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료

인평대군『연도기행』

同黎 2012. 8. 7. 01:54

인평대군『연도기행』

조선후기 석사 1

박세연

1. 해제

인평대군 李㴭가 지은 연도기행은 효종 7년(1656년) 인평대군이 謝恩使(혹은 陳奏使)로 다녀오면서 그 여정을 기록한 책으로 인평대군의 문집인 松溪集에 실려 있다. 글머리에는 인평대군의 연행내력 전체를 기록하여 후에 덧붙인 總叙가 있으며, 연행을 시작한 1656년(丙申年) 8월 3일부터 집으로 돌아온 12월 16일까지의 일록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 대군이자, 소현세자와 효종의 동생으로, 소현세자와 효종이 심양관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가 잠시 차례로 귀국할 때 대신 인질로 심양관에 머물었던 경험이 있다. 청에서 사신으로 왕족을 선호하였고, 또 연행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인평대군은 여러 번 사신으로 청을 드나들었다. 효종의 인평대군에 대한 신임과 우애가 깊었던 것도 그가 여러차례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총서에 따르면 인평대군은 효종 8년까지 총 12차례 사신으로 청에 다녀왔다. 이렇게 많은 연행을 통해 인평대군은 나름 청에 대한 식견이 생겼는데, 실록과 연도기행에는 그가 청의 군사 정황을 살핀 내용이나 청의 정치 동향에 대해 올린 보고가 여럿 보인다. 또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연도기행의 배경이 된 사행은 인평대군에게는 11번째 사행이었다. 효종실록에는 이 때의 사행이 사은사라고 기록되어 있고, 전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연도기행에는 北邊에 변에 생겨서 사대부들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진주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陳奏使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총서에는 영의정 이시백 등 16명의 신하들이 죄를 용서받은 일과 칙서를 가지고 가는 일을 정지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신 일행이 모두 恩典을 받았다고 추기하였으며, 이 조목은 家乘애 실려 있는 것을 후에 補錄한 것이라는 세주가 달려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모두 기록이 소략하여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는데, 본래 同年 4월에 이시백이 謝恩正使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는 보이지 않고, 다만 이시백과 함께 사은사행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權諿에 대한 탄핵 기사 만에 6월과 7월에 보이며, 결국 7월 3일 서장관 권집이 교체된다. 또한 이시백이 처음 사은정사로 차출된 4월 23일에서 인평대군이 사행을 떠난 8월 3일사이에 계속 국내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8월 3일에는 정사가 인평대군으로 교체된 체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적당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이 때 부사는 호조참판 金南重 이었고, 서장관은 사헌부 장령 鄭麟卿이었다. 16명의 신하의 이름은 일록에 실려있다.

연도기행은 5개월에 걸친 사행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시문은 별로 없으며, 하루의 이동 거리를 매일 기록하고 있다. 지나가는 길에 보고 느낀 것, 비석과 패루, 성터 하나하나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압록강을 건넌 후 부터는 지역, 유적과 관련된 명, 청의 역사, 그리고 자신의 과거 인질경험과 과거의 사행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하고 있다.

 

2. 연행의 일정 및 인원

인평대군 연행의 일정과 주요한 사건, 인원의 변동을 표로 정리하였다.인원은 조선 측에서 출발한 인원 외에 청에서 사신 일행을 호행하기 위해 파견한 이들에 대한 기사까지 정리하였다.

내용

인원

8

3

표문을 받들고 해질 무렵 길을 떠남.

정사, 부사, 서장관, 호행중사, 비장 5명, 역관 11명, 大醫 2명, 화원, 外司醫員, 사자관, 副使軍官 2명, 行臺軍官, 대전별감, 사헌부 서리, 內局書員, 蒼頭 8명.

5

개성 도착.

9

황주 도착.

10

평양 도착. 며칠 머뭄.

14

안주 도착.

16

청천강 도강. 정주 도착.

18

灣上軍官 합류.

19

의주 도착.

20

도강 준비를 함.

灣上裨將 7인을 副使 行中으로 보냄.

22

압록강 도강.

24

책문 도착.

25

팔도하 도강.

책문부터 衙譯, 麻牌 1인과 갑군 50명이 호행.

29

요양 도착.

봉성 갑군이 돌아감.

9

3

삼차하 도강

5

광녕 도착.

예부좌시랑, 낭중 2인이 내방.

7

대릉하 도강.

9

영원 도착.

12

산해관 도착.

예부낭중, 대통관, 아역 4인이 합류.

15

영평 도착

16

고죽성 도착. 백이숙제묘 참배.

20

삼하현 도착. 예부 계심랑이 연회를 열어줌.

山關 마패, 아역 및 갑군 20여명을 사퇴시킴.

22

연경 도착. 예부상서가 맞이함.

23

표문과 자문을 바침.

27

방물을 바침.

10

1

別獻을 바침.

2

조참례 예행연습을 함.

3

자금성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조참례를 행함. 청의 공주는 몽고에 시집보내는 일이 함께 이루어짐. 蒙王을 따라 연회에 참석.

5

김여휘를 만남

6

말과 예품 구입을 허락.

7

鷹連中使 김정립과 김여휘를 만남.

10

김여휘를 만남.

15

조참례를 행함.

19

김여휘를 만남. 寒疾이 발병.

20

연경에 대하여 탐문.

23

상마연에 참석.

26

예부에서 先來를 허락해 군관 역관이 장계를 받들어 출발. 김여휘를 만남.

29

연경에서 출발.

공부낭중은 柴草를 담당. 역관 3명이 호행을 밭아 關上까지 가고, 博氏, 衙譯 등을 봉황성까지 호행. 청 장수 2명이 갑군 20명을 거느리고 關上까지 호송.

11

4

풍운현의 擧人 曹貞望의 집에서 머뭄. 국화를 얻음.

7

산해관 도착.

12

영원 도착.

14

금주 도착.

15

대릉하 도강.

16

광녕 도착.

갑군들이 돌아감.

19

삼차하 도강. 우장 도착.

20

우장에 머무름.

마패, 아역, 광녕갑군이 돌아감.

21

우장 출발.

우장 아역과 마패 1인, 갑관 10명이 호행.

22

의주 군관과 역관을 만남.

23

임금이 내린 글을 받음.

24

연경으로 가는 동지사를 만남.

28

봉황성 도착.

29

책문을 나옴.

12

1

압록강 도강. 의주 도착.

3

의주군관이 돌아감.

4

선천 도착. 분원에 보낼 백자 원료(백토)를 구함.

5

정주 도착.

7

안주 도착.

9

평양 도착.

11

황주 도착.

14

개성 도착.

15

백제관 도착.

16

서울 도착. 復命

 

3. 기사발췌

1) 일록 첫머리에는 인평대군의 사행 목적을 알려주는 기사가 실려있다. 앞의 해체에서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이 사행은 명분은 사은사이지만 목적은 대신들의 사면과 추가로 파견되는 淸使를 막는 것에 있었던 듯 하다.

 

금년 또 북쪽 변방에 일이 벌어져서 사대부들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陳奏하라는 명령이 다시 또 나에게 내려졌다. 날짜를 가려서 表文을 받들고 먼 길을 달려 가니, 일이 넓은 하늘처럼 아득하였다. 더구나 떠날 때에 작은 아들이 죽음을 당했는데도 그 무덤에 가서 울지도 못하고 심정을 억제하며 길을 올랐다. (중략) 경진년부터 병신년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압록강을 건넌 것이 열 한 번이나 된다. (중략) 중간에 간혹 조정에서 명령해 보낼 적도 있어, 간곡하게 사정을 아뢰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말씀은 오히려 따뜻한 윤음을 내리셨고, 혹시 남의 헐뜯음을 당했지만 이내 그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

 

12월 3일

先來譯官 卞承亨이 파발마로 달려 내려와 家信을 전하며 말하기를 “16신이 모두 죄에서 풀리게 되었고, 또 北使가 정지되었다 해서 조정에서는 크게 기뻐하고 있으며, 여러 재상들이 모두 전갈을 보내서 치사합니다. (중략)” 16신은 영의정 이시백, 좌의정 구인후, 우의정 심지원, 이조판서 정유성, 호조판서 이시방, 예조판서 이후, 병ㅈ판서 원두표, 형조판서 신준, 참판 김여옥, 참의 목행선, 공조판서 이해, 知義禁 신인적과 오정일, 도승지 이행진, 대사헌 이시해, 대사간 조형이다.

 

2) 8월 24일 인평대군 일행은 책문을 지나 봉황성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이날 기사에는 사신들이 강을 건넜을 때 청에서 주는 물건과 또 청인으로 조선 사신들을 대접하고 호행하는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 계속하여 연경으로 행할 때 사신들을 접대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연경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로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청의 방어태세 또한 알 수 있다.

 

8월 24일

麻牌 却氏의 집에 들어가 잤다. 마패란 곧 老胡의 칭호로 우리나라의 왕래하는 사신을 호행하는 자이다. (중략) 관청에서 주는 下程은 秋露와 양, 오리, 닭, 돼지, 땔나무인데, 正官과 從人에게 차등 있게 분배해준다. 대개 정관은 군관과 역관이요, 종인은 각 項의 하배들이다. 앞으로 가면서 각 역참도 모두 이 법을 쫓는다. 鳳城에서 牛庄에 이르기까지 식구와 노정을 따져 糧米를 준 것이 이러한 예였다. (중략) 守成將 2명, 마패 4명, 衙譯 2명, 博氏 2명에게 각각 예물을 차등 있게 주었는데, 이 역시 상례에 의한 것이다.

 

8월 28일

옛날 淸主가 심양에 있을 때 심양에서 봉황성까지 5리마다 돈대를 설치하여 이것으로 우리나라를 았았었다. 그런 때문에 곳곳에 인가가 있고, 골짜기마다 농사를 지어서 나그네들이 몹시 편하다. 청나라 군사가 연경으로 들어간 뒤에는 다시 동쪽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돈대를 모두 철수하고, 삼차하 이남에는 역참마다 오직 庄頭를 두었는데, 이를 천총으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장정 40~50명을 거느리고 우리나라 사신을 접대한다.

 

10월 29일

예부 啓心郞 한 사람은 대통관 李一善과 아역 朴孝男을 데리고 三河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고 廣祿寺少卿 한사람과 工部郎中 한사람은 博氏 두사람, 당역 한사람, 대통관 李夢善, 아역 金德生, 尹堅을 데리고 關上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다. 공부랑은 시초를 맡고 세 역관은 호행을 맡아서 관상까지 가고 나머지는 모두 봉황성까지 호행한다. 청나라 장수 두사람이 갑관 20명을 거느리고 관상까지 호송하기로 되어 있어 모두 일행과 함께 떠났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며 그 비위를 맞추어 주기 어렵다.

연경을 떠나올 때 아문에서 사신에게는 소, 양을 주었고, 정관에게는 饌銀을 주었다. 이 때문에 牛庄까지는 오직 시초만 지급하고 하정은 공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관례이다.

 

3)인평대군은 9월 8일 松山堡를 지나면서 송산에서 소현세자와 효종이 홍타이지를 따라 전쟁에 나아가 진중에 있었다가 오삼계의 군대에게 죽을뻔 한 일과 명의 명장인 祖大壽가 항복했던 錦州의 싸움을 회상하였다. 이 기록에서 당시 청의 요구로 파병된 조선군이 명군과 싸웠던 사실과 여기에 대한 명의 반응을 알 수 있다.

 

9월 8일

辛巳(1641) 연간에 (중략) 이부시랑 홍승주를 총독군문으로 삼아 8총병 13만명을 거느리고 송산에 진주하여 그 포위를 격파하도록 했다. (중략) 날래고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하여 여러 번 청나라 군사를 꺽어 거의 포위를 풀 뻔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밀한 화포로 인해 승부를 보지 못했다. (중략) 이 때 나는 인질에서 풀려나 귀국하였고, 소현세자와 금상께서는 청나라 征軍을 좇아 모두 진중에 있었다. 진중에 소현과 금상은 처음 帷幕을 친 곳이 불편하여 약간 비켜 딴 곳으로 옮겼는데, 漢兵이 포위망을 뚫는 길이 바로 처음에 유막을 쳤던 곳이다. (중략)

이 싸움에서 淸主가 우리나라 수천 명 정예한 포병을 징집해다가 4~5년 동안 교체해가며 수자리를 살리니, 모두 사격술에 능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功을 논하는데 오랑캐의 머리는 50金이요, 고려 사람의 머리는 그 배를 주었다. 우리나라 장졸들은 비록 청인의 威令에 겁이 나서 부끄러움을 머금고 적에게 나갔다고 하지만, 국가에서 수백년동안 양병한 것이 마땅히 써야 할 때에는 쓰지 못하고, 도리어 쓰지 못할 자리에 썼으니,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4) 인평대군 일행은 9월 12일 산해관에 들어섰고, 13일 청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어주는데 이 때 압연관으로 오는 예부낭중 등이 이들을 북경까지 인도한다. 기사를 바탕으로 사신을 호행하는 청의 인원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9월 12일

山關 壓延하는 禮部郎中 및 大通官 金 巨軍, 아역 尹, 孫, 申, 金이 오늘 북경으로부터 도착했다. 거군이 산관아역 차성철, 김응선과 함께 와서 뵈었다.

 

9월 16일

下程을 바쳤다. 호행하는 禮部郎中 1명, 工部郎中 1명, 員外郞 1명, 唐譯 및 隨率官人 도합 10여명에게 차등있게 예물을 보냈으니 이는 상례이다. 예부낭중은 하정을 맡고, 공부낭중은 柴草를 맞았다고 한다.

 

5)연행록 중간에는 사신 일행을 본 중국인(漢人)들의 반응도 보인다. 인평대군은 조선인의 복색이 망한 명나라의 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를 본 한인들 중 눈물을 흘리는 자가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9월 13일

잔치가 파하고 객점으로 돌아오는데, 거리의 행인들은 사신 행차의 옷차림을 보고 漢朝의 의관을 생각하여 심지어 눈물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는 필경 漢人일 것이니 참으로 참혹하고 불쌍하다.

 

10월 3일

연회를 끝내고서 차례로 나왔다. (중략) 몽왕 중에 내 낯을 아는 자가 있어서 말로 호의를 베풀어주니, 북쪽 사람의 천성이 솔직하고 순박해서 교만하지 않음을 알겠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의 의관을 보고 눈물을 머금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情景이 매우 측은했다.

 

6)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있는 기사도 여럿 보인다. 인평대군은 연행길에서 절이나 도관을 끝없이 보았는데, 명나라의 멸명이 불교와 도교를 섬기는 폐속에서 온 것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9월 16일

마을 앞의 뾰족한 절벽이 물에 임했는데, 畵閣이 아득히 보인다. 필시 어떤 사람의 정자일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 지방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는 佛廟라고 한다. 중화 사람의 불교를 숭상함이 어찌 이렇게 지극한데이 이르렀는가? (중략) 큰 성이나 큰 府에는 곳곳에 모두 佛祠를 세웠고, 비록 보잘 것 없는 외딴 촌락에도 모두 절을 세웠다. 그 때문에 종일 가는 먼 길에 계속 눈에 띄어, 없는 곳이 없으니, 大明이 망한 것이 어찌 여기에 원인이 없다고 할 수 있으랴

 

9월 19일

佛宇와 道觀이 장차 태반이 될 지경이니, 명나라 말년의 弊俗이 여기에 이른 것을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

7) 9월 22일 인평대군 일행은 연경에 도착하여 대군은 別館 부사 이하는 玉河關다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3일 청 관원들의 재촉에 따라 표문과 자문을 올리고, 또 그 다음날인 24일부터 방물을 올릴 것을 재촉 받게 된다. 방물에 관한 기사 중에는 조선인 출신 통역관인 정명수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 인평대군은 정명수를 기억하며 그의 행태를 비난하고 있다. 정명수에 비견되는 인물이 大通官 李一善인데, 그 또한 조선인으로 청나라에 들어간 사람인 듯 하다. 조선인 포로로 청의 통관이 된 이들에 대한 연구는 유해연, 김윤수의 논문 등이 있다.

 

9월 24일

사행의 방물을 불시에 바치라고 하니, 이는 청나라 사람의 그릇된 습관이다. 이와 같은 폐단을 염려해서 미리 방물을 점검하고 분류해서 쌓아 놓았다. 上館의 인원만으로는 일손이 모자라서 中行에 사정하여 下館의 역관 2~3명을 불러서 함께 일했다.

 

9월 25일

지난날 흉악한 역관 鄭命守가 있을 때는 방물을 바친 뒤에 양관의 員役들이 감히 통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방물을 아직 바치기도 전에 원역들이 왕래하고 관부도 출입하고 있으니, 이는 대개 閽禁이 좀 풀려기 때문이다. (중략) 정명수의 행악이 어찌 여기에만 그쳤으랴. 지난날을 생각하면 머리털이 위로 뻗친다.

 

10월 2일

조참례가 (중략) 내일로 개정되었기에 아역 등이 비로소 부사, 서장관, 上館으로 하여금 일행을 모아놓고 미리 예정을 익히도록 했다. 대통관 이일선은 아역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자인데, (중략) 이제 별안간 나타나 종일토록 문에 않아서 심히 까다롭게 둔다. (중략) 그 행악은 정명수와 다름없다.

 

10월 29일

연경에 사신 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中行의 무리의 행악과 誅求가 날수록 심해진다. 그 끝 없는 욕심을 어떻게 다 채워준단 말인가. 이것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등창을 발하게 한다. 이것이 모두 흉악한 一善의 소행이니, 대개 사신 올 때 그의 처남을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던 것을, 남에게 혐의를 받을 것 같아서 그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자는 일찍부터 불효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이제 그 감정을 使行에게 폭발시켜서 일마다 말썽을 부리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9월 27일

아역들이 일제히 와서 방물을 드리라고 재촉하므로, 역관을 시켜 호부에 바치게 하였다. 물건을 수납한 곳은 호부의 아문이 아니라, 東華門 안에 있는 자금성 밖 九王의 집이었는데, 그 집이 적몰된 뒤, 正堂은 중들이 거처하는 사찰이 되고, 대문은 호부의 別庫가 되었다.

 

8) 인평대군은 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들어간 조선인을 만나기도 하였다. 김여휘라는 인물은 의주 사람으로 정묘호란 때 온 집안이 잡혀갔는데, 효종 대에는 청의 친병초관이 되어 궁중을 출입할 수 있었다. 인평대군은 이 사행에서 김여휘를 다섯 차례 만났는데, 그를 통해 청나라 내부의 사정과 조선에 사칙을 보낼 것이라는 정보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연도기행의 여러 기사 중 가장 주목되는 기사이다. 내용이 많아 조선과 관련되는 부분만을 추려 옮겼다.

 

10월 5일

金汝輝가 찾아와서 보았다. 여휘는 龍灣의 이름있는 집안이었는데 정묘호란 때 온 집안이 모두 포로가 되었으며, 여휘는 지금 청나라 임금의 親兵哨官으로 있다. 그 사람됨이 매우 선량하여 자주 와서 뵈었다. 그리고 비밀히 이번 사행편에 赦勅을 부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이 기쁨을 어찌 다 측량할 수 있으랴.

 

10월 7일

김여휘가 와서 보았다. 예물을 주고 대궐 안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후략)

 

10월 10일

김여휘가 와서 보았다. 연경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중략) 청나라 군대가 정진공을 토벌해서 평정할 수 없으므로 조정의 의론은 錦州의 전례에 따라 포수 만명을 우리나라에서 징발, 舟師로 福建을 進攻할 것을 건의했으며, 황제도 또한 그럴 듯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閣老 巴汔은, ‘다른 나라에 군대를 빌린다는 것은 위신을 송상시킬 염려가 있고, 또 조선 군대를 쓰더라도 적을 소탕하여 평정하기는 쉽지 못할뿐더러 화근만 전가시키게 될 것이니, 실로 속국을 보호하여 어루만지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힘써 이를 저지시켰습니다. 또 천청궁이 이루어지매, 예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사칙사를 보내려 했으나, 파흘은 또다시 ‘조선에 흉년이 들었는데, 詔使가 돌아오자마자 勅使를 또 보낸다는 것은 먼 데 사람을 회유하는 길이 아니므로, 대군의 이번 사행 편에 반사하는 조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서 의논이 그대로 결정되었습니다.”

 

10월 19일

김여휘가 와서 보았다. 대궐 안의 일을 물으니 대음과 같이 대답했다. (후략)

 

10월 26일

김여휘가 와서 보았다. 청나라 임금 母子 사이의 일을 물으니,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전략) 우리나라의 반역자 한명련의 조카 한일의 e라은 절색인데, 일찍이 九王宮에 있었으나, 이제는 대궐로 불러들이려 합니다. (후략) ”

9) 연도기행에는 연경에서 이루어진 말 무역과 개시에 관한 기사도 실려 있다. 그러나 기사가 소략하여 자세한 개시에 관한 내용은 알기 힘들다.

 

10월 6일.

아문에서 비로서 말과 例品의 구입을 허락했다. 무릇 말 값은 10金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처럼 산 것은 근래에 없었던 일이다. 그 원인은 몽고 사람의 입조하는 자가 많아서 수만필의 良馬가 거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10월 11일

아문에서는 비로서 馬市로 사람을 보내어 말을 구입하는 일을 허락했다. 아문에서는 이미 영을 내린지 오래지만, 아역이 중간에서 방해해서 곧 전달되지 못했던 것 같다.

 

10월 19일

아문에서 비로소 개시한다는 방문을 내걸었다.

 

10) 연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刷馬夫에 대한 기사가 여럿 실려 있는데, 그들이 중국에서 벌인 일을 기록한 기사는 10월 7일의 것이 유일하다. 노자가 떨어진 쇄마부가 중국인들을 상대로 약탈을 벌인 내용을 담고 있다.

11월 7일

 

저녁에 楡關店에 이르러 店舍에 숙소를 정했다. 쇄마부들이 길을 가면서 시장 상점의 떡, 국수 같은 물건을 약탈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를 다스리려 했으나 죄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후에 길 위에서 한 漢人이 꿇어앉아, 쇄마부가 엿 등을 빼앗아 먹은 일을 호소하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범인을 색출해서 값을 배상해 주고 重杖 80대를 쳐서 일행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初更에 그저께 보냈던 刷馬主戶가 버린 쇄마부를 찾아 싣고 돌아왔다.

 

11) 조선 측에서는 조선 상인들의 무역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는데, 청의 역관이나 상인들은 여기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던 듯 하다. 청나라의 역관이 인평대군을 찾아와 조선의 통제정책에 불만을 터트리고 간 기사가, 연행이 거의 마무리되고, 사신 일행이 봉황성에 머물 때 나타난다.

 

11월 28일

날이 저물 무렵에 봉성아역 日隱金과 博氏 두명이 義州淸譯 陰城發이 쓴 ‘봄, 가을의 개시에 돈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조선 商賈들이 남몰래 箋文 휴대하는 것을 금한다.’ 라는 문서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전문은 전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조금도 구애될 것이 없다. 灣尹이 하루 아침에 이를 막는다면 우리도 가만 있지 않겠다.’ 하면서 발끈 화를 내고 갔다. (중략) 음역관이 쓴 것은 아마도 조정의 분부일 것이다. 청나라 사람의 큰 이익이니만큼 막기가 어려울 것 같다.

 

12) 연행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책문에서 청이 반출을 금지한 焰硝가 수레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청의 城將은 전격적으로 사신 일행의 짐을 모두 뒤지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일로 여러 禁物들이 발견되어 인평대군 일행이 대단히 곤란하게 되었는데, 인평대군은 청의 관료들에게 엄중히 항의하는 한 편, 금령을 어긴 조선인들을 엄히 다스려 사태를 해결하였다. 연도기행에 따르면 금령으로 정한 물건이 국경을 넘어다니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11월 29일

부사를 배행하는 堂上譯官 박이절이 달려와 급히 고하기를 “선래군관 이면의 종이 焰硝를 수레 속에 감추어 실었습니다. 고용한 車夫는 通元堡 사람인데, 좋게 대하지 않았기에 성장에게 이 사실을 고발해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중략)”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무슨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좋은 말로 설득시킬 수 밖에 없다. 이 때 먼저 온 인마가 모두 샅샅이 수색을 당했다. (중략) 禁物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품목을 일일이 기록하고 연경에 보고하리라 한다. 사람마다 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이는 금년에 없는 일이다. (중략) 한 편으로 인마를 뒤로 물리고 말안장을 내려 불태워 밥을 짓게 하여 그 형적을 감추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역관을 보내어 엄격히 항의하게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세는 조금도 꺽이지 않고 갈수록 횡포를 부려 사람으로 하여금 분함을 금치 못하게 했다. 붙잡혀 있는 쇄마부 다섯사람을 轎子 앞으로 끌어다가 갑자기 重杖을 치고 저네들과 다시 말하지 못하게 했다. 광록소경과 성장이 이와 같은 불평의 기색을 보자 도리어 불안스럽게 여기면서 수색을 늦추고 인마를 나가게 한편 부드러운 낯빛으로 와서 위로하기를 “(중략) 그 죄가 중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했다.

(중략) 채찍을 날려 책문을 나왔다. 이는 필시 灣市의 재앙이 억울하게도 사행에 미친 것이다. (중략) 다섯 죄인은 差員인 희천 원을 시켜 압송해서 가게 했다. (중략) 이 것은 실로 요동을 드나든 20년동안 일찍이 없었던 치욕이었다.붙잡힌 다섯 놈을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중략)

上通事 최진남에게 일행 속에 금물을 감추어 오는 자를 적발하여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10대를 쳤다. (중략) 10여년을 두고 금령을 범한 것이 이제 비로소 발각된 것이다.

 

4. 맺음말.

인평대군의 연도기행은 종친이면서 청에 12번이나 사신을 다녀올 정도로 對淸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인평대군의 기록이기에 비록 그 양은 많지 않지만 연행록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연도기행에는 시문보다는 연행에서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해준다고 볼 수 있다. 앞서 해제에서도 지적했듯이 연도기행을 살펴보지 않고 연대기 자료만을 보았다면, 6156년(효종 7)있었던 인평대군의 사행은 단순한 사은사행으로만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에 죄입은 대신들을 사면하고, 추가적으로 淸使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사행이었음이 이 자료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다섯 차례에 걸친 친병초관 김여휘와의 만남이다. 당시 청은 인평대군과 부사, 서장관 일행을 다른 곳에서 묵게 하고, 뒤이어 온 응련사 김정업과도 만나지 못하게 하였을 정도로 조선 사신일행에게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나 인평대군은 김여휘와 여러 번 만나 대궐 안의 사정, 청의 정세, 황제와 태후와의 관계, 황제의 후비 간택 내용까지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인평대군이 이번 사행의 핵심적인 목적인 여러 대신을 頒赦해줄 것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도 김여휘를 통해서였다. 두 번의 호란을 거치면서 포로가 되거나 스스로 강을 넘어 청으로 흘러들어간 이들 중 청의 역관이 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이들 중 정명수와 같이 조선을 압박하며 많은 부를 쌓은 이들이 많았다. 본 자료에 등장하는 이일선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 중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김여휘와 같이 청에서 출세하여 조선 측에 정보를 주는 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본 자료를 통해 조선인 포로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 본 발표문에서 모두 다루지는 못하였으나 청과 조선 사이 밀무역의 단면을 보여주는 기사, 이괄의 난에 참여했던 잔당에 대한 기사, 청과 몽고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 등, 흥미로운 기사들이 많이 등장하며 자료의 길이에 비하여 많은 정보를 주고 있다. 따라서 연대기자료 등과의 비교를 통하여 연행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실질적인 부분에 대한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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