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의 의미

同黎 2010. 1. 14. 19:27

문화대혁명은 지금까지 많은 오해와 혹은 단선적인 평가만이 존재해와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브리태니커 백과에 실린 문화대혁명의 글을 보시죠.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혁명정신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이 권좌에 있던 마지막 10년간(1966~76)에 걸쳐 추진한 대격변. 중국이 소련식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따라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우려 때문에 마오쩌둥은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노력을 기울여 중국의 여러 도시를 혼란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기 일색입니다. 문화혁명하면 주로 홍위병, 지식인과 반모택봉파들의 강제 숙청과 노역, 문물 파괴, 대자보전 등만 퍼올리게 되죠. 그리고 그 원인도 목택동이 유소기, 등소평등을 경계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로만 평가하기 일수입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문화혁명은 유럽 지성계, 특히 좌파에게 거대한 충격과 새로운 발견을 주기도 하였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에 하나의 커다란 획을 그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중국인들에게도 새로운 자각을 안겨주기도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의 원인은 3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 내부 주자파의 득세입니다. 주자파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방침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인데, 말하자면 중국 사회주의에 수정과 개량을 가하려던 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오히려 정치적 목적이 더 강합니다. 즉 모택동을 비롯한 이들을 제거하고 중국 정계의 중심을 차지하려던 등소평의 야욕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중국공산당 내의 파벌은 있었지만 사실 이를 계획적으로 조직하고 후계를 지르는건 아마 등소평이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은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으로써, 모택동은 등소평이 정권을 잡을 경우 중국혁명 자체가 사라질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소련과의 대립입니다. 당시 소련은 소위 "사회주의 조국"으로 행세하며 일종의 패권주의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니고 국제적 발언권도 강할 수 밖에 없는 중국을 통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중국 독자적인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사이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점은 제가 쭉 지적해온 중국 공산당의 한계이기도 합나다. 사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대치되는 것이지만 2차대전 이후에 사회주의운동과 민족국가 수립운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족주의가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소련의 슬라브중심주의나, 호치민의 동남아시아에서의 베트남중심주의도 이러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두번째 이유와도 연결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전화 노력입니다. 동시에 소련식 스탈린주의의 거부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산주의는 바로 스탈린주의를 의미합니다. 즉 스탈린주의가 일종의 고전, 정통의 자리를 획득한 것이죠. (그러나 지금은 아시다시피 스탈린주의자-구좌파는 별로 없습니다. 적어도 한국엔) 스탈린는 여기에 더하여 소련은 더 이상 계급이 없는 국가이다!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완벽하게 실현된 국가이다라고 선언하면서 국제적으로 소련의 모범으로 삼을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국내에서 소련공산당에 대한 반대를 모두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로 환원시키면서 공산주의의 본래 통치방법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가장한 1인 독재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모택동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중국혁명 과정에서 모든 혁명과 사회주의의 건설이 맑스나 스탈린이 말한 어떠한 "교과서" 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죠. 어느 곳이나 각자의 모순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죠. 일례로 정식으로 하면 중국은 공업화가 부진하고 노동자보다 농민이 훨씬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전화를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저서가 모순론입니다. 즉 스탈린주의가 이야기하는 사회의 모순은 사실한 단 하나, 즉 계급모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혁명에 성공하고 나서 보니 사회주의 국가의 설립은 사회주의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해서 사회 전반에 다른 모순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당간부(관료)와 인민간의 모순, 도시와 농촌의 모순, 남성과 여성 사이의 모순, 지식인과 무식자간의 모순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마다 모순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모순"과 "주변모순" 이 존재하며, 주요모순과 주변모순은 순차적이지만 모두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모순의 해소를 위하여 노동자, 농민계급만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계몽하고 "때려서" 하나의 전선에 서게 해야할 "주타방(주요타격방향)"과 전선동맹이 공격해야 할 "주공방(주요공격방향)"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문화대혁명은 그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정치혁명, 사회혁명이 완수하지 못한 문화의 혁명을 이루지위한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당 간부가 관료화되고,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인민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인민대중에게 혁명의 주체는 당간부가 아니라 바로 인민 자신이다! 인민이여 상부를 비판하라 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에 호응하여 인민대중은 홍위병을 결성하고 자체적으로 지역의 당의 관료들과 봉건 잔재들은 비판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은 지금의 모든 좌파 대중운동의 숙제인데, 문화대혁명은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또하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들의 기존 사상체계에 하나의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중국은 수천년동안 사(士)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내재화되어왔고, 따라서 지식인은 지금의 상상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권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죠. 그러나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인민대중 스스로에 의한 당 중앙에 대한 비판과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지식인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지적차이는 단지 차이일 뿐,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체계의 일대 변화는 당시 이루어졌던 지식인의 하방운동과 맞물려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방운동은 말 그래도 아래로 향하는 운동이라는 뜻으로 지식인들이나 고위 당 관료들이 농촌과 공장의 노동자, 농민의 상황을 직접 체험하기 위하여 연대하는 운동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야 유배나 다름 없어 보이겠지만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선생님" 역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의에도 불과하고 문화대혁명의 한계는 존재합니다. 우선 엄청나게 거대해진 대중의 힘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모택동조차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체 우왕자왕하다가 각개격파 당합니다. 또한 혁명의 고조로 지나치게 최대강령주의가 판을 치면서 문물파괴(이 점이 제가 가장 땅을 치며 통곡하는 부분이죠. 문물파괴를 피한다는 명목으로 이시기 엄청난 문화재가 중국에서 유출되기도 합니다.)와 지나친 숙청은 사회를 경직시키고 혁명의 본 뜻을 가리게도 합니다. 아울러 모택동 자신의 한계도 존재하는데, 대약진 운동(혁명 이후 경제성장을 위해 추진한 대대적인 운동)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한 점이 그것입니다. 공산당의 간부 권력 확대와 관료제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그동안 지나치기 평가절하되었으며, 권력투쟁만으로 치부되어왔다는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은 다순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상의 앞길을 두고 벌인 치열한 투쟁이며, 권력투쟁은 거기에 종속되는 하나의 투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록과 출판은 거의 지식인들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비극이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 시기 하방운동이나 비판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만 자신들이 받은 치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뿌리깊은 중국의 士의식이 이들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해 기록된 문화혁명은 대부분 부정적일 수 밖에 없고, 또한 냉전중인 당시 상황상, 미국의 서방에 의해서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오랫동안 냉전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평가 밖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오해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문화대혁명은 프랑스 등의 유럽에서는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을 시켜, 알튀세르 등의 이론가를 탄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에 의한 평가는 냉엄해야 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책은 거의 전부 지식인이나 혹은 지식인의 자녀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나 최근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층 민중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 이라는 책이 최근에 출간되어서 기층 민중 시각에 의한 문화대혁명 연구의 첫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이 책의 서평 한 문단을 소개하며 이번 강의를 갈음합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30년간 실시해 온 개혁개방 정책으로 어떻게 중국이 달라졌는지를 세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리였으며, 이제까지 후진국이나 제3세계로 평가받고 있던 중국이 선진국 대열에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음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중국의 이러한 화려한 변신 속에는 티베트 독립 운동의 무력 진압 같은 폭력적인 모습이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심한 소득 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안 요소도 함께 내재되어 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중국 내부에서, 중국의 노동자들은 현재에 만족하기보다는 40년 전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그리워하고 있다. 문혁의 상징인 마오쩌둥을 다시 등장시키며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데, 특히 노동자들은 국유기업 민영화 과정에 항의하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높이 들고 당시의 구호들을 외치며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살 권리를 주장하는 이런 시위와 그들이 외치는 구호의 근거를 살펴보면, 그 밑엔 문화대혁명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 중국 내부에서는 잊혀져야 할 시간,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로 굳어져 버린 문혁이 왜 지금 평범한 중국 인민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을까?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끝나 버린 문혁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문혁에 대한 관방의 기억과 인민의 기억 사이에는 어떠한 틈이 있는 것일까?
이 책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의 노동자의 문혁 10년』은 지은이 천이난(陳益南)이 장장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노동자의 신분으로 조반(造反;‘혁명을 받든다, 혁명적’이라는 의미)운동에 참가하면서 경험한 일을 서술한 회고록이다. 따라서 저자는 혁명의 한가운데서 직접 체험한, 문혁의 발생 과정과 조반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상황, 또한 중앙에 의해 숙정(肅正)당하기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조반파 노동자조직은 문혁 연구의 중요한 과제임에도 아직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문혁 관련 작품들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구성되거나, 상층부의 권력 투쟁의 결과라는 관점에서만 다루어졌고, 문혁 시기를 살아가던 평범한 민중들의 경우 그저 혁명의 흐름에 휩쓸려 피폐한 일상을 꾸려가는 존재로만 비춰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담론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홍위병 출신 지식인들이 그들의 문혁 경험을 다양하게 재생산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들은 그들의 문혁 경험을 알릴 통로가 마땅하지 않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노동자가 자신의 문혁 경험을 써 내려간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문혁의 다층적인 면모를 알려 주는 것은 물론, 노동자의 시선으로 관방에 의해 통제되지 못하는 문혁의 다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