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한국학협회 지원 발표문 초록
또 하나의 작은 정부, 18세기 왕실재정기구 내수사의 구조와 운영
내수사(內需司)는 국왕과 국왕의 혈연들을 위한 특별한 재정운영기구였다. 조선은 고려를 극복하며 건국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전까지 공적 재정운영에 포함되지 않았던 왕실재정기구를 유교적 관료조직에 포함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재정운영기구가 바로 내수사였다. 조선은 왕과 그 가족의 재산 운영을 관료조직에 공개함으로써 재정운영에서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내수사는 각각의 독립된 4개의 기구, 즉 ‘戶房’·‘禮房’·‘刑房’·‘工房’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정부의 6개의 공식 조직, 즉 ‘六曹’에서 인사와 군사를 담당하는 2개 조직을 제외한 것으로, 마치 작은 정부와 같이 각각의 역할분담이 되어 있었다. 이들 기구는 면세 토지와 국가 기구로부터 재화를 조달받아 왕과 그 가족에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제사와 혼례 등 중요한 왕실 의례를 주관하였다. 내수사 내부가 마치 작은 정부와 같이 독립된 기구들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은 조선이 왕실재정의 운영에 부여하려고 했던 공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왕조국가는 지배구조의 핵심에 위치하는 왕실과 지배엘리트에게 경제적 특권을 일정정도 보장해주지 않으면 안정적인 통치를 담보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이상이었던 유교적 민본주의는 모든 재화의 공적 운영을 지향하였고, 그것이 바로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을 관료조직 아래에 통일시키자는 “宮府一體論”으로 집약되었다. 이들은 하늘 아래 왕의 재산이 아닌 것이 없다는 논리로 내수사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였으며, 내수사가 왕의 측근인 내시들에 의해 운영되고, 문서행정의 과정에서 관료조직을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전달되도록 한 규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반면 국왕은 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재화를 확보하는 한편, 제사와 같은 전통적 유교의례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발현해야했기 때문에 왕실재정을 독자적인 영역으로 지켜내려 하였다. 왕조국가에서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여러 제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그에 소용되는 비용을 정규적인 재정으로 확보하긴 매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내수사에 조세의 원천인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여 독자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길 희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내수사는 조선시대 내내 공공성과 특권을 둘러싼 대표적인 딜레마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조절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왕은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왕실재정기구를 정비하였다. 그는 분산되어있던 여러 왕실재정기구를 내수사에서 관할하도록 하였으며, 문서행정체계를 정비해 내수사를 유교적 관료조직 안으로 들여놓으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정조는 왕실재정기구의 공공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왕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정조 또한 왕조국가의 일원이며 그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임을 명심해야한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여러 의례를 정비하고 시행하는데 집중하였다. 게다가 그는 수원에 화성이라는 대규모 성을 쌓는데 많은 재화를 소비하여야했다. 과연 정조의 왕실재정 개혁은 고유의 특권을 포기하고 공공성을 지키려고 했던 정책으로만 평가받을 수 있을까?
다행히도 정조는 내수사 운영에 관한 회계자료를 남겼다. 내수사의 재화 수입을 기록한 『內需司各房上下冊』과 지출을 기록한 『內需司各房捧上冊』, 그리고 왕실재정의 내역을 집대성한 『內需司及各宮房田畓摠結與奴婢摠口都案』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조선의 공식적인 역사서에 기록된 정조의 개혁 정책과, 회계장부에 기록된 실제 왕실재정의 구조 및 운영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정조대 왕실재정의 성격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성과 특권 사이에 존재하는 정조의 선택을 통해 우리는 조선후기 왕조국가의 공공성에 대하여 재평가를 진행하고자 한다.
Another Small Government : Structures and Operations of Naesusa,
18th Century Royal Treasury
Naesusa(內需司) was special financial organization for the king and his kin. Chosŏnwas builtup through overcoming Goryeo. In that process, royal treasury, which had not been counted in public financial management was included in Confucian bureaucratic organization. Naesusa was built up as a result. The Chosŏndynasty tried to retain transparency and publicness in financial management by opening royal property management to bureaucratic organization.
Naesusawas composed of 4 independent departments, ‘Hobang’(戶房) ‘Yebang’(禮房) ‘Hyeongbang’(刑房) and ‘Gongbang’(工房). This composition was made up by excluding 2 departments that were in charge of personnel managements and military affairs from 6 official organizations of government, ‘Yukjo’(六曹), and each department took charge its own role like a small government. These departments supplied commodities to the king and his family and supervised important royal ceremonies such as ancestral rites and weddings by goods and money taken from tax-free lands and government organizations. The fact that Naesusa was composed of independent departments like a small government shows public character which Chosŏn tried to assign operation of royal finance.
But dynastic country could not guarantee stable ruling without grantingeconomicprivileges tothe royal family and the elite ruling class, who were the core of ruling structure. Confucian democracy, an ideal principle of Chosŏn was aimed at public operations of every goods, and that purpose was integrated into ‘Gungbuilcheron’(宮府一體論), a theory which insisted on unification of national finance and royal finance under bureaucratic organization. Those who in favor of Gungbulicheron insisted an abolition of Naesusa on the grounds that everything in the nation is belonged to the king, and criticized Naesusa because it was operated by eunuchs who were close to the king and had a rule that makes documents directly deliveredto the king without examining by bureaucratic organization.
On the other hand, the king wanted to keep royal finance as an independent field in order to retain goods that the royal family needed and reveal royal authority through traditional Confucian ceremonies likeancestral rites. In dynastic country,several ceremonies that show royal authority had important position. But it was very hard to secure the cost of them in formal finance, so the king hoped to get independent finance by giving lands and servants, which are sources of taxation, to Naesusa. Because of these conflicts, Naesusa was prominent dilemma about publicness and privileges during the whole Chosŏn Dynasty.
A representative king who tried to adjust such dilemma was King Chŏngjo. He modified royal financial organizations right after accession to the throne, making Naesusa control several royal financial organizations that had been distributed and included into Confucian bureaucratic organization by aligning document administration system. Because of this, King Chŏngjo has been evaluated as a king who tried to secure publicness of royal financial organization.
But King Chŏngjo was also a member of dynastic country and one who was at the top of it. Carrying on his grandfather King Yŏngjo’s will, he concentrated on organizing and holding several ceremonies in order to enhance royal authority. Moreover, he spenta great deal of goods on building ‘Hwasŏng’, the huge castle in Suwon.The question iswhether it is proper indeed to evaluate King Chŏngjo’s royal finance reformation as giving up privileges and securing publicness in this situation.
Fortunately, KingChŏngjo left accounting documents about managing Naesusa. The character of royal finance in King Chŏngjo’s reign can be inferred by comparing his reformation policy written in official history with actual structures and operations of royal finance written in account book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evaluate publicness of late Chosŏn through focusing King Chŏngjo’s choice between publicness and privileges.
'史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근대 친족 집단의 경제적 부조 (0) | 2015.01.20 |
---|---|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의 토지제도개혁론 (0) | 2014.10.24 |
궁방의 역할과 종류 (0) | 2014.08.29 |
내수사의 역할과 조직 (0) | 2014.08.22 |
왜 조선시대 왕실재정인가? (0) | 2014.08.21 |
각궁가 각아문 절수지 혁파에 관한 비변사의 계 (0) | 2014.07.30 |
을해정식자료 3 (0) | 2014.07.30 |
을해정식자료 2 (0) | 2014.07.30 |
을해정식자료 1 (0) | 2014.07.30 |
내수사추쇄관혁파절목 (0) | 2014.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