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5차

기나 긴 일본답사기 - 22일 교토 산비4 (진고지神護寺)

同黎 2019. 4. 23. 21:03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진고지로 간다.

여기 계단이 악명높은데, 차도가 있으나 택시도 못 간단다.


하...


올라가야지 별 수 있나


가자


끝이 안 보이는 길이다.


1/3 지점


찻집이 있다


잠시 땀을 식히는 중


연석


홍법대사가 벼루 대신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쉬는 중


진짜 윗면이 평평해보인다.

이제 반 좀 넘게 왔다.


마지막 고지가 보인다.


드디어 보이는 누문


정말 오랜만이다.


누문은 17세기 초 건립된 건물이다.


진고지(神護寺, 신호사)는 고야산진언종의 유적본산 사찰로 홍법대사 구카이와 깊은 인연이 있는 절로

유명하다. 교토의 진산인 아타고야마의 자락인 타카오에 위치한 이 사원은 본래 비젠지역에 기반을 둔

귀족인 와케(和気)씨의 우지데라와 타카오데라라는 두 절이 합병되어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원사라는

이름의 이 사찰은 나라 말, 헤이안 초기의 귀족인 와케노 키요마로(和気清麻呂)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케노 키요마로는 쇼무천황의 딸로 황위에 오르는 46, 48대 천황인 코켄(복위 후 이름은 쇼토쿠)천황의

신하였다. 코켄천황은 도쿄(道鏡, 도경)라는 승려를 총애해 그에게 법왕이라는 호칭을 내리고 급기야는

그에게 천황을 물려주려 했다. 이에 와케노 키요마로를 시켜 하치만신의 신탁을 받아 오라고 우사신궁에

파견하지만 키요마로는 오히려 황족에게만 황위를 계승하게 할 수 있다는 신탁을 받아오고 코켄천황과

도쿄의 분노를 산 그는 더러운 놈이라는 이름의 케가레마로라는 이름으로 개명되고 유배를 간다.

그러나 코켄천황이 죽고 도쿄가 실각하여 텐무천황계가 끊기고 텐지천황계의 코닌천황이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신의 뜻을 받았다는 이름의 신원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편 다른 기원인 타카노데라는 현재 진고지의 위치에 있던 곳으로 와케노 키요마로의 묘가 있는 곳에

지은 절로 역시 와케씨의 우지데라가 확실하지만 창건의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인근 아타고산의

산신을 모시는 산악신앙을 근거로 한 절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후 이곳은 와케노 키요마로의 누나인

법균니와 키요마로의 제사를 모신 것이 확인되며 천태종 교조인 사이초 또한 이곳에서 초청받아

법화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이후 구카이가 초정되어 관정의식을 행하였던 곳으로 그 기록이 남아있다.


824년 두 개의 사찰이 합쳐져 진고지(신호사)라는 사찰로 칙액을 받았다. 애초에 와케씨와 연관있던 두

사찰이었기에 무난히 통합되었으며 이후 구카이 계열이 주도권을 잡았다. 구카이 사후 그의 제자 신제이가

가람을 정비하고 사가천황의 아들 닌묘천황이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보탑을 쌓고 안에 오대허공장보살을

모신 것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헤이안시대 말기 쇠락하게 되는데 중세에 이르러서는 묘에의 할아버지

스승뻘인 분가쿠라는 승려가 나타나 진고지를 재흥하고 이후 고시라카와천황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원을 받아 재건한다. 이후 묘에도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는데, 이후로도 많은 후원을 받았다. 다만 조큐의

난 당시 분가쿠가 고토바천황 편에 선 까닭에 재건에 어려움이 따르기도. 이후 전국시대 항쟁 당시 건물이

전소하고 모모야마시대에 겨우 재건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령을 돌려주며 사세를 되찾기

시작하고 에도시대에 꽤나 큰 규모를 되찾는다. 그러나 폐불훼석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관리하던

아타고신사의 신궁사가 소멸되고 사역이 갈라져 해체되면서 자원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건물도

상당히 파괴되었다. 쇼와 초기에 겨우 현재의 금당과 다보탑을 재건했는데 덕분에 이 지역

최대 사찰이며 국보도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세계유산이 못 됐다.



누문의 이천왕상


다문천


반대편의


광목천


누문에서 바라본 경내


경내도

하 힘들다


버스 시간표


칙사문과 본방


진고지의 지정 건조물은 대사당 하나뿐이다.


누문


와케노 키요마로의 영묘


신사 식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모습


신사식 건물


뒤편으로 종루가 보인다.


종루로 올라가는 계단

에도시대 초기의 건물이다.


종루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범종이 보관되어 있다.


이제 경내로 간다.


금당으로 가는 계단


명왕당


에도시대의 건물이다.

애염명왕을 모시던 곳


뒤로 비사문당과 오대당이 보인다.


이곳이 원래 진고지의 금당을 비롯한 사역의 중심 구역이었다.

금당을 새로 지으면서 바뀐 것


오대당


에도시대 초기의 건물로 교토부지정문화재이다.

오대명왕을 모시는 곳


안내판


대사당


모모야마시대

중요문화재


모모야마시대의 주택풍 건물로 본래 구카이가 머물던 곳을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판각 홍법대사상을 모시고 있다.


비사문당


에도시대 초기의 건물로 이것이 본래 금당이었다.


대사당으로 간다.


특별공개하는 비불 판각홍법대사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내부의 불상


나무판에 부조로 새긴 홍법대사상으로 가마쿠라시대의 작품이다.

판조라는 것은 매우 드문 작례이다.


제대로 나온 사진


금당으로 가기 전


먼저 지장원에 가기로 한다.


산길로 5분 정도 간다.


전에는 태풍 때문에 오지 못했던 곳


꽤 깊이 들어간다.


건물이 보인다


지장원


유일하게 남은 자원이지만 사실상 종교기능은 잃었고 매점 역할만 하고 있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하는 액운 날리기 때문


이렇게 토기로 된 접시를 3장씩 판다.


이 산 아래로


액운을 날리며 접시를 던지는 것


경치 정말 좋다.


산 아래로 보이는 계곡


날린다



유선생도


기념으로


한바탕 하고 돌아가는 중


다시 산길을 되짚어


금당 앞 공포의 계단 앞에 섰다.


하...

진고지...

못 본 불상이 있어 또 와야 하다니


계단을 오르는 중


금당


언뜻 보면 오래된 건물 같지만 1930년대 새 위치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국보 약사여래상

높이 170cm의 등신대상으로 일목조로 만든 헤이안시대 초기의 불상이다.

하반식에 U자형 무늬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우리 통일신라불상에는 매우 흔하게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헤이안시대에 진짜 백단은 아니지만 이런 나무 표면을

드러내는 일목조의 상을 단상이라고 하여 매우 유행하였다고 한다.


정면상


약간 측면


두 손을 들고 약호를 쥐고 있다.


반대편


살집이 퉁퉁하고 자세히 보면 나뭇결이나 칼질 흔적까지 남아있다.

미감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대범한 불상이고 국보로 지정될 만한 기념비적 작품에는 동의한다.

한동안 고민에 빠지게 한 불상이었다.


좌우에 일광, 월광보살과 십이신장상이 있다.


일광, 월광보살상은 헤이안시대의 중요문화재로 후보가 많이 되었다고 한다.


국보 오대허공장보살상


다보탑이 봉안되어 있으며 닌묘천황이 아버지 사가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상이다.


관정역명

구카이가 진고지에서 한 관정 의식의 기록으로 구카이의 친필이다.

국보, 헤이안시대


국보 산수도병풍

헤이안 후기~가마쿠라 초기의 작품

밀교수법에 사용되는 것


국보 타카오만다라

헤이안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구카이 생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하며 당에서 가져온

만다라를 모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색 비단에 금니로 그린 만다라이다.

금강계


태장계


국보 석가여래상

헤이안시대 후기의 불화로 적석가라고 불린다. 헤이안시대 후기 아미타신앙이 일어나

석가신앙이 침체될 때 천태종을 중심으로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여래를 중요시하여

독존으로 모시는 운동이 나타났는데 그 흔적이다.


진고지 삼상이라고 하는 세 초상화는 국보전에서 보았으므로 생략


납경


돌아가는 중


교토역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시간표


버스를 기다린다


이제 닌나지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