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답사 기본상식

일본답사 기본상식 12 : 천황제1 - 천황제의 개념과 용어

同黎 2018. 7. 27. 07:54

5. 천황제

 

일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천황제입니다. 천황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수백 년 동안 좋지 않았던 한일관계를 생각해보면 스스로는 황제 위인 천황으로 자칭하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사를 바라볼 때 천황제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또한 각종 황실용어를 일일이 격을 낮추어 바꾸는 것도 번거로운 일입니다.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서는 역사용어로써의 천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천황의 즉위식 모습



5-1. 일본인에게 천황제란

 

사실 일본을 단순히 여행한다는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인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정치에 대해서 논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민감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일상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천황과 황실들의 여운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일본인들이 천황을 대하는 자세를 새삼 알게 된 것을 일본에 가게 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평일 오후 교토의 유명 신사를 구경하고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은 흔치 않은 일이라 무슨 일인가 하고 보았더니 천황이 심근경색 때문에 수술에 들어가자 쾌유를 비는 서명운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이후 주변을 둘러보니 NHK 아침뉴스의 첫머리에는 천황과 황태자의 사소한 동정이 보고되고 있고, 심지어 황실 일가를 주제로 한 (가십) 주간잡지나 달력도 팔리고 있습니다. 서기년도를 쓰는 한국 등 다른 나라와는 달리 새 천황이 즉위할 때 마다 사용하는 연호를 더욱 자연스럽게 쓰는 곳이 일본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천황은 일부 극우들이 떠받드는 일본 우익정치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존재입니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공화국에 살아 공화제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듯이 일본인들에게는 천황제와 연호와 같은 요소들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천황의 교체가 한 시대의 시작과 종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일본사회를 바라보아야 최근 일본의 천황 양위와 관련된 일련의 소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일본은 곧(2019년 봄) 현 천황이 사임하고 황태자에게 직위를 양위합니다. 천황은 기본적으로 종신직이지만 현 천황의 건강 문제와 아베 정권의 개헌 시도에 대한 불만 등으로 이례적인 생전 퇴위가 이루어집니다. 이 것은 지금까지 쓰던 헤이세이 연호가 끝나고 새로운 연호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일본인들에게는 일본 거품경제의 종말과 냉전의 종말 등으로 특징되는 헤이세이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대가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 천황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옴진리교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사건 등의 사형 집행을 마무리 짓는 등, 우리사회의 통념과는 좀 먼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불합리하기도, 전근대적이게도 느껴지는 천황제가 작동하는 나라가 바로 일본입니다.

 


천황가의 문장


5-2. 천황제의 용어들

 

천황과 연호

일본국 헌법의 제1장은 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천황입니다. 비록 전전(戰前) 헌법에서는 절대군주로, 전후(戰後) 헌법에서는 국가의 상징으로 위상이 현저히 달라졌지만 천황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현재 천황(天皇, 덴노)은 전후 헌법에 의해 정치개입이 일체 금지되어 있으며 실제로도 황실 일원이 절대로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주로 봉사활동이나 문화활동, 전국의 사찰이나 신사, 문화유산 관람만이 공무(公務)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국회의 개회와 해산 등은 형식적으로 천황의 재가를 받지만 천황에게 거부권은 없습니다. 또한 재산은 물론 모든 행동은 궁내청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번 천황의 생전 퇴위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여담이지만 궁내청 혹은 천황가의 재산으로 분류된 것 중에는 문화재가 많습니다. 정청원의 유물들 역시 궁내청 관리하에 속하며, 교토의 궁전과 천황가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 및 천황가에 바쳐진 많은 유물들의 컬렉션은 어마어마합니다. 또한 천황과 황족의 무덤으로 전승되는 각 고분들도 모두 궁내청 소관입니다. 그러나 천황과 관련된 것은 국가지정문화재가 되지 못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어 이들 문화재에 대한 지정 및 조사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따라서 유네스코에서 나라 지역의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할 때 정창원이 국가지정문화재가 되지 않아 세계유산에서 제외될 뻔 했고, 때문에 궁내청 관할 문화재 중 유일하게 정창원관 예외로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천황은 125대이며 곧 126대 천황이 즉위할 예정입니다. 이 대수는 메이지유신 때 정해진 것으로, 천황가의 정통성을 위해 조정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실제 즉위 여부가 논란이 있는 천황도 있으며, 폐위되었던 천황도 복위시켰습니다. 또한 남북조시대 때 북조의 천황들은 현 천황의 직계 조상임에도 무로마치 막부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남조의 마지막 천황인 고카메야마천황이 북조의 6대 천황이자 100대 천황인 고코마츠천황에게 양위한 것으로 처리하였습니다. 다만 역대 천황을 손꼽을 때 125대 이외에 북조 5대는 천황으로는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두 번 즉위한 천황 2명을 제외하면 현재까지의 천황은 125, 북조 5, 128명입니다. 일본에는 한국과 같은 종묘가 없고 천황의 거처인 황거(皇居) 내에 메이지시대에 처음 지은 황령전이라는 건물에 위패를 모십니다. 여기에 쇼와천황까지 127명의 위패가 있습니다.

한편 일본의 천황은 연호를 사용합니다.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헤이세이(平成)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능숙하게 연호와 서기연도를 비교하여 잘 씁니다. 본래 한명의 천황이라도 여러 개의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여러 가지 편리성을 고려하여 중국 명, 청처럼 한 명의 천황이 일생토록 한 가지 연호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고, 이후 연호는 해당 천황이 죽으면 그 천황의 시호(諡號)로 사용하는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현 천황은 헤이세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므로 사후 헤이세이천황이 될 예정이지만, 이는 시호로, 생전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천황을 가리킬 때는 단지 금상(今上)천황이라고 합니다. 헤이세이천황이라는 표현은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황후, 중궁

천황의 정실부인을 황후(皇后)라고 합니다. 그러나 황후라는 용어가 정착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로 이전까지는 여러 단어가 혼합되어 있는데 이는 황실 내의 일부일처제가 정확히 확립된 것은 현 천황의 할아버지인 다이쇼천황에나 이르러서입니다. 또한 황후라는 용어가 근대적 용어로 정착한 것은 메이지천황에서나 이르러서입니다. 그전까지는 황후에 대한 용어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율령제가 반포되기 이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간혹 황후는 별도의 명칭이 없었습니다. 고대 일본 천황의 정실부인을 대부분 황족이었기 때문에 별도로 다른 경칭을 쓰지 않고 황녀(皇女), 내친왕(内親王)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율령제가 반포되고 나라시대에 이르러 후지와라씨의 여인들이 정실이 되는 경우가 많자 황후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별칭에 불과했습니다.

헤이안시대에 이르러 율령에 황후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황후의 거쳐인 중궁(中宮)이라는 표현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력자의 딸들이 천황의 부인으로 입궐하고 당시 일본의 궁내(宮內)가 조선의 내명부(內命婦)처럼 정리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천황에게 두 명의 정실을 둘 수 있도록 하게 되었던 황후와 동의어였던 중궁이라는 단어가 활용되어 황후과 중궁이 병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 천황의 생모 역시 이에 준하는 대접을 받기 때문에 실제 누가 권위가 있는가는 친정과 자식에 따라 달려졌습니다.

그나마 남북조시대 이후로는 황후와 중궁이라는 표현도 거의 쓰이지 않고 사실상 사라져있었습니다. 일본의 내명부 체계가 정리된 것을 메이지유신 이후로 이때 이르러 황후는 1명으로 고정되고 중궁이라는 칭호는 폐기되었습니다. 또한 다이쇼천황에 이르러 서양식 일부일처제가 정착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상황, 법황,

메이지유신 전까지 의외로 천황이라는 단어는 의외로 많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헤이안시대 이래로 천황은 매우 즉위기간이 짧고, 빨리 은퇴하여 치천의 군주(治天)인 상황(上皇) - 공식명칭은 태상천황(太上天皇)- 이 되어 원정(院政)을 행하는 것이 더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황의 전임자가 상황이 되어 현 천황을 조정하거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우려한 미군정은 황실법인 황실전범에서 천황의 생전 퇴위를 금지시켜 한동안 상황이라는 단어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금번 천황의 생전퇴위가 특별법으로 통과되어 상황이라는 단어가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은 보통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불교계와 결합하면 물적, 인적 자원을 얻을 수 있었고 속세의 규범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일본 유력자들이 자주 선택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처럼 결혼한 상태에서 출가한 인물을 뉴도(入道)라고 합니다. 출가한 상황은 법황(法皇)이라고 칭합니다.

상황이든, 법황이든 퇴위한 천황들은 주로 자신들의 거처(별궁)을 중심으로 ○○(, )이라고 칭했습니다. 반면 현역의 천황은 미카도()라고 칭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천황은 생전에 퇴위해 상황이 되었으므로 이들은 모두 원(, )으로 불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컨대 퇴위 후 교토 사가 지역에 머물렀던 천황은 사가인(嵯峨院)이라고 불렸습니다이러한 관행은 헤이안 천도 이후 점차 생겨나서 헤이안시대 후기에 완전히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러한 원호(院號)가 완전히 정착한 후에는 상황 스스로 자신의 원호를 골랐습니다. 예를 들어 가마쿠라막부를 멸망시키고 천황 친정체제를 꿈꿨던 고다이고천황(後醍醐天皇)은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던 다이고천황을 잇겠다는 의미를 표명하여 양위 후 스스로 후()자를 붙여 고다이고인(後醍醐院)이라는 원호를 사용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원정기의 유산이 남아있는 원호는 천황의 친정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일제히 혁파되고 모두 천황칭호를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원은 ○○천황으로 바뀌었고 이때 붙어졌던 원호는 시호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천황 칭호의 유래입니다.

 

황족, 궁가(미야케)

마지막으로 황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천황의 아들은 친왕(親王)이라고 하며 딸은 내친왕(內親王)이라고 합니다. 이 친왕의 칭호는 부계로만 3대까지 세습되며 내친왕의 경우 황족과 결혼하면 칭호가 유지되지만 일반인과 결혼하면 내친왕이라는 칭호가 박탈됩니다. 일본의 황실은 남존여비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여계 혈통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친왕은 세습되기 때문에 하나의 가문을 이룹니다. 이러한 경우 궁호(宮號)가 주어지고 이 궁호가 대대로 세습됩니다. 이러한 집안을 궁가(宮家) 즉 미야케라고 합니다. 그리고 3대가 지나도 황족으로서의 예우는 지켜지는데 이때 남자는 왕(), 여자는 여왕(女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궁가의 세습을 허용하는 이유는 황족의 남성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근친혼의 영향 때문인지, 현재 일본의 황위계승권을 지닌 남성 황족의 수는 매우 적습니다.

본래 근대 이전 일본의 황실의 황위계승권자 이외의 황자들은 신적강하(臣籍降下)라고 하여 성씨를 하사받고 황위계승에서 제외된 체 관직에 나가거나, 아예 출가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출가한 친왕은 법친왕(法親王)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들어와 황족이 줄어들고 언젠가 황실 직계의 계보가 끊길 것을 걱정하여 영원히 세습할 수 있는 세습친왕가를 만듭니다. 즉 이들은 천황의 후손이 끊겼을 때 천황의 계승권을 가지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이들 친왕가의 후계가 없어지지만 천황은 자신의 장남 이외의 아들을 이곳에 양자로 보낼 수도 있어 득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세습친왕가가 에도시대를 거치며 총4개가 생겨나게 됩니다.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중 하나인 간인노미야의 후손이 바로 현재의 천황가입니다.

 

후시미노미야(伏見宮)

북조 3대 스코천황(崇光天皇)의 아들 요시히토(栄仁)를 시조로 세워진 세습친왕가로 4세습친왕가 중 역사가 제일 오래되었으나 현재 남계후손이 없어 단절 예정

카츠라노미야(桂宮)

106대 오기마치천황(正親町天皇)의 손자 토시히토(智仁)를 시조로 세워진 세습친왕가. 1881년 마지막 당주가 사망하면서 단절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107대 고요제이천황(後陽成天皇)의 아들 요시히토(好仁)를 시조로 세워진 세습친왕가. 1923년 마지막 당주의 왕비가 사망하면서 단절

간인노미야(閑院宮)

113대 히가시야마천황(東山天皇)의 아들 나오히토(直仁)를 시조로 세워진 세습친왕가로, 제일 늦게 창설되었으며 1988년 단절.

1779년에 당시 천황이던 고모모조노천황의 후계로 간인노미야의 고카쿠천황이 즉위하여 천황가의 직계에 해당

 

한편 메이지유신 이후 황족들의 정치참여가 허가되고, 이들의 천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면서 황족들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또한 남성 황족들은 대부분 군인이 되어 청일전잰,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보면 황족들의 위상이 메이지유신 이후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키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北白川宮能久)

육군중장. 린노지에 출가했다가 환속. 무진전쟁 당시 막부 측이 천황으로 옹립하려고 함.

환속 이후 육군에 입대. 대만 정벌 당시 말라리아로 사망.

쿠니노미야 쿠니요시 왕

(久邇宮邦彦)

육군대장. 쿠니노미야 가문 2대 당주로 현 천황의 외조부. 1928년 대만 방문 중 조명하 의사에게 목을 찔렸고, 이듬해 폐혈증 으로 사망.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梨本宮守正)

원수 육군대장. 이방자의 아버지이자 영친왕의 장인으로 2차대전 말기 이세신궁 제주를 맡았고, 전후 A급전범 혐의로 황족 중 유일하게 구류되다가 불기소됨.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朝香宮鳩彦)

육군대장. 1937년 사령관을 대리해 남경전투를 지휘했고, 남경 함락 이후 벌어진 남경 대학살의 명령자 혹은 최소 묵인.

이후 GHQ의 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로 처리되었고 93세까지 살다 사망.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東久邇宮稔彦)

육군대장, 43대 내각총리대신. 최초이자 현재 유일한 황족 총리로 패전 2일 후 임명돼 패전 처리 등을 맡음.

 

그러나 전후 미군정은 이러한 황족들의 정치 참여를 끊기 위해 대대적인 황족 정리를 시작합니다. 즉 기존의 세습친왕가와 이후 많이 성립된 각종 분가들의 친왕가들을 모두 없애고 당시 천황이었던 쇼와천황의 형제들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합니다. 이때 정리된 황족들을 구황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궁내청으로부터 지원도 받지 못하고 별다른 기술이나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고 지금까지 우익의 주요 구성원이 됩니다. 공교롭게도 미군정이 인정한 친왕가들은 대부분 아들이 없어 현재 사라질 예정이며 현 천황의 차남 가문만 아들이 있습니다