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답사 기본상식

일본답사 기본상식 13 : 천황제2 - 천황제의 역사

同黎 2018. 8. 2. 09:59

5-3. 천황제의 역사

 

신화와 선사시대

천황을 신의 위상으로 처음 끌어올린 것은 일본서기와 고사기, 이 두 역사서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천손강림 이후 규슈지역에 자리잡았던 이들은 초대 진무천황을 중심으로 지금의 나라현 일대로 이주하여 야마토정권을 확립합니다. 이 외에 중국에 사서에 왜왕(倭王)이라고 등장하는 다섯 명의 왕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과연 기록상 어느 천황과 일치하는지, 혹은 야마토정권 이외 다른 세력의 왕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대 고분의 등장으로 점차 중앙집권화되는 세력이 등장한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입니다. 더불어 한반도와 중국에서 일본에 도래한 이들과 일본 정권이 밀접한 관계에 있으나 천황가와 혈연적으로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역시 명확치 않습니다.

다만 이 시기 주목되는 점은, 천황가의 세대교체론입니다. 일찍이 1~9대 천황은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인물이며, 10대 스진천황부터기 실존인물이며 10대 스진천황부터 15대 오진천황까지가 첫 천황가문이고. 16대 닌토쿠천황부터 25대 부레츠 천황까지, 26대 케이타이천황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번의 왕조교체가 있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천황가가 지금까지 한 번도 끈기지 않고 이어졌다는 만세일계의 이데올로기와 대립되는 것입니다. 비록 실증부분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설이기는 하지만 천황가가 그대로 이어졌다는 설은 현재 대부분 부정되고 있으며 고대 언젠가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설이 다수입니다.


율령제 전후

율령제 이전에는 천황이라는 용어가 없었습니다. 대신 대왕(大王, 오키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 및 한반도와의 교류의 과정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해가며 천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보입니다. 실제로 수나라에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라는 식의 국서를 보냈다는 기록이 중국 측 사료에서도 교차검토 됩니다.

천황(天皇)이라는 단어가 언제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본에서는 아스카시대를 연 쇼토쿠태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그럴 가능성은 조금 적어보입니다. 현재 7세기 초반 금석문에서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만 이것들 대부분이 조작의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6세기 중엽, 나라시대 초기 나라의 헤이조쿄 궁전 유적에서 발견된 쇼무천황대의 목간으로 대략 아스카시대 말기, 나라시대 초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천황이라는 단어의 어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도교의 옥황상제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쇼토쿠태자가 독자적으로 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당의 고종(高宗)이 스스로를 천황으로 일컬을 적이 있는데, 이를 본땄다는 의견입니다. 어원이 어떻건 간에 천황이라는 단어를 쓴 목적이 일본서기의 편찬 이후 스스로를 천손(天孫)으로 여기면서 이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대체로 인정됩니다. 이후 천황이라는 명칭은 율령에 반영되게 되고 우리가 알게 되는 단어들이 정착됩니다.

 

헤이안시대

나라시대와 헤이안시대를 거치며 천황이 중심이 되고 후지와라 귀족이 이를 뒷받침하는 모습의 정치형태가 완성됩니다. 나라시대부터 헤이안시대 초기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시도되고 또 일정부분 이를 이루기도 하지만 귀족들의 등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특히 후지와라씨가 대두하면서 율령제에 의해 규정된 관직을 초월하는 섭정과 관백이라는 관직을 독점하게 되고 이들의 조정의 주요 직책을 독점하면서 율령제를 통한 군사제도, 지방제도, 경제제도 등이 흔들리게 됩니다.

후지와라씨에 의해 점령된 조정을 피하여 천황은 현직을 피하고 조속히 퇴위한 후 상황이 되어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한 제2의 조정을 만들어 이를 통해 현재의 조정을 좌우하는 원정이 시작됩니다. 원정이라는 기형적인 통치체제는 당연히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이를 통해 후지와라씨를 억제하는데 성공하는 듯 했지만, 이는 명목상 최고 지도자인 천황의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더욱이 원정을 행하는 상황이 다음 태자까지 정하려고 하면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이 상황과 천황의 입장에서 대립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이런 대립은 군사적 대치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결국 후지와라씨 두 개 파벌로 갈라졌으며 군사적 투쟁 속에 미나모토씨와 타이라씨라는 두 개의 무사가문의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천황과 귀족이 무사를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사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무사정권

가마쿠라막부는 조정을 장악했던 타이라씨 무사정권의 실패원인이 무사의 귀족화라고 생각하고 거점을 교토가 아닌 가마쿠라에 놓음으로써 무사정권과 조정을 분리시켰습니다. 한편으로는 원정을 지속시켜 상황과 천황이 다투는 상황을 지속시키고, 막부가 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취하게 하여 교토의 황족과 귀족들을 무사가 통제하게 하였습니다. 때문에 원정은 에도시대까지 지속되게 됩니다. 또한 천황가의 장원을 차츰 줄임으로써 천황가의 경제권을 빼앗고 막부의 봉납에 의해 생활이 유지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사정권 하에서 천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권위는 없고 상징성만 있는 천황의 지위는 무사들이 역성혁명이라는 도박을 감행하지 않는 근거가 됩니다.

이를 타개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가마쿠라시대 말기 고다이고천황은 다른 무사들을 끌어들여 막부를 타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무사에 의해 옹립된 정권은 무사의 배신에 의해 무너졌고, 아시카가씨가 천황을 따로 옹립해 천황이 두 명이 되는 남북조시대가 도래합니다. 결국 남조를 멸망시키고 무로마치막부가 성립되고, 무로마치막부는 교토를 통제하기 위해 거점을 교토로 옮깁니다.

그러나 무로마치막부가 무너지자, 막부에 의해 경제권을 빼앗긴 천황가와 조정이 같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통일의 초석을 놓기 전까지 천황들은 극심한 빈곤에 빠져 글씨를 써주거나, 관직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에도막부가 등장하여 이러한 빈곤은 그쳤지만 더욱 강력한 압박이 천황에게 가해집니다. 에도막부는 천황의 업무를 문예(文藝)에만 힘쓸 것으로 공식화하였고 정치에의 간섭을 일체 차단합니다. 게다가 쇼군의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내 장차 쇼군의 외손자를 천황으로 세우려는 시도까지 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실패합니다. 어쨌든 에도시대의 전성기에 천황은 존재조차 잊혀질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졌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와 현대

천황이 일본 정치의 중심에 다시 나온 것은 서방세계의 개항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에도막부에 대해 불만을 품은 무사들과 오랫동안 정치에서 소외된 교토의 귀족출신 공경(公卿)들은 미국의 개항 요구에 저자세로 나가는 막부를 비판하며 존왕양이(尊王攘夷)파를 형성하였고, 천황을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고메이천황은 막부에게 개항에 대한 입장을 묻게 되었고 거의 250년 만에 천황과 쇼군의 대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고메이천황의 아들인 메이지천황은 메이지유신의 주인공이 되어 막부군을 물리치고 친정을 하게 됩니다. 이후 천황은 일본정치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는데,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천황을 절대적 중앙집권화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여 독일식 절대군주제를 도입시켜 근대적 황제의 면모를 도입하고, 동시에 일본신화를 강조하여 천황의 신성(神性)을 강조하여 천황을 신의 영역까지 끌어올립니다. 일본 특유의 근대 천황제는 바로 이 때 성립됩니다.

또한 메이지시대 이후 천황은 자주 모습을 드러냅니다. 에도시대까지 사라졌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메이지천황은 전국으로 순행을 다니며 민중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또한 정부에서도 천황과 황족들의 초상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고, 이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이렇게 천황은 모습을 드러낸 신으로서 상징화되었고,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의 세계로 가는 것으로 미화되었습니다.

메이지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의 3명의 천황, 즉 메이지, 다이쇼, 쇼와천황의 실권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습니다. 당시 일본의 제국헌법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총리를 비롯한 주료 각료들의 임명은 유력한 정치인들 파벌 간의 조율을 통해 이루어져 천황에게 상주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나 파발건의 합의제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황의 영향력이 결코 적지는 않았습니다. 평소에 정치가 깊게 개입하진 않았지만 정치적 혼란이 잇을 때에는 직접 개입하여 파벌간의 화합을 주도하거나 심지어 개각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전쟁에서의 중요한 결정은 결국 천황이 결정을 요하는 것이었고, 천황이 결심만 하면 기존 정치세력을 쌀쓸이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도조 히데키를 사임시키고 항복을 결정한 것 역시 쇼와천황입니다.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 통제를 위해 천황제를 존속시킬 것을 결정합니다. 이는 종전 직후 일본의 좌파가 일본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자, 일본의 공산국가화를 막고 기존의 정치세력과 관료를 이용해 일본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신 아래의 사진에서 보이듯이 천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덕분이 천황과 황족들은 전범에서 제외되고 전쟁의 법적 책임도 지지 않게 됩니다.




이후 지금까지 천황은 철저하게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평화헌법은 천황을 일본국의 상징이라고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일본은 국가 원수가 명시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천황은 철저히 봉사활동과 문화활동 만으로 시간을 보내며 현실정치에 대해서 어떠한 의견도 표방하지 않습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천황에게 탈원전 의견을 쓴 편지를 직접 전달하려 한 국회의원 때문에 큰 소동이 일었을 정도입니다. 다만 현재의 천황과 다음 천황이 될 황태자는 대체적으로 아베 정권에 비판적이며 평화헌법 수정이 부정적인 의견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