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내수사의 역할과 조직

同黎 2014. 8. 22. 16:29

내수사는 이조의 속아문으로 수장이 정5품에 불과한 정5품 아문이지만 전체 왕실재정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본래 고려는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고 왕실재정은 사장고(私藏庫)에서 관리했습니다. 국가의 공적 시스템이 완전히 미칠 수 없는 곳이었죠. 왕실 사장고는 다른 권문세족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농장을 경영했고, 국가재정의 수입을 저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조선은 건국하면서 바로 이 사장고를 혁파해버립니다. 재정의 완전한 공공화를 선언한 것이죠. 이는 유교의 이념상 국가의 재화 중 왕의 것 아닌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독자적인 기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명목상의 이유가 있으나, 사실은 왕실재정의 지나친 확대를 막고 이를 국가통치 시스템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견제를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도 개인인 만큼 다른 재산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 조선 개국 후 이성계가 살았던 함흥과 영흥의 본궁(本宮)에는 많은 토지와 노비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를 관리하기 위해 관직인 내수별좌(內需別坐)가 정확힌 시기는 모르지만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별좌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느는 법전에 실린 정규적 관직은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종은 이 내수별좌를 내수소(內需所)라는 이름의 정식 관청으로 만들었고, 세조는 이를 내수사(內需司)로 승격시켜 경국대전에 등록시킵니다.


내수사의 설치는 일종의 타협이었습니다. 본래 궁궐에 사는 임금님과 대비·왕비·세자·세자빈들 및 그들에게 소속된 내시·궁녀들이 쓸 물품은 공물 및 진상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런데 각 지역에 필요 물품을 하달하는 공물과 진상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쉽게 확대하기도 어려웠고, 갑자기 큰 비용이 드는 혼례와 상례 등의 행사에 유연하게 대처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또 왕실가족의 개인적인 취미(?) 예컨대 불교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생기는 것이 바로 왕실의 개인 재산인 내탕(內帑)입니다. 왕이 즉위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바탕으로 개인적 재산을 운용하였던 것입니다. 현재 경복궁 사정전 앞 사정문 회랑에 있는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등이 바로 내탕을 보관하던 창고입니다.


그러나 내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려의 왕실 사장고를 없애고 모든 재정 영역을 공적인 부분에 놓았던 조선의 건국이념과 배치됩니다. 때문에 세종은 왕의 사적 재산인 내탕을 인정받는 동시에 이를 관리하는 기관인 내수사를 이조의 속아문으로 만들고 법전에 등록시킴으로써 왕실재정을 완전한 사적 영역이 아닌 반공반사(半公半私)의 영역에 두었던 것입니다. 내수사를 이조의 속아문에 두었던 것은 천자(天子)의 생활과 관련된 것은 이조에서 관리한다는 『주례』의 내용을 충실히 따른 것입니다. 내수사는 법전에 의해 면세가 보장된 토지를 운영하고 노비들로부터 포(布)를 받았지만 모든 행정절차를 이조에 의해 관리·감시받았기 때문에 조선의 유교적 이념의 테두리 안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내수사의 역할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많은 궁방들을 관리하는 데에까지 확대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내수사의 조직에 대해 살펴봅시다. 내수사는 『경국대전』이래 계속해서 정5품 전수를 수장으로 하여, 부전수 1명, 전회 1명, 전곡 1명, 전화 1명으로 총 5명의 관직자로 구성되었고, 이 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법전만 봐서는 내수사는 이조에 속하고 수장이 정5품에 불과한 매우 작고 낮은 관청입니다. 게다가 다른 관청과는 달리 인사평가를 위해 보통 당상관들이 겸하던 제조도 없습니다. 보통 6조의 속아문 수장이 정3품 내외이고, 도제조나 제조가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과연 겨우 5명의 관리가 수천결에 이르는 토지를 관리하고, 수십개의 궁방을 관리할 수 있었을까요? 비밀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내수사에는 5명의 정규 관리 외에 수가 정해지지 않은 겸직인 별제와 별좌를 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조진신안』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들의 거의 다 내시였습니다. 즉 왕의 측근이자 왕실 살림을 도맡아 하던 내시들이 왕실재정의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내시들은 당상관 같은 높은 품계를 지닌 이들이 많았던 반면, 내수사 정규 관원들은 겨우 정5품 이하의 품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과 가깝고 품계가 높은 내시들이 실제로는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내수사의 회계장부들을 분석해본 결과 돈의 흐름에 내시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궁방까지 확대해서 본다면 상궁들 역시 왕실재정의 중요한 축으로 등장합니다.


두 번째는 내수사에서 왕으로의 직접 보고 라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수사의 이조의 속아문이었기 때문에 왕과 내수사 간의 정상적인 보고 라인은 ‘국왕-승정원-이조-내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실제 국왕이 승정원으로 문서를 내리거나 혹은 문서를 받을 때는 승지가 직접하기도 하지만 주로 승정색이라는 내시를 통합니다. 내수사도 내시들에 의해 관리되었고, 승정색도 내시였기 때문에 내수사에서 국왕으로 직접 보고하는 라인이 생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 내수사와 관련된 전교는 국왕이 갑자기 내리고 신하들이 이에 반대하면서 제발 이조와 승정원을 통하는 라인은 세워달라고 하소연하는 패턴이 계속됩니다.


마지막으로 내수사 내부에는 세분화된 조직이 있었습니다. 내수사에서 5명의 관리만큼 중요한 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별제·별좌를 맡은 내시와 실무를 맡은 서리들입니다. 내수사 내부에는 역할에 따라 4개의 부서가 있었습니다. 호방(戶房)·예방(禮房)·형방(刑房)·공방(工房)이 그것입니다. 호방은 토지의 수입을 관리하고, 예방은 제사를 관리합니다. 형방은 본래 노비들이 바치는 포를 관리했고, 공방은 궁궐의 수리를 담당했습니다. 서리들은 각방에 속해서 실무를 담당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6방 중 인사와 군사를 담당하는 이방(吏房)과 병방(兵房)만 빠져있습니다. 즉 이 기능을 제외한 나머지 세분화된 부서를 통해 내수사는 마치 하나의 작은 정부처럼 조직적으로 왕실재정을 관리했던 것입니다. 이것들이 내수사가 작은 관청이지만 왕실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