조선사회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좀 더 많은 비교를 통해 동·서양의 사회 성격이 명확해지리라고 생각된다.

 

 


1) 정구복, 1999, 「한국 족계의 연원과 성격」, 『고문서연구』16.

2) 『稼亭集』 권2, 義財記

3) 김현영, 1999, 「해제」, 『고문서집성 41 - 안동주촌진성이씨편(1)』, 한국학중앙연구원.

4) 신경희, 「조선시대 계의 조직과 그 성격변화에 대한 소고」, 『역사교육』13·14, 695쪽.

5) 이해준, 1988, 「조선후기 영암지방 동계의 성립배경과 성격」, 『전남사학』2.

6) 김현영, 1999, 「호남지방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가족과 친족」, 『호남지방 고문서기초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 남평 문씨 족계같은 장기간에 걸친 족계의 성격을 평면적으로 규정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실제 김하임은 족계의 운영을 성격별로 4시기로 나누어 각각 재원의 확보-수입·지출의 동반 증가-대규모 방매-규모의 축소라는 특징들을 발견한 바 있다. (김하임, 2014, 「조선후기 족계의 재정운영 -남평문씨 『족계용하기(족계용하기)』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91.

8) 김하임, 2014, 앞의 논문.

9) 김하임, 2009, 「朝鮮後期 族契의 財政運營 : 남평문씨 -族契用下記-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