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출발을 한다.
이번 북경여행은 주로 택시를 사용한다.
가격이 비싸지도 않고, 생각보다 후려치는 경우도 적었다. 뭐 없는건 아니지만
박물관 입구. 대부분 후퉁에 있는데 후퉁 안까지는 택시가 안 들어가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걸어간다.
후퉁 입구
옆에 보이는 건 어마어마한 규모의 환풍구
이렇게 길을 걸어가다보면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북경루쉰박물관 입구
표는 5위안
루쉰의 구거 옆에 지은 것인데 규모가 거대하다.
미리 고백하지만 정보 부족으로 그가 살았던 구거는 가지 못했다.
다시 가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 생각하겠다.
북경 지역 가이드북은 의외로 매우 정보가 소략하다.
한쪽에 보이는 루쉰의 초상
표를 사서 들어가면 루쉰의 동상이 보인다.
중국 혁명정신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루쉰
앞에는 그의 친필 원고 중 광인일기의 원고가 재현되어 있고
어느 곳을 바라보는 흉상이 놓여져 있다.
아마 거대한 규모를 보아 과거 왕부(王府)나 관청, 사찰로 사용되던 건물을 재건축한 것 같다.
전시실 입구에 새겨진 그의 친필
전시실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쪽에는 중국 공산당의 창립멤버 중 하나이자
국가원수까지 지닌 둥비우(董必武)에 관한 전시가 있는데 우린 지나치고
이제 루쉰에 대한 전시실로 간다.
전시실은 모두 그가 생활했던 지역별로 시기를 나누고, 그가 사용한 책상을 앞에 두었다.
특이 이 책상은 빠를 조(早)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날 그가 지각해서 혼나자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 새겼다고 한다.
그는 강남 지방의 소흥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유학을 배웠다.
루쉰이 썼다는 가훈서
본래 그는 주(周)씨로 주수(樟壽)가 본명이다. 노신(魯迅)은 필명이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진사시에 통과했지만 현령으로 있을 때 죄를 지어 벼슬에 나갈 수는 없었고,
납속으로 내각중서를 지냈다고 한다. 전형적인 강남 신사층으로 비교적 부유했던 편이었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쓴 편지와 그가 어렸을 때 공부한 교재
소흥에 있는 그의 생가
루쉰의 원고
오창회라는 글로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여러 글 중 하나이다.
<무상>이라는 글의 원고
논어, 맹자, 의례
루쉰은 남경에 있는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에 들어간다.
이것은 그가 남경에서 공부했던 교재들
이 때 그는 서양학문을 처음 접했고 <신청년>이라는 잡지 참여를 통해 맑스주의를 접했다고 한다.
루쉰의 호가 쓰여진 인장
융마서생(戎馬書生)이라는 인장
그가 군사학교에 다녔기에 이런 자호를 사용했던 것 같다.
이제 일본 유학시절로 넘어간다.
1902년 그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넘어간다.
이것은 당시 유학한 인물들의 명단으로 주수인(周樹人)이라고 쓰여진 이름이 바로 루쉰이다.
일본에서 쓴 시
일본 유학시절 홍문학원에서 받은 상장
루쉰의 일본 유학은 청의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만들기 위한 메이지정부의 정책이었다.
그는 여기서 400엔의 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의학으로 눈을 돌린다.
그는 센다이로 넘어가서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이 문서는 그의 면비 유학을 통지하는 통지서이다.
정확한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이 당시 그는 러시아 스파이로 몰려 참수형을 당하는 중국인의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중국으로 돌아가 문학과 집필을 통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루쉰이 그의 센다이 시절을 회고한 글
센다이 시절의 성적표
1909년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다.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짧은 시기를 다루는 코너이다.
그가 한 식물채집 표본
일본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는 돌아와 고향인 소흥부 중학당에서 교사를 지낸다.
당시 신해년(1912) 춘계 수학여행 기념사진
1912년 신해혁명으로 건설된 신정부에 그는 가대를 가지고 참여하려 베이징으로 올라간다.
베이징 시절을 보여주는 전시장
북경대학교 교표
1917년 그는 북경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간간히 골동품 수집도 한 듯
그가 기증한 유물들
중국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사회진화론 등 서양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결코 중국적인 것을 버리지 않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정신은 중국공산당의 지표가 된다.
아마 한나라 화상석의 탁본 같다.
1921년 신문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그는 중국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회의주의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던 도중 글 기고를 부탁받았다.
그는 처음에 거절하지만 이런 대화를 통해 결국 설득을 당하고 첫 작품인 광인일기를 기고한다.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은가.”
그 후 신청년은 이른바 신문화운동의 전설이 된다.
<아Q정전> 역시 바로 이 신청년에 기고된 것이다.
광인일기가 기고된 <신청년>
광인일기는 봉건 유교사회를 비틀고 비웃는 작품으로 신중국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작품이었다.
당시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들
그리고 바로 전설의
<아Q정전> 수고가 나온다.
중국에서는 국보급인 이 원고는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정신승리만 계속하는 황제국 중국을 비웃는다.
그리고 진독수 등이 마침내 중국공산당을 건설하려고 한다.
중국에서 처음 번역 간행된 <공산당선언>과 루쉰이 참여한 <성외소설집>
루쉰이 쓴 제호
이 시기쯤에 상해를 중심으로 많은 소설이 쏟아지고 또한 많은 소설이 번역된다.
기존까지 잡문으로 취급되었던 소설이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되었다.
당시 루쉰의 초상
루쉰의 작품집
그가 북경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주고 받은 서류들
루쉰의 초상
그가 쓰던 문방구들
그의 옷
그가 만든 서안의 바탕과 등불
당시에 그의 글이 기고된 많은 신문들
그러던 중 1926년 그는 학생, 노동자들의 파업과 휴업을 계기로
교육부 검사가 되어 이들을 비호하다가 결국 8월 탄압을 피해 북경을 탈출한다.
베이징을 탈출한 그는 하문(샤먼)으로 간다.
이 당시 그가 있던 북경여자사범대학의 제자이자 평생의 연인인 쉬광핑(許廣平)과 함께 하게 된다.
그가 광주에 있을 때 쓴 편지
하문대학에서 보낸 엽서
그는 탈출 후 하문과 광주에서 교수를 지내지만 학내 분위기가 보수적이라 금새 그만 두었다고 한다.
<범애의>라는 글의 수고
<무월> 수고
당시 사용하던 인장
당시 그가 쓴 일기
그가 청년작가를 위해 쓴 희곡 원고로 홍루몽을 개편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문학사략 수고
그가 하문에 있을 때 중국문학사를 정리한 것으로 그의 대표적인 업적 중의 하나이다.
당시 원고들
광주 시절
당시 광저우의 학생 활동가들의 간행물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이 눈에 띈다.
<주검(鑄劍)>이라는 소설의 수고
1927년 그가 보낸 편지
이 당시에는 그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이 심해진 때였다.
결국 그는 국민당을 피해 상해로 떠나게 된다.
그가 쓴 원고와 출간문
<노주가기경창완> 교정본
여러 원고들
그의 일기 중 일부
이제 상해 시절이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그가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상해시절이다.
이 당시 상해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소련에서 특파된 인물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론의 수준이 높았다.
국민당을 피해 도피한 상해에서 그는 중국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였고
또 이로 인해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가 거래하던 내산서점에 보낸 편지
그가 상해에서 기고한 글
혁명이 장차 도래하기 위해 과학적 이해를 두텁게 하자는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 때 그에 의해 비판받는 인물들은 혁명 이후에도 비판받는다.
이에 따라 루쉰이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공산당 정부에 이용당해) 혁명 이후 모든 문화, 문학의 기준점이 되어버렸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로 그에 대한 존경도 상당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도 상당한 편이다.
당시 혁명문학 논쟁 중에 루쉰이 투고한 잡지들
당시 일기와 주고받은 편지
루쉰의 자서전 원고
많은 유고들
그가 마지막까지 사용했던 물건들
그의 서예작품
옆으로는 그의 연인인 쉬광핑과 유일한 혈육인 아들 저우하이잉의 모습도 보인다.
문화투쟁 등 그가 기고한 논쟁적 글들
북평잔보
그는 의외로 조각이나 전각에도 취미가 있어 직접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역시 그가 제작한 판화집
루쉰이 편집한 소련판화집
판화집의 모습
그가 제작한 판화
그는 서양의 문학이나 이야기를 만화의 형태로 옮기기도 했다.
그의 작품
학생들 앞에서 연설하는 루쉰
그의 만년 작품들
<고사신편> 수고
중화민국 상해시 사회국의 문서인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역시 그의 만년 수고들
루쉰의 초상화
1928년의 초상화
나름 멋쟁이 티를 내는 사진
그가 쓴 여러 잡지나 책의 제호
이런 거에 꽤나 제주가 많았다.
그의 마지막 글이자 유서인 <죽음>이라는 글의 원고
55세의 나이로 죽기 한 달 전에 발표된 글로 이후 그는 급속히 건강이 나빠져 사망한다.
<여조(女吊)>라는 글의 수고
그의 아이에게 보내는 에세이 형태의 글이다.
마지막까지 쓴 여러 원고들
그의 병원 기록들
그의 동지에게 보내는 글
루쉰은 동지의 유작집을 편집하던 중 천식이 발작한다.
그의 마지막 글
사망 하루 전인 1936년 10월 18일의 글이다.
그리고 19일 그는 한 많은 세상을 뜬다.
그의 관을 덮었던 민족혼이라는 글이 쓰여진 명정
기념사진을 아니 찍을 수 없다.
루쉰의 데스마스크
그가 마지막으로 글을 쓰던 삼미서실을 재현한 곳
<아Q정전>의 판화집을 끝으로 루쉰박물관 전시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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