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료

종사일기 6월

同黎 2013. 3. 3. 04:01

1835-06-01 賀禮後歷入本官 歸來点考 邸債出秩傳令各驛而來 納後尺文段自官瑠印成給之意知委 會計

1835-06-01 맑았다. 하례 후 차례로 본관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점고하였다. 저채를 출질하여 각 역에 전령하고 돌아왔다. 납부 후의 자문은 우리 관 유인으로 성급할 뜻을 알렸다. 회계하였다.

 

1835-06-02 晴 晩陰微雨 從父主下答來 中簡三軸周紙一軸來 巡使家患候以傷寒多日强留云 仰慮黃山驛以兵使家行部 若自右道作路 則嘗己替把於兵營之意 具由回拸 自申後大霖連注

1835-06-02 맑았다. 저물녘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아버님 답장이 왔고, 중간 3, 주지 1축도 왔다. 순사가 감기로 인한 환후로 여러 날 억지로 머물고 있다고 한다. 생각건대 황산역은 병마절도사가 마을을 순행하게 하고 우도에서 가게 될 경우는 일찍이 내가 병영에서 체파한다는 뜻을 연유를 갖추어 회이하였다. 신시 후에 큰 장마가 계속 퍼부었다.

 

1835-06-03 雨 川渠漲滿田野大喜

1835-06-03 비가 왔다. 개천이 불어 넘쳐 전야가 매우 기쁘다.

 

1835-06-04 從父主前上書 送簡紙二百幅周紙十軸価五兩五戔七分 付家書六天 生黃布一疋永川場貿來 価四兩七戔 廣州居驛民 以其子九歲児 橫入本府陸軍呈訴 移文成給 書本官兩事 澒洞圭璧停止公私喜幸如何 仰喻盈~一帶 殆若弱水間之 自伊貽阻曷任瞻誦 伏惟禮節日來萬護拱溸切切 聞以看星消遣云 便同家內賽神有甚意趣耶 仰呵呵記下鎭日閒無事固好矣 積氣闖肆苦悶云 舘下民尹千石 以復戶屯畓作者 爲築潰垌空石題給事呈訴 二十立許給

1835-06-04 맑았다. 아버님 앞으로 편지를 올리고 간지 200, 주지 10축 값 557푼을 보냈다. 가서를 여섯번째 부쳤다. 생황포 1필을 영천 장에서 거래해왔고 값은 47전이다. 광주에 사는 역민이 그의 아들 9세 아이를 본부 육군에 횡입하여 정소한 이문을 성급하였다. 본관의 두 일을 쓰니 어지러운 규벽에 공사를 정지하여 다행인가 어떠한가. 찰랑거리는 일대를 비유컨대 거의 약수 사이에 있으니 이로부터 막히면 어찌 보고 욈을 맡기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데 예절일은 오는데 만호공소(?) 절절하다. 들으니 간성은 하릴없이 있다고 한다. 곧 한 집 안에서 굿함이 매우 심한 뜻이지 않는가. 웃어넘기며 아래를 써나가니 평소 한가하여 일이 없어 진실로 좋으나 적기가 멋대로라 고민스럽다. 관하민 윤천석은 복호로 둔답을 경작하는 자로 궤동을 쌓음에 공석을 제급한 일로 정소하니 20닢을 허락해 주었다.

 

1835-06-05 永川郡移文來 位土還退事 營關屢次截嚴 而今當移職待新官停當云云

1835-06-05 비가 왔다. 영천군의 이문이 왔는데 위토 환퇴의 일은 영관이 누차 엄하게 하여 지금 마땅히 이직하여 새로운 관리를 기다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1835-06-06 雨 旱餘成霖霔曝 不適還爲悶然 積氣頗苦 醫兼無可議之人可悶 各驛看品馬以今三十日傳令

1835-06-06 비가 왔다. 가뭄 끝에 장마가 성하여 사납게 오니 제때 돌아가지 못할까 근심스럽다. 적기가 자못 괴롭고 치료 또한 의논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근심스럽다. 각 역이 품마를 보고 이번 30일로 전령하였다.

 

1835-06-07 微雨 從父主下書來 憑聞京信景訧間患運氣僅得脫免?慮添一病? 積氣强亘之時 以五加皮燒酒少飮以鎭肆動之氣

1835-06-07 가랑비가 내렸다. 아버님 편지가 왔다. 서울 소식을 듣건대, 경우 간에 운기를 근심했는데 겨우 면했다고 한다. ? 적기가 강하게 뻗치는 때에 오가피 소주를 조금 마tu서 멋대로인 기운을 진정하였다.

 

1835-06-08 從父主下書來 田紙五束來 每束価三戔五分 周紙五軸來 每軸価一戔七分 散文差員路文來到 賓吏兵房領率人馬來待于山驛七十里前站之意有分付云 問其從前已例 則旣徃無出站之例每入邑替把云 姑來知差員之誰某 而不必相持生梗 故兵吏率人馬起送 而可謂弊客

1835-06-08 맑았다. 아버님 편지가 왔다. 전지 5속이 왔고 매 속 값은 35푼이며 주지 5축이 왔고 매 축 값은 17푼이다. 산문차원의 노문이 도착했는데 빈리가 병방이 인마를 거느리고 와서 산역 70리 앞 참에서 기다릴 뜻을 분부하였다. 그 종전의 예를 물으니 기왕에는 출참의 예가 없어 매번 읍에 들어갈 때 체파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차원이 아무개임은 알되 서로 의견을 고집하여 불화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병리가 인마를 거느리고 사람을 보내니 폐객이라 할 수 있다.

 

1835-06-09 乍陰乍晴 慶州永川兩邑居方生來見 謂以情物全鰒一貼持來 受亦不安

1835-06-09 갑자기 흐리고 갑자기 맑아졌다. 경주영천 두 읍에 거주하는 방생이 내견하여 이르기를 정물로 전복 1첩을 가져 왔다 하니 받는 것이 또한 불안하였다.

 

1835-06-10 晴 方生二人 朝飯后告歸以丸藥分給 吏房處扇子一把肉二斤給 慶科合設關子來到

1835-06-10 맑았다. 방생 2인이 아침 식사 후 작별하고 돌아가고 환약을 나눠주었다. 이방에서 부채 한 다발과 고기 두 근을 주었다. 경과 합설 관자가 도착했다.

 

1835-06-11 從父主前上書 淸通復戶來 ?漢捉來事 差使定送 白紙周紙価二兩六戔 送巡營 直使便乘 從父主下書 牟還市直促關來 牟一石直壹兩二戔 色落一戔 依本邑同報

1835-06-11 비가 왔다. 아버님 앞으로 편지를 올렸다. 청통 복호가 와서 ? 잡아오는 일로 차사를 정하여 보냈다. 백지주지 값은 26전이며 순영에 보냈고 직사가 편승 하였다. 아버님이 편지 하셨다. 모환 시직(?) 촉관이 오니 모 1석에 12, 색락은 1전이었고 본읍의 동보에 의한 것이다.

 

1835-06-12 兵營褒貶 領去軍官金景根草料騎馬一匹給 富平驛馬価收?兼探弊瘼次 下吏河昌範定送 毛良大馬一匹致斃 牟還都錄成貼 山驛馬夫貴德上京回 見家書初二三日出二三大答 京邸告目朝紙 自五月初六日艹五日至 四軸下來 入夜浚直使便乘 從父主下書 廣魚二尾白簡竹五介來

1835-06-12 맑았다. 병영에서 포폄하여 영거군관 김경근에게 초료 기마 1필을 주었다. 부평 역마의 값을 ? 겸 폐막을 찾을 차 하리 하창범을 정하여 보냈다. 모량 대마 1필이 치폐하였다. 모환 도록을 성첩하였다. 산역 마부 귀덕이 상경하였다가 돌아왔고 초 이삼일에 낸 두 세 답장을 보았다. 경저의 고목조지가 오월 초육일초오일로부터 이르렀고 사축이 내려왔다. 밤이 되어 준직사가 편승하였다. 아버님께서 편지하셨고 광어 2, 백간죽 5개가 왔다.

 

1835-06-13 晴 付家書七天巡營便 牛谷馬夫奉宅回 見初一日出家書 欣慰 從父主前上書 廣魚価五戔付上戶房會計 書問兼送眞席一立 以淸通位土還退事論報 又錄示戶房 永川兼任夲官爲之云 河義澈送巡營褒貶謄來之意 分付安奇付書胎送其胤君

1835-06-13 맑았다. 순영 편에 가서를 일곱 번 째 부쳤다. 우곡 마부 봉택이 돌아와 초1일에 나온 가서를 보니 기쁘고 위로가 된다. 아버님 앞에 편지를 올렸고 광어 값 5전은 호방 회계에 부쳤다. 편지로 안부를 물을 겸 진석 1립을 보내고 청통 위토 환퇴의 일을 보고하였다. 또한 호방에도 기록하였다. 영천겸임본관이 하였다고 한다. 하의철이 순영 포폄을 베껴올 뜻을 보여 안기에 분부해 편지를 부쳐 그 윤군의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1835-06-14 晴 下吏河洛圖 以毛良監官無端見退事 搆罪河錫龜再次呈訴 題雌黃非淳俗且置向也 河錫龜之仍任者 亶出於姑副該驛民願存之意 苐欲觀譽蹟之虗賓者也 渠旣年久 氣行又兼兩驛監官 熟處生弊難保 其必無一身兩任 似不無遜讓底意兺 徐良 汝亦見差数朔該驛等納之役無弊氣行 是如可無端見退可是强寃 玆今改遍復汝 其任是在果監官之任 所幹非歇 捄弊生弊 專靠於監官 汝能免責人明之譏乎向事

1835-06-14 맑았다. 하리 하락도가 모량 감관이 단서 없이 거절한 일로 하석귀를 구죄하여 재차 소장을 올렸다. 판결하기를 자황(?)이 순한 풍속이 아니니 또한 두고 보게 하였다. 하석귀를 잉임하는 자가 진실로 ? 해당 역민이 보존하기를 원하는 뜻에서 나왔다. 다만 명예와 공적의 ?을 살피려 하였다. 개천이 이미 오래 되었고(?) 기행 또한 양 역 감관을 겸하니 익숙한 곳에 폐단이 생기는 것은 보존하기 어렵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임무를 기필하니 속 뜻을 겸손히 사양함이 없지 않은 것과 같을 뿐이다. (너는 또한 차수를 보고 초하루 해당 역 등의 납의 역이 폐단이 없고 기행이 옳다가 단서가 없는데 견퇴당한 것이면 이는 강제로 면직된 것이니 이때야 고쳐 너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임무는 과연 감관의 임무에 달려 있다. 줄기는 마르지 않으나 구폐생폐 할 수 있으니 오로지 감관에 의지해야 너는 능히 남의 허물을 나무라는 데 밝은 (허물에서) 벗어날 일이다.)

 

1835-06-15 晴 穗氣頗苦 賀禮未參点考今待分付 牟還市直成冊到付題來 阿火驛民等訴 驛基見者皆以謂殘 脉姑凋弊去益難支 馬額頻數致斃 將欲移置佳基特許事 題恤其勢之殘敗 必欲擇移者 雖出於避凶就吉之意 無乃好聼同客之談乎 以若凋殘之勢處議此巨役不無力不敷之慮兺除良此是大事也 從當商量處分向事 河吏義澈還承從父主下答竹纓一次來戶房會計答來而位土事報狀嚴題道內褒貶題月謄來而吾則以日淺懸 申在健非治不孜奈病之妨中 豊基尹在財枵必窮害將安歸下 順興申匡一面淸換邑唉此在得下 彦陽王凞澤干囑宜絶勤勵是勉中 知禮洪育疇何罐不藥惟釐之宜中 三嘉徐容輔偶失束薪方蔚恤節中 比安洪秉道縱謂收逋終涉違絟中黃山李在嵩雇謗非信中 居村徐有冕不甚至瘝中 其外皆上題而本官以納或從權果遠屛爲上而甚未安 奴令軰相鬪喧嘩罪杖二十度

1835-06-15 맑았다. 적기가 자못 괴롭다. 하례에 참석하지 않고 점고하였고 지금 분부를 기다리고 있다. 모환 시직 성책이 도착했고 부제도 왔다. 아화 역민 등이 소하였다. 역기의 본 자는 모두 잔인하다고 한다. 줄기는 말라 폐기하여 버리니 더욱 지탱하기 어렵고 말도 자주 치폐하였다. 장차 가기로 옮겨 두고자하니 특별히 일을 허락해 달라. 판결하기를 그 잔패한 형세를 구휼하고자 하면 반드시 옮길 것을 가려야 하는데 비록 흉함을 피하고 길함을 좇는 뜻에서 나왔더라도 어찌 호청동객(?)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조잔한 형세로 의논컨대 이것은 큰 일이라 무력하여 부족할 염려만 있을 뿐이 아니다. 이것은 큰 일이니 일의 마지막에는 잘 생각하여 처분할 일이다. 하리 하의철이 돌아와 종부주의 하답을 이었고 죽영이 한 차례 왔다. 호방 회계의 답이 와서 위토의 일을 담은 보장은 엄히 판결하라 하였다. 도내에 포폄하였다. 판결하기를 매달 베껴오되 나는 날마다 천현? ?신이 건재하나 다르림에 힘쓰지 않으니 병의 방중함을 어찌하겠는가. 풍기 윤재?이 재물이 비어 반드시 궁핍하여 해를 끼치겠으니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순흥 신광일~ 언양 왕희택이 간촉은 마땅히 끊고 부지런히 힘쓰는 중이다. 지례 홍육주~ 오직 정리하는 중이다. 삼가 서용보가 우연히 속신과 방위을 잃어서 구휼하여 맞추는 중이다. 거촌 서유면이 병에 이름이 심하지 않다. 그 외에는 모두 상제하되 본관이 들인다. ~ 관노와 사령 무리들이 서로 다투어 시끄럽게 한 죄로 장 20대를 주었다.

 

1835-06-16 乍雨旋晴 本官冊畓宋雅率三妓來話 泥鞋二部造來 価爲一兩七箋児 雲鞋二部価 一兩三戔五分 差員延進人馬 逗畓多日而虛還

1835-06-16 갑자기 비가 오다 금새 맑아졌다. 본관 책답 송아가 세 기녀를 거느리고 와서 얘기하였다. 이혜 2부가 제작되어 왔고 값은 17전이다. 운혜 2부의 값은 135푼이다. 차원이 인마를 늘어놓아 올리고 여러 날 전답에 머무르며 허환하였다.

 

1835-06-17 晴 牟還開倉 從父主前上書 送南草五斤 戶房許裁書 上京時馬夫貸給 錢五兩推送 自申後大雨暴注 兩倉牟二石捧上

1835-06-17 맑았다. 개창에서 모환하였다. 종부주 앞에 상서하며 남초 5근을 보냈다. 호방에서 재서를 허락하여 상경 시 마부를 빌려주고 전 5냥을 추송하였다. 신시 이후 큰비가 사납게 내렸다. 양 창의 모 2석을 봉상하였다.

 

1835-06-18 還倉牟六石賑倉二石捧

1835-06-18 비가 왔다. 환창의 모 6, 진창 2석을 봉상하였다.

 

1835-06-19 牟還同倉 報狀修呈

1835-06-19 맑았다. 동창에서 모환하고 보장을 수정해 올렸다.

 

1835-06-20 雨 還倉七石賑倉九石 ?答來 河宗孫自巡營還 現見初五日出家書 驛員安國鏞 自萊府上京 作草料騎馬一匹給 人蔘九斤一兩重給価二兩

1835-06-20 비가 왔다. 환창은 7, 진창은 9석이다. ?이 답래하였다. 하씨 종손이 순영에서 돌아와 초오일의 가서를 보였다. 역원 안국종이 동래부에서 상경하여 초료를 지어 기마 1필을 주었다. 인삼 구? 1냥 중급가(?) 2.

 

1835-06-21 晴 還倉十石賑倉九石 淸通位土還退事 營關嚴截 今番似可匈當也

1835-06-21 맑았다. 환창은 10, 진창은 9석이다. 청통 위토 환퇴의 일은 영관이 엄하게 했었는데 이번에 떠들썩하게 될 것이 당연한 듯하다.

 

1835-06-22 晴 還倉十石賑倉十四石 本府來訪 今日卽初庚故以狗醬点心

1835-06-22 맑았다. 환창은 10, 진창은 14석이다. 본부에서 방문하였다. 오늘은 초복인 까닭에 개장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1835-06-23 陰微雨 還倉七石賑倉六石 從父主前上書 絅巾二立浮來 価二兩四戔

1835-06-23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환창은 7, 진창은 6석이다. 종부주 앞에 상서하였다. 경건 2립이 부래하였고 값은 24전이다.

 

1835-06-24 朝陰晩雨 岳丈往修道寺 冒雨而還 還倉十四石 賑倉十二石 宕巾一立中踈價給三兩 造果一百立 河宗孫淸通位土收殺次出送

1835-06-24 아침에 흐리고 저물녘 비가 왔다. 어른이 修道寺에 갔다가 비를 무릎쓰고 돌아왔다. 還倉14석이고 賑倉12석이다 宕巾 1립이 中踈하여 가격을 3냥을 주었다. 100립 만들었다. 河宗孫淸通位土에서 收殺할 차로 내보냈다.

 

1835-06-25 晴 還倉十二石 賑倉十五石 從父主下書來 壯紙二束白紙五束價一兩七錢四分 見十三日出家書五天答

1835-06-25 맑았다. 還倉12석이고 賑倉15석이다. 從父님의 下書가 왔다. 壯紙 2, 白紙 5속의 값 174분이다. 13일 나간 家書를 보고 五天이 답하였다.

 

1835-06-26 晴 還倉十四石 賑倉十一石 鏡驛中馬一匹改立試才看品可合 故定價八十兩入籍後 本驛下屬人情雜費 一依營節目施行之意 申飭該驛民等處 馬價收斂時慮或有原定數外加斂之弊 故以馬價八十兩及該驛雜費十八兩四戔 合九十八兩四戔外 無一分加斂之意傳令 而本驛原(?)所給人情錢依營節目 合爲四十餘兩 而此則該驛監官擔當云

1835-06-26 맑았다. 還倉14석이고 賑倉11석이다. 鏡驛中馬 1필을 고쳐서 세우고 試才看品하니 합당하다. 그래서 80냥으로 가격을 정하고 立籍한 후 本驛 下屬人情雜費는 하나같이 營節目에 따라 시행할 뜻을 해당 역민등에게 신칙했다. 말값을 수렴할 때에 혹 原定數 외에 더 거두는 폐단이 있을까 엄려되었다. 그래서 말값 80냥과 해당역의 잡비 184전을 합하여 984전 외에 1분도 더 거두지 못하게 할 뜻을 전령하였다. 그리고 본역이 원래 지급하는 人情錢人情錢에 따라서 합 40여 냥으로 삼고 이것은 해당역의 감관이 담당한다고 한다.

 

1835-06-27 晴 還倉十六石 賑倉十石 慶州見谷面 兪尙祿身故 依公文頉給 朴九還馬價勿爲量徵事 移文慶州府 駈從權千伊 崔平世 發送付家書八天 七月 初五日 祭需藥果百立 而敦洞宅七月祭需分送次 脯三貼燭十雙全卜二十介海蔘二十介柏子五升末二升 兄主衣次黃布一疋眞席一立簡紙五十幅周紙二軸 敬和黃布一疋網巾一事南草一斤 敬翼黃布一疋網巾一事南草一斤 本宅生黃布一疋白苧一疋錢五兩兒鞋五部眞席一立手巾次細布六尺 別提宅黃布一疋南草二斤藿一丹 崔主簿[]宅生黃苧一疋眞席一立廣魚二尾 張生員宅黃布一疋 松安沈政丞宅黃布五疋眞席五立人蔘一斤 沈瑞興宅黃布一疋廣魚三尾眞席一立 鍾峴李參判[奎鉉]宅黃布三疋眞席二立簡紙百幅周紙五軸燒酒十鐥大脯三貼 呂州閔參判宅壯版三間所入[自京貿送]簡紙百幅周紙五軸 本宅藿六丹分送各宅次 京邸答牌

1835-06-27 맑았다. 還倉16석이고, 賑倉10석이다. 경주 현곡면 유상록이 죽어서 공문에 의해 탈급했다. 박구환의 말값을 量徵하지 마는 일로 경주부에 移文했다. 駈從 權千伊崔平世發送하는데 8번째 집편지를 부쳤다. 7월 초5祭需의 약과 100립과 敦洞宅7祭需를 나누어 보낼 차, 3, 10, 전복 20, 해삼 20, 백자 5, 2승이다. 형님 옷을 만드는데 황포 1, 진석 1, 간지 50, 주지 2경화에게 황포 1, 황건 1, 남초 1경익에게 황포 1, 망건 1, 남초 1본댁에게 생황포 1, 백저 1, 5, 아혜 5, 진석 1, 수건을 만들 세포 6별제댁에 황포 1, 남초 2, 미역 1주부 최항댁에 생황저 1, 진석 1, 광어 2장생원댁에 황포 1송안 심정승댁에 황포 5, 진석 5, 인삼 1심서흥댁에 황포 1, 광어 3, 진석 1종현 참판 이규현댁에 황포 3, 진석 2, 간지 100, 주지 5, 소주 10, 대포 3여주 민참판댁에 장판 3간 소입(서울에서 사서 보냄) 간지 100, 주지 5본댁에 곽 6단은 각댁에 나누어 보낼 차 경저리 답장했다.

 

1835-06-28 晴 還倉十二石 賑倉十三石 從父主前上書壯白紙價一兩七戔四分上送付家書九天

1835-06-28 맑았다. 還倉 12, 賑倉 13석이다. 종부님 앞으로 편지를 올렸다. 백지의 값 174분을 올려보내고 9번째 집편지를 부쳤다.

 

1835-06-29 晴 還倉二十五石 賑倉十三石

1835-06-29 맑았다. 還倉 25, 賑倉 13석이다.

 

1835-06-30 晴 還倉十四石 賑倉十三石 從父主下書來戶幕書來而淸通位土代錢徵捧事營門不必許之自邑驛相議從便之道爲好云云 其便見十六日出家書之安 各驛馬看品 赦文差員今始入來而檢律孔主簿()云午後仍發傳喝故答之 淸通位土以時晩之致不得還退從權以每石地只錢九兩式代捧於豫買人處之意 與兼任本官桐議發令定限以初五日還覺爽濶

1835-06-30 맑았다. 還倉 14, 賑倉 13석이다. 종부님이 보내신 편지가 왔다. 戶幕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淸通 位土代錢徵捧하는 일을 營門이 반드시 허락하지 않으니 邑驛에서 상의하여 從便대로 하는 방법이 좋다고 하였다. 그 편에 16일에 나온 집편지를 보고 편안했다. 각역의 말을 看品했다. 赦文差員이 지금 비로소 나왔는데 檢律 孔主簿라고 한다. 오후에 출발하여 안부를 물으니 답하였다. 淸通 位土는 때가 늦어서 還退할 수 없으니 임시로 每石地只에 전 9냥씩 豫買人處에 대봉할 뜻과 겸임본관과 상의하려 명령을 내고 초5일로 기한을 정하였다. 還覺하여 상쾌하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대학원 조선후기사 전공

 박사과정 박범, 석사과장 박세연, 이가영 번역, 박범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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