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궁방의 역할과 종류

同黎 2014. 8. 29. 03:04

궁방(宮房)이란 궁과 방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궁(宮)이 방(房)보다 격이 높지만, 하는 역할은 비슷합니다. 예컨대 왕이나 대비·중궁·세자·세자빈을 위한 것 혹은 왕의 생모에 해당하는 후궁의 것은 대부분 궁(宮)이라고 합니다. 명례궁·선희궁·저경궁·육상궁 등등이 그 예입니다. 반면 일반적인 후궁이나 대군·왕자군·공주·옹주·군주·대원군·부원군 등을 위한 것은 방(房)이라고 합니다. 양녕대군방·덕흥대원군방·온빈방·화평옹주방 등등이 그 예가 됩니다. 궁방은 모두 왕실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왕실재정의 역할과 왕실각족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였습니다. 조선후기 왕실재정의 중심이자 숱한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궁방입니다.

궁방은 대략 16세기 말에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방이라는 단어 자체는 15세기 말에도 있었지만 조선후기의 것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고 추정됩니다. 조선은 개국하면서 관료들에게 토지의 수세권(수조권)을 부여하는 과전법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조 때 세습을 엄격히 금지시키는 직전법으로 바뀝니다. 왕자와 공주·옹주 역시 직전을 지급받아서 생활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명조 때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되면서 이 직전법이 사실상 폐지되면서 왕자·공주의 직전 역시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자 왕실 가족들은 궁방이라는 것을 만들어 토지와 어장·선박·갈대밭·미역밭·염분(소금 생산지)·산림 등을 점유하고 또 많은 노비를 거느리며 자체적으로 재산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죠.


궁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궁방을 나누는 기준은 연구자에 따라 다릅니다. 내수사를 궁방에 넣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궁방은 먼저 역할에 따라 공상(供上)궁방과 제사궁방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공상(供上)이라 함은 왕실 구성원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말합니다. 궁방의 주인공이 살아 있을 때에는 궁방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공상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죽으면 그 궁방은 후손에게 남겨져 해당 인물의 제사를 책임지도록 합니다. 특이한 점은 흔히 남존여비의 사회라고 여겨지는 조선에서도 공주방·옹주방을 두어 끝까지 공주·옹주의 제사를 국가에서 책임져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의 역할을 하는 궁방도 계속해서 존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교식 예법에서는 조상을 4대까지 제사지냅니다. 즉 부·조·증조·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내고 그 이상의 조상을 사당에서 위패를 치우고 1년에 한번 다른 조상과 한꺼번에 기제사만 올리는 것이죠. 궁방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왕실인물들이 늘어나고 따라서 궁방도 늘어나자 국왕은 4대가 지난 후궁·왕자·공주의 궁방을 없애고 내수사로 재산을 환원시키도록 합니다. 대신 위패는 묻지 않고 수진궁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내줍니다.


한편 이러한 규정과 관계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궁방이 있습니다. 유교식 예법에서도 특별히 불천위(不遷位)라고 해서 중요한 조상의 위패는 4대가 지나도 그대로 사당에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요, 그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구히 존속시키는 궁방을 영속궁방이라고 하고 그 나머지는 비영속궁방이라고 합니다. 영속궁방에 속하는 곳은 왕의 생모에 해당하는 후궁들의 궁방인 숙빈 최씨(영조 생모)의 육상궁, 희빈 장씨(경종 생모)의 대빈궁 같은 곳이 있고, 선조 이후 모든 왕의 조상이 되면 덕흥대원군방(후일 도정궁으로 승격), 폐위된 왕인 연산군방·광해군방, 중요한 종친인 양녕대군방·효령대군방 등등이 역시 영속할 수 있는 자격을 받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내수사와 명례궁·수진궁·용동궁·어의궁·육상궁·선희궁·경우궁은 규모 면에서 다른 궁방을 압도하여 1사7궁이라고 특별히 부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는 역할에 따라 공상궁방과 제사궁방, 유지 기간에 따라 영속궁방과 비영속궁방으로 궁방의 종류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1사7궁중에서도 성격이 다른 궁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상궁·선희궁·경우궁은 모두 후궁을 모시는 제사궁입니다. 그러나 명례궁·수진궁·용동궁·어의궁은 제사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 4개의 궁은 유래가 모두 다르면서도 하는 일은 비슷합니다. 바로 왕실구성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들, 바로 왕·대비·중궁·세자·세자빈의 공상(供上), 즉 내탕(內帑)을 담당하는 궁이었던 것입니다. 각각의 궁은 시대에 따라 번갈아가며 왕이나 중궁, 대비 등에게 귀속되어 공물과 진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들의 공상과 재산관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사7궁의 7궁 중에서도 이 4궁을 내탕궁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궁방의 개념을 명확히 합시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궁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별궁과는 다릅니다. 안국동별궁·남별궁 등의 별궁은 왕실 혼례시 왕실 여성의 친정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등 각종 의례의 역할을 하거나 왕실구성원이 잠깐 머무는 곳입니다. 본궁(本宮)은 세자가 아니었던 왕자가 왕이 되었을 시 본래 왕의 집, 즉 잠저(潛邸)를 의미합니다. 태조가 살던 함흥본궁이나 광해군이 살던 이현궁, 인조가 살던 어의궁, 영조가 살던 창의궁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궁들은 보통 해당 왕의 어진을 모시며 제사궁의 역할을 합니다. 행궁은 왕이 잠깐 머무는 도성 밖의 궁궐로 화성행궁·남한산성행궁·시흥행궁 등이 이에 속하며 지금까지 소개한 궁방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또한 이름은 비슷하지만 좀 특이한 곳도 존재하는데요. 예컨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제사궁인 경모궁은 일반적 상식으로라면 궁방의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특이하게 국가기관의 하나로 편입됩니다. 사도세자를 높이려는 정조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겠죠. 고종의 잠저이자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 역시 특별취급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조선전기에는 왕의 잠저에 제사를 지내던 곳을 대부분 ~~전(殿)이라고 합니다. 세조의 잠저였던 영희전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궁방과 별궁·본궁이 겹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의궁은 인조의 본궁으로 후에 내탕궁으로 발전합니다. 광해군의 잠저인 이현궁은 본궁으로 내탕의 역할을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단순한 별궁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숙빈 최씨에게 하사되었다가 결국 장용영(壯勇營) 건물로 쓰이게 됩니다. 명례궁은 세조의 잠저였다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게 내려졌고 임진왜란 후에는 선조가 머물면서 정릉동별궁이 됩니다. 인목대비가 유폐되는 서궁(西宮)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다가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에게 하사되면서 명례궁이라는 이름으로 대대로 대비 혹은 왕비의 내탕궁이 됩니다. 후에 경운궁(후의 덕수궁)이라는 정식 궁궐이 자리잡게 되자 아예 내탕궁인 명례궁은 아예 지금의 명동성당 뒤편으로 이전합니다. 공간으로서의 궁궐과 왕실재정기구로서의 궁방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